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주식은 무조건 오른다

3화 레버리지의 이름
박태성이 던지고 간 파일은 생각보다 두꺼웠다.
표지에는 계열사 자금 대용 현황이라고 적혀 있었다. 평범한 내부 문서처럼 보였지만, 강진호의 눈에는 표지부터 검게 번져 보였다.
훗날 금갑건설 단기운영자금이라는 작은 항목 하나가 금갑그룹 비자금 통로의 입구가 된다. 지금은 아직 아무도 그걸 모른다. 박태성도, 회계팀도, 책상 사이를 오가는 신입들도.
알고 있는 사람은 강진호뿐이었다.
"점심 먹기 전까지 대충이라도 봐."
박태성이 말했다.
"숫자 이상한 데 있으면 표시하고. 신입이라고 손 놓고 있으면 여기 못 버틴다."
"알겠습니다."
강진호는 파일을 받아 들었다.
박태성은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강진호의 모니터, 키보드, 책상 위 지갑까지 느리게 훑고 지나갔다.
첫날부터 감시가 붙었다.
강진호는 고개를 숙인 채 숨만 낮췄다. 박태성이 회의실 쪽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업무 문서 창을 열었다. 그리고 그 뒤에 개인 HTS 창을 작게 숨겼다.
대묵바이오 6,905주.
평균단가 2,176원.
예수금 잔액은 초라했다. 점심값과 교통비를 빼면 남는 것도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서 멈췄다. 첫 출근한 신입사원이 입사 축하금과 적금을 깨서 코스닥 바이오주 하나에 전부 넣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충분하다는 말은 강진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금갑그룹을 무너뜨리려면 돈이 필요했다. 돈은 시간을 당겨오는 손잡이였다. 미래를 알아도 돈이 없으면, 결국 남의 명령을 받아 적는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계좌 세부 화면을 열었다.
대용금.
미수 가능 금액.
신용 가능 여부.
낡은 HTS 화면에 숫자들이 거칠게 박혔다. 신용거래는 종목 제한에 걸렸다. 대신 미수는 가능했다.
결제일까지 돈을 넣지 못하면 반대매매.
사흘 안에 판이 움직이지 않으면 계좌가 강제로 정리된다. 수익은커녕 빚만 남을 수도 있었다.
강진호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위험했다.
그러나 위험의 날짜를 알고 있다면, 그것은 절반쯤 계산 가능한 비용이었다.
문제는 한도였다. 미수만으로는 부족했다. 대묵바이오가 기억대로 일곱 번 상한가를 찍더라도 원금이 작으면 복수는 느려진다.
그는 지갑을 열었다.
현금카드 하나.
체크카드 하나.
그리고 사회초년생에게 은행이 실적 채우듯 발급해 준 신용카드 한 장.
한도는 크지 않았다. 그래도 현금서비스 가능액은 있었다.
카드 현금서비스.
그 단어를 보는 순간 헛웃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전 생에서는 월세가 밀렸을 때도 끝까지 피하려 했던 수단이었다. 이자는 잔인하고, 신용은 바로 더러워진다.
정상적인 투자라면 절대 손대면 안 되는 돈.
하지만 그는 지금 정상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강진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호 씨, 밥 안 먹어요?"
김미나가 가방을 들다 말고 그를 보았다.
"은행 좀 다녀오겠습니다."
"은행이요? 첫날부터?"
"카드 비밀번호가 꼬여서요."
거짓말은 짧아야 했다. 길어지면 설명이 붙고, 설명이 붙으면 구멍이 난다.
김미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같이 내려가요. 저도 편의점 들러야 해서."
강진호는 거절하려다 멈췄다. 첫날부터 선을 과하게 그으면 더 눈에 띈다.
"네."
엘리베이터는 점심시간 직장인들로 꽉 찼다. 누군가는 구내식당 메뉴를 욕했고, 누군가는 대출 금리를 이야기했다.
강진호는 그 평범한 소음 사이에서 아직 오지 않은 단어들을 떠올렸다.
서브프라임.
스마트폰.
모바일 게임.
비트메달.
이 사람들에게는 아직 계절도 오지 않은 말들. 하지만 강진호에게는 이미 피 냄새까지 배어 있는 길이었다.
1층 ATM 앞에는 줄이 길었다. 김미나는 편의점 쪽으로 가려다 다시 돌아봤다.
"진호 씨."
"네?"
"진짜 괜찮죠? 아까부터 얼굴이 좀 안 좋아요."
강진호는 잠시 답하지 못했다.
김미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금갑그룹이 어떤 괴물이 되는지, 이승준이 어떤 얼굴로 사람을 버리는지,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녀에게 걱정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가까이 두면 언젠가 그 걱정이 약점이 된다.
"군대에서 숫자 많이 보던 버릇이 남아서요."
"그게 얼굴 창백해지는 일이에요?"
"박 대리님이 준 파일이 생각보다 복잡하네요."
김미나는 한숨을 작게 쉬었다.
"첫날부터 그런 걸 던지는 게 이상한 거죠. 너무 혼자 다 하려고 하지 마요."
그 말이 묘하게 오래 남았다.
강진호는 고개만 끄덕이고 ATM 앞으로 섰다. 카드가 들어가고, 낡은 화면이 느리게 바뀌었다.
현금서비스 가능액 4,800,000원.
그는 전액을 눌렀다.
수수료 안내.
이자율 안내.
신용등급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는 경고.
화면은 마지막으로 정말 진행하겠느냐고 물었다.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확인창처럼 보였다.
