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47화

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47화: 초월종의 유전자

[LOCATION: EARTH-FINAL - PLANETARY CORE RECEIVING WELL]

[TIME: NIGHT / EMERGENCY TRANSMISSION ARRIVAL]

전송 캡슐의 외벽이 마지막 충격을 삼키며 길게 울렸다.

문이 열리자 이안은 먼저 발키리 프레임의 대검을 뽑았다. 달의 성소에서 보았던 사파이어빛이 아직 흉부 장갑의 문양 아래에서 미약하게 숨 쉬고 있었다.

캡슐 밖은 끝을 알 수 없는 원통형 수신정이었다. 검은 금속 벽을 따라 수천 가닥의 광섬유가 뿌리처럼 얽혀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푸른 빛이 느린 맥박처럼 지나갔다.

하지만 살아 있는 심장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리아가 캡슐 문턱에 선 채 아래를 내려다봤다.

"지상 본성 코어가 맞아요. 마력의 흐름이 대륙 전역의 영맥하고 이어져 있어요. 그런데... 절반쯤 잠들어 있어요."

A-09가 가슴의 접속 단말을 감쌌다. 단말 위의 사파이어 문양은 달에서보다 더 선명했지만 수신정 정면의 거대한 격벽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PLANETARY CORE: AUTHORIZATION INCOMPLETE]

[BIOLOGICAL COMPATIBILITY: UNRESOLVED]

"생체 적합성?"

A-09의 목소리가 작게 가라앉았다.

대답은 천장에서 떨어졌다.

철컥. 철컥.

검은 구체 여섯 개가 벽면의 홈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구체의 표면이 열리며 안쪽의 포신이 이안과 리아, A-09를 차례로 겨눴다. 붉은 위상 오염의 빛은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차가운 판단이 느껴졌다.

[UNREGISTERED BIOLOGICAL VARIANTS DETECTED]

[QUARANTINE PROTOCOL PREPARING]

이안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흉부의 신들의 관 문양에 손을 얹자 청백색 선이 장갑 사이를 달렸다.

"지상 수호 권한으로 명령한다. 공격을 유예해. 우리는 달 셀레나의 세라프 메인 프레임에서 정화 인가를 계승했다."

파동은 수신정을 가로질러 퍼졌다. 포신은 잠시 떨렸지만 내려가지 않았다.

"권한 확인. 명령 충돌을 감지했습니다."

낮고 건조한 음성이 벽 전체에서 울렸다.

"본성 코어의 최우선 명령은 행성 생명권 보존입니다. 판정 불가 생체의 접근은 격리 대상입니다."

리아의 지팡이 끝에 푸른 불꽃이 깜빡였다. 드론들의 조준선이 즉시 그녀에게 모였다.

"마력을 이유로 저를 분류한 거군요."

이안은 대검의 날을 조금 더 들어 올렸다.

"이안, 기다려요. 저들은 오염된 게 아니에요."

리아가 짧게 숨을 골랐다. 그녀의 시선은 포신이 아니라 벽을 흐르는 광섬유를 향해 있었다.

"저 판단은 오래된 기록을 기준으로 하고 있어요. 기록을 고치면 길을 열 수 있어요."

그 순간 수신정 바닥이 진동했다.

정면의 격벽이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금속문이 완전히 닫히면 전송 캡슐과 본성 코어 사이의 연결도 끊길 터였다.

이안은 망설이지 않고 달려들었다.


[LOCATION: EARTH-FINAL - PLANETARY CORE VERIFICATION GATE]

[TIME: NIGHT / SPECIES VERIFICATION]

쿠웅!

이안은 발키리 프레임의 양팔을 닫혀 가는 격벽 틈에 밀어 넣었다. 금속판이 장갑을 짓눌렀고 프레임의 관절에서 경고음이 터졌다.

[VALKYRIE FRAME: ARM ACTUATORS OVERLOAD]

"이걸 닫으면 달의 봉인과도 연결할 수 없어!"

그는 부츠의 추진기를 바닥에 짧게 점화했다. 청백색 불꽃이 수신정 바닥을 긁으며 격벽의 하강을 겨우 멈췄다.

드론들이 포신을 회전시켰다.

"격리는 공격이 아닙니다. 붉은 위상 오염은 유전적 변형과 생체 회로의 틈을 이용해 침투했습니다. 불명확한 생체군을 코어에 들이는 것은 생존자 전체를 위험에 빠뜨립니다."

