내가 사는 주식은 무조건 오른다

7화: 위기는 공시보다 먼저 온다
"네. 강진호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바로 대답이 오지 않았다.
퇴근 후의 사무실은 낮보다 더 넓게 느껴졌다. 꺼진 모니터들이 검은 유리처럼 책상마다 박혀 있었고, 남은 형광등 몇 줄만 재무기획팀 바닥을 희게 눌렀다.
강진호는 펜 끝을 노트 위에 세운 채 기다렸다.
먼저 말하지 않는다.
먼저 설명하지 않는다.
묻는 만큼만 답한다.
"오늘 자금팀에서 금갑유통 자료 받아 간 신입 맞습니까?"
낯선 남자 목소리였다.
높지 않았다. 그런데 낮아서 더 불편했다. 화를 내는 사람은 감정을 드러낸다. 이런 목소리는 감정 대신 목적만 남긴다.
"네. 박태성 대리님 지시로 원자료 복사본을 수령했습니다."
"그 자료가 정식 회람 전이라는 말은 들었습니까?"
"들었습니다."
"들었는데 왜 가져갔죠?"
강진호는 노트 한쪽에 짧게 적었다.
전략기획실. 회람 전 공유 경위 확인.
글씨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담당자 이름, 수정 일자, 요청 부서, 회람 여부를 확인해 오라는 지시였습니다. 회람 전이라는 내용도 함께 메모했습니다."
"메모요?"
"네. 박 대리님께 보고드릴 내용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숨이 아주 짧게 끊겼다.
상대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틀린 답도 아니었다. 신입이 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말은 자기 판단이 아니라 상사의 지시였다.
"강진호 씨."
"네."
"신입이면 아직 절차를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전략기획실 표시가 붙은 자료는 자금팀에서 직접 받지 말고, 우리 쪽 정리본을 기다리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받은 자료는 두고 갔어야죠."
"원본은 반출하지 않았습니다. 자금팀에서 복사본 수령 도장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복사본 말입니다."
목소리가 조금 딱딱해졌다.
강진호는 수화기 줄을 손가락으로 감지 않았다. 작은 습관도 긴장을 드러낸다.
"회수 지시가 있으면 담당자 성함과 회수 사유를 적어 박 대리님께 보고드리겠습니다."
같은 말이었다.
판단하지 않는다.
절차만 반복한다.
박태성은 그를 묶으려고 줄을 던졌다. 강진호는 그 줄을 방패로 세웠다.
침묵이 길어졌다.
"자료 내용은 어디까지 봤습니까?"
질문이 바뀌었다.
강진호의 눈이 아주 조금 가라앉았다.
회수하려는 게 아니었다.
누가 어디까지 봤는지 확인하는 전화였다.
"표지의 담당자, 수정 일자, 요청 부서, 회람 여부를 확인했습니다. 대리님 지시 항목입니다."
"안쪽 수치는?"
"금갑건설 자료와 날짜가 겹치는 부분을 표시하라는 지시를 받아 확인 중입니다. 세부 판단은 아직 보고 전입니다."
"전략기획실 메모도 봤습니까?"
이승준.
전무실 검토 후 재무기획 공유.
종이 위의 그 이름이 다시 떠올랐다. 옥상 난간과 차가운 바람도 함께 떠올랐다.
강진호는 대답을 늦추지 않았다.
"회람 여부 확인 중 포스트잇 메모를 봤습니다."
"무슨 뜻인지 압니까?"
"정식 회람 전이라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이상은 모른다.
2006년의 신입 강진호는 그래야 했다.
상대는 다시 잠깐 침묵했다.
"박태성 대리에게는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네."
"그리고 오늘 본 내용은 외부에 말하지 마십시오."
"회사 자료는 외부에 말하지 않습니다."
남자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지만,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강진호는 수화기를 바로 내려놓지 않았다. 끊어진 전화에도 의도는 남는다.
전략기획실은 아직 그를 위험 인물로 확정하지 않았다.
절차를 이상하게 잘 지키는 신입.
그 정도면 됐다.
문을 열 필요는 없다. 문고리가 어디 붙어 있는지만 알면 된다.
