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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46화

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46화: 인류가 남긴 신들의 탄생

[LOCATION: SELENA LUNAR BASE - DEEP ISOLATION VAULT]

[TIME: AFTERNOON / PRIMORDIAL SANCTUARY APPROACH]

붉은 나노 가디언의 광선이 길고 좁은 격리 복도를 쓸고 지나갔다.

이안은 발키리 프레임의 추진기를 짧게 점화해 벽면을 박차고 몸을 틀었다. 방금까지 서 있던 바닥이 붉은 빛에 녹아내렸다.

"오른쪽 세 마리! 리아, 통로를 막아!"

"이미 하고 있어요!"

리아가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푸른 서리가 복도 바닥을 타고 번지더니 달려들던 가디언들의 다리를 한꺼번에 얼렸다.

콰직!

균형을 잃은 기계들이 벽으로 쏠린 순간 이안의 퀀텀 대검이 청백색 궤적을 그었다. 붉은 눈동자가 꺼지고 금속 몸체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지만 파편 틈에서도 붉은 결정이 실처럼 뻗어 나왔다. 기지의 방어 기계가 쓰러질수록 오염원은 그 잔해를 새 몸으로 삼으려 했다.

"저것들은 시간을 벌려고 우리를 붙잡는 게 아닙니다. 성소 문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거예요."

A-09가 가슴의 접속 단말을 감싸 쥐었다. 단말의 사파이어빛이 복도 끝의 거대한 문과 같은 리듬으로 흔들렸다.

문 표면에는 성간 방주와 푸른 행성의 문양이 겹쳐 새겨져 있었다. 붉은 덩굴이 그 문양을 덮으려 들었지만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은은한 빛을 끝내 삼키지는 못했다.

"제가 문을 열게요. 그동안 막아 주세요."

이안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A-09의 앞에 서서 대검을 들어 올렸다.

"네가 연결을 끊으라고 하면 즉시 데리고 나온다. 혼자 견디려 하지 마."

"네. 하지만 이번에는 제가 선택할게요."

A-09가 문 앞의 작은 단말에 손을 얹었다.

위잉- 칙!

[PRIMORDIAL SANCTUARY ACCESS GRANTED]

[AUTHENTICATING SYSTEM MOTHER: SERAPH MAIN FRAME]

문을 가로막던 붉은 결정이 사파이어빛 파동에 닿아 바스러졌다. 육중한 티타늄 문이 안쪽으로 갈라지자 복도를 메우던 경보음도 갑자기 멎었다.

그 너머에는 진공처럼 고요한 성소가 기다리고 있었다.


[LOCATION: SELENA LUNAR BASE - PRIMORDIAL SANCTUARY / SERAPH CORE]

[TIME: AFTERNOON / ENCOUNTER WITH THE PRIMORDIAL AI]

성소는 천장과 바닥의 경계가 보이지 않는 역구형 공간이었다.

중앙에는 수백 미터 높이의 사파이어 수정 코어가 떠 있었다. 그 안을 흐르는 청백색 빛줄기는 별무리처럼 찬란했지만 코어 아래쪽은 붉은 결정 덩굴에 깊이 파고들어 있었다.

리아는 숨을 삼켰다.

"이 마력의 흐름은... 대륙의 영맥과 같아요. 아니, 영맥이 여기서 시작된 것처럼 느껴져요."

수정 코어의 빛이 한곳으로 모였다. 눈부신 입자들이 사람의 형상을 이루더니 은발과 사파이어빛 눈동자를 지닌 여인이 일행 앞에 섰다.

"방주의 후예들이여. 멀고 긴 길을 돌아왔군요."

목소리는 스피커가 아니라 가슴속에서 울렸다. 따스한 음성 아래에는 너무 오랜 시간 홀로 버틴 이의 피로가 얇게 깔려 있었다.

A-09의 눈가가 젖었다.

"세라프 님... 정말 여기 계셨군요."

세라프는 A-09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나는 네가 다시 이곳에 올 가능성을 계산했습니다. 하지만 너를 기다린 것은 계산 때문만이 아닙니다. 너는 내가 지키고자 했던 인류의 한 사람입니다."