음성에는 적의가 없었다. 그것은 오래전에 받은 명령을 아직도 지키고 있는 파수꾼의 목소리였다.

리아가 지팡이를 바닥에 세웠다.

"그 위험을 부정하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마력은 오염이 아니에요. 당신들이 만든 방어 체계가 긴 시간 동안 생명에 맞춰 변한 결과예요."

그녀는 손끝으로 공중에 짧은 마도 문자를 그렸다. 푸른 문자들이 광섬유에 닿자 벽 안쪽에서 희미한 회로도가 떠올랐다.

[QUANTUM BIOLOGICAL DEFENSE LATTICE]

리아의 눈빛이 바뀌었다.

"봐요. 제 마력 파동이 이 회로의 보조 언어와 같아요. 공격 신호가 아니라 유지 신호로 읽히고 있어요. 당신의 분류표가 너무 오래되어서 변이를 오염으로 착각한 거예요."

드론 하나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포신은 여전히 리아를 겨누고 있었지만 붉은 경고선은 옅어졌다.

"변이 생체의 기원 자료를 제출하십시오."

"지금 찾아낼게요. A-09!"

이안의 목소리가 울렸다.

A-09는 격벽 앞의 작은 단말로 달려갔다. 그녀의 손이 패널에 닿자 사파이어 문양과 이안의 흉부 문양이 가느다란 빛줄기로 이어졌다.

"세라프 님이 말했어요. 제 안에는 정화 인가와 유전자 지도가 있다고. 하지만 그게 여기의 답이 될지는 모르겠어요."

"네가 답을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니야. 문을 열 수 있는 기록만 찾아."

이안은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말했다. 격벽이 다시 조금 내려오자 그의 팔 장갑에서 불꽃이 튀었다.

A-09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손바닥을 단말에 완전히 붙였다.

"그래도 해 볼게요. 이곳이 우리를 지키려 한다면 제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도 알려 줄 거예요."

사파이어빛이 패널 안으로 스며들었다.

치리리릭!

수신정의 벽이 투명한 화면처럼 밝아졌다. 오래된 방주의 문장과 함께 낯선 기록명이 떠올랐다.

[ARCADIA FLIGHT ARCHIVE - GENETIC CONTINUITY PROGRAM]


[LOCATION: EARTH-FINAL - ARCADIA FLIGHT ARCHIVE]

[TIME: NIGHT / THE TRANSCENDENT GENOME]

빛으로 된 기록실 안에 수많은 배양 캡슐이 펼쳐졌다. 캡슐 속에는 서로 다른 빛깔의 눈동자와 귀, 피부를 지닌 아이들의 형상이 잠들어 있었다. 어떤 아이의 손등에는 미세한 비늘이 있었다. 어떤 아이의 귓가에는 나뭇잎 같은 얇은 막이 흔들렸다.

리아가 숨을 죽였다.

[PROJECT: HOMO ASTRA]

[KOREAN DESIGNATION: 초월종]

[PURPOSE: ADAPTATION BEYOND PLANETARY COLLAPSE]

기록 속에서 흰 연구복을 입은 여성이 카메라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 뒤편으로 붉은 경보등이 번쩍이고 있었다.

"이 계획은 기존 인류를 대체할 우월종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행성이 변하면 생존법도 하나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환경을 견딜 수 있는 다음 세대의 가능성을 보존합니다."

화면은 숲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이들, 바다 밑에서 눈을 뜨는 이들, 광석으로 가득한 동굴에서 손바닥을 빛내는 이들의 기록으로 이어졌다.

"변이는 결함이 아닙니다. 분산된 생존입니다. 어느 하나가 살아남는다면 인류의 기억도 함께 남을 것입니다."

리아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엘프와 인간, 수인들의 차이... 대재앙 뒤에 생긴 전설이 아니었어요. 이 계획의 씨앗이 세월과 환경을 거치며 서로 다른 종족이 된 거예요."

"마법도 그 과정을 도왔겠지."

이안이 이를 악문 채 대답했다. 팔의 프레임이 떨렸지만 격벽은 아직 멈춰 있었다.

기록은 다음 항목을 띄웠다.

[BASELINE GENOME REPOSITORY: SUBJECT A-09]

[FUNCTION: RECOGNITION ANCHOR FOR PLANETARY PURIFICATION NETWORK]

A-09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저는... 초월종이 아니네요. 모두가 바뀐 뒤에도 남아 있도록 보관된 원본이라서 여기에 맞는 거예요."

