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9화: 잃어버린 문자
탑의 검은 금속 도어 우측에 매립된 직사각형 제어 패널.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축적된 질척한 먼지와 마른 이끼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리자, 차가운 강화유리 표면 아래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기호들이 그 선명한 윤곽을 드러냈다.
기호들은 이 세계의 도서관에서 볼 수 있는 부드러운 필체나 복잡한 문양이 아니었다. 좌우 대칭이 극도로 기하학적이고 직선과 빗금이 조합된 날카로운 기호들. 이 세계의 마도학자들은 이것을 '신성 문자(Sacred Script)' 혹은 '신들이 남긴 봉인의 룬'이라 부르며,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신성한 힘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강이안의 검은 눈동자는 떨리는 눈꺼풀 뒤에서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영어잖아?"
그는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려는 탄성을 간신히 삼켰다.
그곳에 정교하게 각인된 기호들은 다름 아닌 로마자(Latin Alphabet)였다.
세월의 마모 탓에 획의 끝부분이 조금 닳아 있었고, 미래지향적인 스텐실 산세리프(Stencil Sans-serif) 서체로 각이 강하게 져 있어 현지인들에게는 기하학적 문양으로 보였을 터였다. 하지만 이안에게는 너무나도 지겹도록 익숙한 모성 지구의 문자였다.
[ A U T H E N T I C A T I O N R E Q U I R E D ]
그리고 그 주 문구 아래에는 더 작은 크기로 번호와 정체불명의 명칭들이 병기되어 있었다.
[ PROJECT A.R.C.A.D.I.A. / SUB-SYSTEM 04 ]
[ SYSTEM STATE: DEEP SLEEP MODE ]
이안의 사고 회로가 일시에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아르카디아 프로젝트? 서브 시스템 04? 게다가…… 딥 슬립 모드라고?'
그와 탐사대원들을 싣고 광막한 우주를 가로질러 온 마지막 인류 개척선의 이름이 바로 '아르카디아'였다.
지구에서 출발하기 전, 탐사선 건조 프로젝트의 정식 명칭 역시 '프로젝트 아르카디아'였다. 이것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 확률은 제로에 수렴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가장 깊고 위험한 유적인 '현자의 탑'과 머나먼 은하 너머에서 온 자신들 사이에 떼려야 뗄 수 없는 거대한 연속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어쩌면 이 신화적인 세계 전체가 인류의 지워진 과거 역사 위에 건설된 무대일지도 모른다는 소름 끼치는 가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안 씨? 왜 그러세요? 갑자기 안색이 굳어지셨는데…… 문자판에서 위해를 가하는 마력이라도 뿜어져 나온 건가요?"
리아가 지팡이를 가슴팍으로 끌어당기며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는 파트너에 대한 걱정과 유적에 대한 학술적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리아 씨. 이 문자를 읽거나 해독하려 시도했던 마법사가 학회에 단 한 명이라도 있었습니까?"
이안이 감정을 배제한 딱딱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뇨, 전혀 없었어요."
리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 문자들은 마도학회 내에서도 '신성 문자' 혹은 '창조주의 암호'로 분류되어 있어요. 수많은 대현자들과 해독가들이 이 패널에 마력을 흘려보내며 해석하려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죠. 마력이 통하지 않는 부도체인 데다가, 문자 자체의 논리가 이 세계의 고대 언어들과 완전히 다르거든요. 일부 성미 급한 마법사들은 이 문자를 억지로 읽으려다가 원인 불명의 극심한 두통이나 정신 착란을 일으키기도 했대요. 그래서 지금은 손대지 않는 금기 중 하나가 되었죠."
"당연히 마력으로는 반응하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주술이나 마법적인 의미를 담아 만든 글자가 아니니까요."
이안이 혼잣말처럼 차갑게 중얼거렸다.
"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이 글자들이 마법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요?"
리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안을 다그치며 물었다.
이안은 먼지가 쓸려나간 패널의 굵은 글자들을 차례대로 짚었다.
"이건 신들의 언어가 아닙니다. '인증 필요(Authentication Required)'라고 적혀 있는 겁니다. 시스템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겠다는 뜻이죠. 그리고 그 아래의 글귀는 '프로젝트 아르카디아, 보조 시스템 04'라는 시스템 명칭과, 현재 장치의 전력이 거의 꺼진 상태인 '딥 슬립 모드'임을 알려주는 경고문입니다."