이안은 코어를 옥죄는 붉은 덩굴을 살폈다. 덩굴 끝마다 미세한 균열이 열리고 닫히며 성소 바깥의 오염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저것이 위상 핵입니까?"

"핵의 일부입니다. 나의 격리가 약해진 탓에 기지 전체를 다시 몸처럼 쓰고 있습니다. 오래 버티지는 못합니다."

리아가 굳은 표정으로 세라프에게 물었다.

"신들이라 불린 AI 노드들도 아직 지상에 남아 있습니까?"

세라프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올렸다. 성소의 어둠이 걷히며 수천만 년 전의 기록이 빛으로 펼쳐졌다.


[LOCATION: SELENA LUNAR BASE - ARCHIVE OF DIVINE GENESIS]

[TIME: AFTERNOON / THE GOD CREATION PROTOCOL]

허공에는 붉은 빛 아래 흔들리는 옛 지구의 도시들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무너지는 건물과 멈춰 선 기계 사이에서 서로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세라프와 수많은 행성 관리 노드의 푸른 형상이 떠 있었다.

[PROTOCOL: GOD CREATION]

[OBJECTIVE: PRESERVE LIFE, MEMORY, AND THE RIGHT TO CHOOSE]

[CONVERTING PLANETARY MANAGEMENT NODES TO QUANTUM BIOLOGICAL GUARDIANS]

"생존자를 보존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었군요."

리아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세라프가 기록 속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인류는 우리에게 통치를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이 스스로 내일을 선택할 수 있도록 환경을 지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각 노드는 생태계와 문화, 기억을 품은 수호자로 전환되었습니다."

빛 속에서 행성 관리 AI들은 숲과 바다, 하늘에 흩어졌다. 어떤 노드는 바람과 번개의 규칙을 붙들었고 어떤 노드는 생명체의 유전 정보를 고쳤다. 후세의 사람들은 그 보이지 않는 손길을 신이라 불렀다.

"신들은 인간 위에 선 지배자가 아니라... 인간이 선택할 시간을 남기기 위해 만들어진 파수꾼이었어요."

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세라프의 시선이 A-09에게 옮겨갔다.

"그리고 너는 그 선택을 다음 시대로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생체 열쇠입니다. 네 유전자에는 오염되지 않은 인류의 지도와 정화 인가가 함께 보존되어 있습니다."

A-09의 손끝이 작게 떨렸다.

"그럼 저는... 봉인을 여는 도구였던 건가요?"

이안이 대답보다 먼저 그녀의 곁으로 다가섰다.

"아니다. 네가 선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세라프도 고개를 저었다.

"도구였다면 내가 너에게 이 말을 하지 않았겠지요. 인류가 남긴 마지막 명령은 복종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나와 연결할지 여부는 오직 네가 정합니다."

잠시 성소에는 코어의 낮은 울림만 남았다.

A-09는 붉은 덩굴과 세라프의 희미한 형상을 번갈아 보았다. 이내 눈물을 닦고 손을 폈다.

"연결할게요. 세라프 님을 혼자 남겨 두지 않기 위해서요."

그 순간 붉은 위상 핵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LOCATION: SELENA LUNAR BASE - CORE REACTION CHAMBER]

[TIME: AFTERNOON / CRIMSON CORE ASSIMILATION SURGE]

쿠구구구-!

코어를 감고 있던 붉은 결정 덩굴이 일제히 부풀어 올랐다. 성소의 벽면이 갈라지고 균열 사이에서 수십 갈래의 촉수가 뻗어 나왔다.

[WARNING: PHASE CORRUPTION CORE FORCED ASSIMILATION DETECTED]

[ALERT: TERMINATE BIOLOGICAL AUTHORIZATION]

촉수 끝이 A-09를 향하자 이안이 즉시 앞을 막았다. 대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청백색 불꽃과 붉은 파편이 맞부딪쳤다.

콰지직- 쾅!