다음 날 아침, 박태성은 출근하자마자 강진호를 불렀다.
"어제 전략기획실에서 전화 왔다며."
"네."
강진호는 전날 적어 둔 통화 메모를 건넸다. 시각, 발신 부서, 질문 내용, 답변. 감정은 없었다. 절차만 있었다.
박태성은 메모를 끝까지 읽었다.
"네가 판단한 말은 없네."
"대리님 지시대로 보고 경위만 답했습니다."
"전략기획실 메모 봤냐고 물었다고?"
"네."
"뭐라고 했어?"
"정식 회람 전이라는 뜻으로 이해했다고 답했습니다."
박태성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말귀는 알아듣는다니까."
칭찬이 아니었다.
쥐고 있는 줄이 제대로 걸렸는지 확인한 얼굴이었다.
"좋아. 이건 내가 들고 있을게."
박태성은 통화 메모를 자기 서류철 안에 넣었다.
"금갑건설 단기운영자금이랑 금갑유통 매출채권 날짜 다시 맞춰. 월말 회수, 7월 초 지급 조정, 그 사이 비는 칸 표시해."
"알겠습니다."
"전략기획실에서 또 직접 전화 오면?"
"대리님께 먼저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래. 네가 직접 판단할 일 아니야."
"명심하겠습니다."
박태성은 만족한 듯 돌아섰다.
그는 강진호가 자기 안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강진호는 그 안쪽에서 무엇을 볼지 알고 들어갔다.
김미나가 멀리서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박태성이 사라지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어제 늦게까지 있었어요?"
"조금 남았습니다."
"전략기획실 전화라면서요. 신입한테 직접 전화 오는 거 흔한 일 아니잖아요."
"자료 회람 문제였습니다."
"진호 씨는 매번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해요."
강진호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별일이 아니라고 해야 했다. 그래야 김미나도, 박태성도, 전략기획실도 그를 2006년의 신입으로 본다.
"처리됐습니다."
"정말요?"
"절차대로 넘겼습니다."
김미나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책상 위에 작은 김밥 봉지를 내려놓았다.
"점심 또 거르면 화낼 거예요."
"먹겠습니다."
"그 말, 믿어도 돼요?"
강진호는 봉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요."
김미나는 완전히 믿지 않는 얼굴로 돌아섰다.
강진호는 자금 대용표를 열었다.
금갑건설 단기운영자금.
금갑유통 매출채권.
서로 다른 계열사의 서로 다른 항목인데 날짜는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6월 말 회수 예정.
7월 초 지급 조정.
전략기획실 요청.
전무실 검토.
빈칸은 돈이 사라진 자리가 아니었다. 돈을 잠깐 숨길 자리였다.
건설사는 늘 먼저 돈을 밀어 넣는다. 땅을 사고, 공사를 시작하고, 하청 대금을 지급하고, 분양과 대출로 나중에 회수한다. 경기가 좋을 때는 회전이 빠르다. 은행은 돈을 빌려주고, 증권사는 어음을 받아 주고, 사람들은 분양권을 통장보다 안전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자금시장이 얼면 모든 날짜가 칼이 된다.
하루 미룬 회수가 한 달로 늘고, 한 달 밀린 지급이 부도 소문으로 번진다.
2008년의 위기는 아직 신문에 없었다.
하지만 위기는 공시에 뜨기 전부터 장부의 날짜를 바꾼다.
강진호는 두 자료의 겹치는 구간에 작은 점을 찍었다.
아직 보고서에는 점 하나면 충분했다.
개인 노트에는 전쟁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점심시간, 강진호는 김미나가 준 김밥 봉지를 가방에 넣고 회사를 나왔다.
그가 향한 곳은 식당이 아니라 증권사 지점이었다.
대묵바이오를 사고팔 때는 온라인 계좌와 무선 모뎀이면 충분했다. 짧은 기억, 빠른 손, 미수와 현금서비스를 밀어 넣을 배짱. 그 정도로 첫 판은 끝낼 수 있었다.
다음 판은 달랐다.
오르는 종목을 사는 건 쉽다.
떨어질 종목에 베팅하는 건 훨씬 번거롭다.