"인... 증? 프로젝트... 아르카디아? 이안 씨, 지금 그걸 해독하신 건가요?!"
리아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치솟았다. 그녀는 마치 태어나서 처음으로 용을 목격한 마법학도처럼 경악을 금치 못하며 이안을 쳐다보았다.
"말도 안 돼요! 수천 년 동안 그 어떤 대현자도, 왕국의 천재 학자들도 단 한 자조차 읽어내지 못한 신성 문자를 어떻게 그렇게 물 흐르듯 읽으시는 거죠? 이안 씨는 정말로 예언에 나오는 신들의 후예이신가요?"
"후예 같은 게 아닙니다. 그냥 내 모향에서 쓰던 언어와 같은 종류일 뿐입니다."
이안은 요동치는 내면을 억누르며, 허리춤의 군용 장비 파우치에서 전술 단말기용 보조 전력 셀을 꺼냈다.
패널 아래에 표시된 전원 잔량 표시선(LED 배선)은 희미하게 불이 꺼진 상태였다. 오랜 시간 동안 내부 전력 공급이 전면 차단되었고, 오직 시스템 유지를 위한 극소량의 유도 전류만이 잔류하고 있는 상태가 분명했다.
"리아 씨. 이 탑의 기단 외벽에 흐르는 에너지…… 그러니까 마력을 이 패널로 유도할 수 있습니까? 단, 생 날것의 마법이 아니라 아주 정밀하게 제어된 약한 에너지의 흐름이어야 합니다."
"마력을 이 금속 패널로 유도하라고요? 말씀드렸잖아요. 이 탑의 외벽은 마력을 완전히 튕겨내요. 강제로 마법을 불어넣으려 하면 마력이 굴절되어 폭발이 일어날 뿐이에요."
리아가 손사래를 치며 물러섰다.
"그것은 마력이라는 고에너지 입자를 변환 없이 날것으로 주입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 장치는 일정한 전압과 전류를 필요로 해요. 정제되지 않은 에너지를 그대로 밀어 넣으면 회로 장치들이 전부 쇼트가 나서 타버립니다. 하지만 에너지의 주파수를 맞추고, 내 전술 단말기의 제어 필터를 거쳐 정류된 전기로 변환해 주입한다면 가능할 겁니다."
이안은 자신의 슈트 조절부에서 보조 전력 케이블을 꺼내 패널 하단의 보조 입출력 포트처럼 보이는 틈새에 단단히 밀어 넣었다. 그리고 손목 단말기의 변전 필터 설정을 가동했다.
"내가 이 단말기를 통해 에너지의 전압을 조율할 테니, 리아 씨는 그 지팡이의 끝을 내 단말기 상단의 전도성 단자에 접촉해 주세요. 그리고 가장 낮은 위력의 전격 계열 마법을 천천히 방출해 주시면 됩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리아는 침을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이 과정은 전설 속의 성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신비롭고 두려운 이계의 주술로 여겨졌을 터였다.
"……해볼게요. 대기 중의 번개 원소여, 작은 스파크가 되어 이곳에 깃들어라."
리아가 손을 미세하게 떨며 지팡이 끝을 이안의 단말기에 가져다 대었다.
지이잉-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푸른빛의 정전기 스파크가 발생했고, 이안의 단말기 내부 배터리 충전 게이지가 급격히 차올랐다.
"좋습니다. 전류 필터 작동. 전압 12V 가변 조정. 제어반 전원 선로로 바이패스(Bypass) 시작합니다."
이안의 지시에 따라 단말기를 거친 에너지가 적절한 전압의 전기 신호로 변환되어 케이블을 타고 제어반 내부로 매끄럽게 흡수되었다.
우웅-.
탑 지하 깊숙한 곳에서 잠들어 있던 거대한 발전 장치 혹은 전자기 코일이 수천 년의 잠에서 깨어나는 듯한 둔중한 진동음이 지표면을 울렸다.
그리고 마침내, 불투명하던 강화유리 액정판 아래에서 청백색의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이 찬란하게 빛을 뿜어내며 시스템 기동을 알렸다.