강진호는 확인을 눌렀다.
지폐가 밀려 나왔다.
방금 기계에서 나온 종이뭉치일 뿐인데 손바닥에 이상한 열을 남겼다. 그는 돈을 봉투에 넣고 곧장 입금 메뉴를 눌렀다. 같은 은행 계좌로 넣으면 HTS 예수금 반영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이건 생활비가 아니다.
그는 봉투 끝을 접으며 생각했다.
전쟁 자금이다.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박태성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회의실 불만 켜져 있었다.
강진호는 먼저 회사 문서를 열었다.
금갑건설 단기운영자금 항목의 빈칸 옆에 작은 표시 하나.
부가세 환급 예정액 반영 시점 오류.
금갑물산 매출채권 회수 예정월 불일치.
이 정도면 박태성이 던진 숙제에는 답이 된다. 신입이 보기에는 충분하고, 진짜 아는 사람처럼 보이기에는 모자란 선.
그 다음에야 그는 HTS를 다시 열었다.
대묵바이오 2,185원.
아침보다 호가가 가벼워졌다. 매도벽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층이 얇았다. 누군가 위에서 물량을 던지는 척하면서 아래에서 조용히 받아먹고 있었다.
전형적인 매집의 끝.
강진호는 계산기를 두드렸다.
기존 보유 6,905주.
추가 입금 4,800,000원.
미수 가능 금액.
반대매매 예정일.
숫자가 맞물렸다. 목이 바짝 말랐다. 미수는 칼이었다. 잘 쓰면 길을 열지만, 한 번 삐끗하면 손목까지 가져간다.
그는 주문 수량을 한 번에 넣지 않았다.
2,185원 2,000주.
2,190원 3,000주.
2,200원 4,000주.
가격을 밀어 올리지 않게 쪼갰다. 그러나 장은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첫 주문이 일부 체결되는 순간 호가가 들썩였다.
2,190원 매도잔량이 얇아졌다.
2,200원 위에 있던 물량도 조금씩 사라졌다.
매수 쪽에는 낯선 숫자가 붙었다. 아직 공시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발표 전 마지막 정리를 하는 세력은 이미 냄새를 맡고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서 망설이면 비싸게 산다.
더 나쁘면 아예 못 산다.
강진호는 추가 주문을 넣었다.
2,205원.
2,210원.
체결음이 낮게 울렸다.
사무실에서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프린터가 돌아가고, 누군가 커피를 쏟았고, 전화벨이 울렸다. 평범한 회사의 소음 사이에서 그의 인생은 다시 한 번 방향을 틀었다.
미수 주문 확인창이 떴다.
결제일까지 미납 시 반대매매.
강진호의 손가락이 확인 버튼 위에서 잠깐 멈췄다.
전 생의 마지막 순간, 이승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살아. 그래야 아까운 거야.
"아까운 건 네가 아니야."
강진호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내 시간이었지."
그는 확인을 눌렀다.
체결.
체결.
체결.
계좌 평가금액이 순식간에 커졌다. 동시에 미수금 숫자도 붉게 박혔다.
그는 더 이상 가난한 신입사원의 계좌를 들고 있지 않았다.
대신 사흘 뒤 터질 수 있는 폭탄을 품에 넣었다.
"강진호 씨."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박태성이었다.
강진호는 HTS 창을 업무 문서 뒤로 숨겼다. 늦지는 않았다. 하지만 박태성의 눈은 모니터가 아니라 책상 위에 놓인 은행 봉투를 보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은행 다녀왔나?"
"네. 카드 문제 때문에요."
"카드 문제 치고는 오래 걸렸네."
박태성은 웃지 않았다.
강진호는 대답 대신 파일을 들어 올렸다.
"말씀하신 자료는 3번 표부터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벌써 봤다고?"
"부가세 환급 예정액 반영 시점이 다른 계열사와 다릅니다. 금갑물산 매출채권 회수 시점도 한 달 밀려 있고요. 단순 누락이면 회계팀에 확인하면 되고, 아니면 자금 대용표 기준일을 다시 맞춰야 합니다."
박태성의 시선이 변했다.
의심에서 관심으로.
그 변화는 칭찬보다 위험했다.
"누가 알려줬어?"
"파일에 숫자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신입이 첫날 그걸 봤다?"
"숫자가 안 맞으면 티가 납니다."
잠깐 말이 끊겼다.
사무실의 소음이 멀어졌다. 강진호는 업무 문서 뒤에 숨은 HTS 창을 떠올렸다.
대묵바이오.
추가 체결 완료.
미수금 발생.
돌아갈 길은 없다.
박태성은 파일을 천천히 받아 들었다.
"좋아. 그럼 오늘 야근하면서 이 표 전부 다시 맞춰."
"알겠습니다."
"그리고."
박태성이 몸을 낮췄다. 목소리도 같이 낮아졌다.
"회사 PC로 딴짓하는 거, 생각보다 잘 잡힌다. 첫날부터 이름 올리지 마."
강진호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명심하겠습니다."
박태성이 돌아서자마자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
증권사 문자였다.
[미수거래 체결 완료. 결제대금 미납 시 반대매매 대상]
강진호는 화면을 닫았다.
카드 현금서비스.
미수.
전 재산.
세 단어가 목줄처럼 그의 목을 감았다. 하지만 목줄 끝을 잡은 건 이제 금갑그룹이 아니었다.
강진호 자신이었다.
그는 다시 모니터를 보았다.
대묵바이오의 호가가 2,230원을 찍고 있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