창구 직원은 신분증과 계좌번호를 확인하다가 모니터 앞에서 손을 멈췄다.
"최근 거래가 꽤 있으셨네요."
"단기 매매가 있었습니다."
"대묵바이오요?"
직원은 말하고 나서야 너무 직접적이었다는 듯 웃었다.
"요즘 많이들 물어보셔서요."
"운이 좋았습니다."
강진호는 짧게 답했다.
운.
설명하기 편한 단어였다. 동시에 가장 위험한 단어이기도 했다. 운으로 번 돈은 다른 사람의 호기심을 부른다. 실력으로 번 돈은 더 큰 의심을 부른다.
"신용거래 문의라고 하셨죠?"
"대주거래도 가능합니까?"
직원은 안내 책자를 꺼냈다.
"가능은 한데 개인 대주 물량은 종목마다 제한이 큽니다. 거래 가능한 종목도 매일 달라지고요. 신용 약정, 투자 성향 확인, 보증금률도 봐야 합니다."
"건설주도 됩니까?"
"일부 대형주는 가능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원하시는 종목이 있으면 그때그때 확인해야 합니다. 물량이 없으면 주문 자체가 안 나가요."
"특정 종목을 오래 빌려 파는 것도 가능합니까?"
"기간 제한이 있습니다. 중간에 상환 요청이 들어올 수도 있고요. 개인 고객은 기관처럼 마음대로 물량을 잡아 두기 어렵습니다."
당연했다.
2008년의 폭락을 안다고 해서 2006년의 제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미래를 아는 것과 그 미래에 돈을 실을 수 있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주가지수 선물이나 옵션은요?"
"별도 계좌가 필요합니다. 기본 예탁금도 있고, 위험 고지와 교육 확인이 들어갑니다. 처음이시면 설명을 먼저 들으셔야 해요."
"약정 서류만 받아 갈 수 있습니까?"
"가능합니다. 다만 고객님 계좌 규모면 바로 큰 포지션은 어렵습니다. 담보도 봐야 하고, 거래 이력도 확인합니다."
거래 이력.
강진호는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대묵바이오 수익.
카드 현금서비스.
미수 사용.
상환 기록.
전부 계좌와 금융기관 안에 남아 있었다. 지금은 작은 흔적이다. 하지만 언젠가 누군가가 그를 파헤치려 들면, 작은 흔적도 질문이 된다.
직원은 서류 봉투를 건넸다.
"여기 신용거래 약정, 대주거래 안내, 선물옵션 계좌 개설 조건입니다. 건설주 쪽은 원하시는 종목명을 주시면 당일 가능 여부 확인해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요즘 바이오로 수익 내신 분들이 바로 신용 쓰려는 경우가 많은데, 하락 쪽은 생각보다 위험합니다."
강진호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는 정말 알고 있었다.
하락에 베팅하는 사람은 맞아도 시간을 틀리면 죽는다. 회사가 부실하다는 사실과 주가가 내리는 시점은 같지 않다. 시장은 틀린 회사를 오래 올려 보내고, 맞는 사람을 먼저 털어 낸 뒤에야 무너진다.
금갑건설도 그럴 것이다.
너무 빨리 칼을 꽂으면, 칼을 뽑기도 전에 손이 먼저 잘린다.
회사로 돌아왔을 때 김미나는 빈 책상을 보고 있다가 강진호를 발견했다.
"점심 먹었어요?"
"먹었습니다."
"그 봉지 그대로인데요."
강진호는 가방 안을 보았다. 김밥 봉지는 그대로였다.
김미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거짓말도 성의 있게 해요."
"밖에서 간단히 먹었습니다."
"진짜요?"
"네."
김미나는 믿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서류 봉투 쪽으로 시선이 갔다.
"또 자료예요?"
"개인 서류입니다."
"돈 문제 아니라고 했잖아요."
"일부는 정리됐습니다."
"일부만요?"
강진호는 대답 대신 가방을 닫았다.
김미나는 잠시 그를 보다가 낮게 말했다.
"진호 씨는 사람을 걱정하게 만드는 데 재주 있어요."
"그럴 의도는 없습니다."