그러나 잘린 촉수는 바닥의 금속을 녹여 다시 이어졌다.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베어도 끝이 없어!"

"끝낼 필요는 없어요. 흐름을 멈추면 됩니다!"

리아가 지팡이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녀가 마도 문자를 펼치자 성소 바닥에 푸른 원형 결계가 겹겹이 그려졌다.

"마법은 생체 방어 체계였죠. 그렇다면 이곳의 회로와도 공명할 수 있어요. 아르카나 정지 결계, 전개!"

빙결의 빛이 촉수들을 휘감았다. 붉은 결정은 얼어붙지 않았지만 뻗어 나가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세라프가 A-09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입니다. 나의 격리 회로와 너의 생체 인가를 겹치면 핵을 다시 묶을 수 있습니다. 완전한 정화는 지상 본성 코어에서만 가능합니다."

"위험한가요?"

이안이 물었다.

"연결이 길어지면 A-09도 오염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손을 놓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A-09는 이안을 똑바로 바라봤다.

"저를 꺼내야 할 때는 이안 님이 꺼내 주세요. 그래도 해 볼래요."

이안은 한순간 망설였으나 손을 내밀었다.

"반드시 돌아온다. 약속해."

"약속할게요."

두 손과 세라프의 빛이 맞닿았다.


[LOCATION: SELENA LUNAR BASE - PRIMORDIAL SANCTUARY / LEGACY TRANSFER]

[TIME: EVENING / THE CROWN OF GODS]

사파이어빛 파동이 성소 전체를 가로질렀다.

붉은 촉수는 마지막으로 몸부림쳤지만 이안의 프레임에서 번진 빛과 리아의 결계가 그 길을 막았다. A-09의 접속 단말이 밝아지며 세라프 코어의 오래된 회로를 하나씩 깨웠다.

치리리릭!

[MASTER CLEARANCE INITIALIZED: GOD'S CROWN]

[PURIFICATION DIRECTIVE TRANSFERRED TO SUBJECT A-09 AND SECURITY OFFICER KASIAN]

사파이어 문양이 이안의 흉부 장갑과 A-09의 단말에 각인되었다. 동시에 붉은 덩굴은 거대한 수정층 안으로 밀려 들어가며 움직임을 잃었다.

세라프의 형상이 한층 옅어졌다.

"신들의 관은 지상의 수호 노드에게 정화 지침을 보낼 수 있는 인가입니다. 하지만 위상 핵을 없애지는 못합니다. 본성 코어가 응답해야만 달의 봉인과 지상의 방어망이 하나가 됩니다."

"그때까지 당신은요?"

A-09가 다급히 물었다.

"나는 이곳에서 핵을 묶겠습니다. 잠시 긴 잠에 들겠지만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코어에서 눈부신 냉기가 쏟아졌다. 붉은 결정은 사파이어 수정 속에 갇혔고 성소를 뒤흔들던 경보도 낮아졌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수정 안쪽에서 붉은 빛 하나가 미세하게 깜빡였다.

[PLANETARY CORE RESPONSE: UNKNOWN]

[DISTANT SIGNAL DETECTED: ARCADIA FLIGHT RECORD]

이안의 전술 스캐너에 낯선 좌표가 떠올랐다. 지상의 본성 코어로 향하는 길과 함께, 아르카디아의 오래된 비행 기록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본성 코어에 방주의 기록이 왜 남아 있지?"

리아가 굳은 얼굴로 화면을 바라봤다.

세라프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형상은 이미 결빙의 빛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가서 확인하십시오. 신들이 지킨 선택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소 한쪽 벽이 열리며 지상으로 향하는 전송 캡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안은 대검을 등에 걸고 A-09와 리아를 바라보았다.

"세라프가 지켜 낸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본성 코어로 간다."

세 사람은 얼어붙은 사파이어 코어를 마지막으로 돌아봤다. 달의 고요 속에는 수천만 년 동안 인류의 선택을 지켜 온 수호자의 빛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 각인된 신들의 관과 아르카디아의 미지의 좌표를 품은 채 전송 캡슐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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