패널 위에 선명한 홀로그램 그래픽 인터페이스가 떠올랐다.
[ SYSTEM INITIATING…… 100% ]
[ SECURITY PROTOCOL HIGH ACTIVE ]
[ PLEASE PROVIDE BIOMETRIC DATA OR ACCESS CODE ]
"불이... 빛이 들어왔어요! 정말로 신성한 판넬이 깨어났어요!"
리아가 어린아이처럼 제자리에서 깡충 뛰며 기뻐했다. 그녀의 눈에는 이안이 구현한 전기 공학적 전력 공급 방식이 탑을 깨우는 고대의 기적 그 자체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안의 얼굴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액세스 코드나 생체 데이터를 요구하는군.'
수천 년 전 이 시설을 폐쇄한 자들이 남겨둔 완고한 보안 프로토콜이었다. 이안에게 액세스 코드가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유일한 가능성은 생체 인식뿐이었다.
이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가죽 장갑을 완전히 벗어 던졌다. 그리고 패널 중앙에 있는 유리판 모양의 생체 스캐너 위에 자신의 오른손 바닥을 천천히 얹었다.
과연 이 외계 행성에 홀로 남겨진 고대의 보안 장치가, 지구라는 모성에서 태어나 광활한 우주를 건너온 자신의 DNA 정보를 올바르게 식별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불일치로 판정될 경우, 불법 침입자로 간주하여 주변에 잠복해 있던 자동 방어 시스템이 가동되어 자신과 리아의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삐리릭- 하는 비프음과 함께 스캐너 내부에서 선명한 붉은색 레이저 라인이 뻗어 나와 이안의 손바닥 표면과 혈관 배치를 순식간에 훑어 내렸다.
[ SCANNING BIOMETRIC DATA…… ]
[ GENETIC SEQUENCING ACTIVE…… ]
[ ERROR: INSUFFICIENT ACCESS LEVEL FOR BASIC PROTOCOL ]
패널에 붉은색 경고등이 깜빡이며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안의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역시 등록되지 않은 외계의 침입자로 분류되는 것인가 생각한 찰나, 화면의 문자열이 빠르게 전환되었다.
[ WARNING: TEMPORARY OVERRIDE BY DIRECTIVE 01 ]
[ DIRECTIVE 01: EMERGENCE HUMAN SIGNATURE MATCHED ]
[ SYSTEM REGISTRATION: BASELINE HUMAN / OPERATOR TEMPORARY ACCESS GRANTED ]
[ ACCESS LEVEL 2 ACTIVE. WELCOME, OPERATOR. ]
치이이이익-.
탑 전체를 지탱하는 묵직한 에어 실린더 가스 밸브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틈새조차 보이지 않던 거대한 검은색 금속문의 중앙선에 미세한 균열이 발생했다. 그리고 양쪽의 무거운 강철 도어가 부드러운 자기부상 슬라이딩 방식으로 벽면 내부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문 너머에서 수천 년 동안 갇혀 있던 건조하고 차가운 인공 공기가 먼지 냄새를 실은 채 두 사람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문 안쪽의 모습은 숲속의 음산함이나 탑의 흑색 금속 외벽과는 전혀 판이한 풍경이었다.
어두컴컴한 횃불이나 흔들리는 마법의 조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천장과 벽면을 따라 일렬로 배치된 LED 패널들이 눈이 시릴 정도의 차가운 백색광을 뿜어내며 끝없이 길게 뻗은 로비 통로를 환히 비추고 있었다.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한 백색 합성수지 마감재로 지어진 통로.
리아는 활짝 열린 그 신화 속 입구 앞에 멍하니 선 채 손에 쥔 지팡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신들의 방이…… 우리 필멸자들 앞에 열렸어……."
그녀의 목소리는 신성한 존재에 대한 극도의 경외감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기술적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심으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이안은 펄스 소총의 개머리판을 어깨에 강하게 밀착시킨 채 어두운 통로 내부를 향해 첫 발을 조심스럽게 내딛었다.
이 행성의 거대한 비밀과 잊혀진 문명의 숨겨진 실마리가, 마침내 그들의 발밑에서부터 찬란한 백색광 아래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