"의도가 없으니까 더 문제죠."
그 말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강진호는 다시 자리에 앉아 박태성이 시킨 날짜 대조표를 채웠다. 회사 서류에는 건조한 문장만 남겼다.
금갑건설 단기운영자금 지급 조정 예정일과 금갑유통 매출채권 회수 예정월 일부 중첩. 자금팀 원자료 기준 추가 확인 필요.
그 이상은 쓰지 않았다.
전략기획실이 날짜를 맞추고 있다.
전무실이 회람 전 검토한다.
이승준의 이름이 그 위에 붙어 있다.
이 문장들은 아직 회사 보고서에 올라갈 말이 아니었다.
언젠가 칼이 될 때까지 개인 노트 안에 있어야 했다.
박태성이 지나가며 그의 표를 확인했다.
"군더더기 없네."
"확인 가능한 부분만 적었습니다."
"그래. 그 버릇 유지해. 신입이 아는 척하면 오래 못 간다."
"명심하겠습니다."
박태성은 모른다.
강진호가 오래 가기 위해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 것을.
그날 밤, 자취방의 형광등은 회사보다 더 차가웠다.
강진호는 책상 위에 증권사에서 받아 온 서류 봉투와 개인 노트를 나란히 놓았다. 회사 자료 원본은 없었다. 가져와서도 안 됐다. 대신 머릿속에 남은 날짜와 노트에 찍은 작은 점들이 있었다.
그는 새 페이지를 펼쳤다.
2008 전조 - 금갑건설
아래에 천천히 적었다.
PF 잔액 증가
CP 만기 집중
계열사 매출채권 회수 시점 조정
전략기획실 사전 개입
개인 대주 물량 제한
지수 선물/옵션 준비
연필심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 방 안에 남았다.
금갑그룹은 아직 건재했다.
금갑건설도 당장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당분간은 더 크게 보일 것이다. 부동산 시장은 뜨겁고, 은행은 대출을 늘리고, 사람들은 미분양이라는 단어를 잊은 것처럼 굴 것이다.
그때 금갑은 더 많은 빚을 끌어온다.
더 큰 현장을 벌이고, 더 긴 만기의 돈으로 더 짧은 구멍을 막는다. 계열사 매출채권 회수일을 당기고, 단기운영자금 지급일을 미루고, 빈칸에 다른 이름을 붙인다.
지금은 장부 위의 작은 점이다.
2008년에는 그 점들이 선이 된다.
그리고 선이 끊어지는 순간, 사람들은 그제야 위기라고 부른다.
강진호는 증권사 서류를 펼쳤다.
신용거래 약정.
대주거래 안내.
선물옵션 계좌 개설 조건.
문장마다 제한이 붙어 있었다. 담보, 한도, 교육, 위험 고지, 반대매매, 상환 요청.
미래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방향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방향을 돈으로 바꾸려면 현재의 숫자를 검증해야 한다. 어떤 회사가 먼저 균열을 보이는지, 어떤 종목에 대주 물량이 열리는지, 어느 시점에 지수로 때려야 하는지.
그걸 혼자서 전부 처리하면 반드시 흔적이 굵어진다.
김미나는 걱정한다.
박태성은 감시한다.
전략기획실은 확인한다.
그 어디에도 그의 판을 함께 계산할 사람은 없다.
강진호는 노트 마지막 줄에 적었다.
외부 분석 동선 필요.
펜을 내려놓자 손끝에 늦게 힘이 풀렸다.
복수는 분노로 시작했지만, 분노만으로는 금갑그룹을 무너뜨릴 수 없다. 돈은 감정에 반응하지 않는다. 날짜와 이자, 담보와 만기, 공포와 탐욕에 반응한다.
강진호는 창밖을 보았다.
2006년의 밤은 평온했다. 거리의 간판은 밝았고, 사람들은 아직 자신들이 어떤 절벽을 향해 걷고 있는지 모른다.
금갑그룹도 모른다.
아니, 일부는 알고도 모르는 척하고 있을 것이다.
강진호는 노트를 덮었다.
2008년은 아직 멀었다.
하지만 위기는 이미 숨을 얕게 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공매도는 오늘부터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