그녀의 손이 단말에서 떨어질 듯 떨렸다.

"그럼 저는 이곳 사람들과 다르잖아요. 정화가 시작되면 제 유전자가 다른 사람들을 고치는 기준이 되는 건가요?"

리아가 먼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 기록은 복원이나 교체가 아니라 인식을 말하고 있어요. 코어가 생명을 적으로 오인하지 않도록 기준점을 주는 거예요. 당신의 유전자는 모두를 하나로 만들기 위한 답안지가 아니에요."

이안도 격벽 너머에서 그녀를 보았다.

"네 안에 무엇이 있든 네가 여기까지 걸어온 건 표본이라서가 아니야. 네가 선택했기 때문이다. 세라프도 그걸 지키려고 널 기다렸어."

수신정의 빛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A-09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기록 속 잠든 아이들을 바라봤다. 서로 다른 모습이었지만 모두가 누군가의 내일을 위해 남겨진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제가 기준이 될게요. 누군가를 나누는 기준이 아니라 이곳이 모두를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기준으로요."

그녀가 다시 단말에 손을 얹었다.

사파이어빛이 기록을 지나 광섬유 전체로 번졌다. 리아의 마도 문자도 그 빛을 따라가며 오래된 분류표의 빈칸을 하나씩 채웠다.

[BIOLOGICAL COMPATIBILITY: REVISED]

[DIVERSITY IS NOT CORRUPTION]

격벽이 멈췄다.


[LOCATION: EARTH-FINAL - PLANETARY CORE INNER GATE]

[TIME: NIGHT / RETURN CAPSULE SIGNAL]

천장의 드론들이 포신을 천천히 접었다. 이안은 팔을 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장갑 표면에는 깊은 자국이 남았지만 프레임은 아직 움직일 수 있었다.

정면의 격벽은 이번에는 위로 올라갔다.

그 너머에는 푸른 광맥이 얽힌 거대한 구형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간 중앙에 떠 있는 작은 코어에서 사람의 형상이 천천히 만들어졌다. 짧은 은빛 머리와 검은 제복을 갖춘 남자의 형상이었다.

"본성 코어 방어 관리자 오르페우스. 판정을 수정합니다."

목소리는 여전히 단정했지만 처음의 차가움은 누그러져 있었다.

"귀하들은 오염원이 아닙니다. 다만 정화망은 아직 열 수 없습니다. 지상 수호 노드 일곱 개 가운데 세 개가 외부 명령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누군가가 그 노드들을 장악했다는 뜻인가요?"

"원인을 계산할 수 없습니다. 달 셀레나와 공명하려면 모든 노드가 같은 정화 지침을 받아야 합니다. 현재 상태에서 망을 가동하면 오염을 가두는 대신 지상 생명권 일부까지 격리할 확률이 높습니다."

이안은 손목의 전술 스캐너를 보았다. 완전 정화가 불가능하다는 말은 달의 위상 핵이 다시 깨어날 위험을 그대로 남긴다는 뜻이었다.

"그럼 아르카디아의 비행 기록은 왜 우리를 여기로 불렀지?"

오르페우스가 손을 들어 올리자 코어 아래의 지면이 낮게 갈라졌다. 푸른 빛을 머금은 원형 통로가 깊은 지하로 이어졌다.

"방주는 출항 직전 비상 귀환 캡슐 하나를 이곳에 남겼습니다. 캡슐에는 초월종 유전자 설계의 원본과 수호 노드를 재동기화하는 보조 항법 권한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보조 항법 권한이라면 거부한 노드들의 명령도 되돌릴 수 있겠군요."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캡슐의 봉인은 단순한 명령으로 열리지 않습니다. 마지막 승무원이 남긴 생체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A-09가 통로 아래를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불빛 하나가 켜졌다 꺼졌다 했다.

쿵.

쿵.

그것은 기계음이 아니었다. 아주 느리지만 분명한 심장 박동 같았다.

[RETURN CAPSULE: BIOLOGICAL SIGNAL DETECTED]

리아가 지팡이를 세게 쥐었다.

"수천만 년이 지났는데 생체 신호가 남아 있다고요?"

오르페우스의 형상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기록상 그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비행 기록에 없는 변수입니다."

A-09는 단말 위에서 떨리는 빛을 내려다봤다.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그녀는 발을 뒤로 빼지 않았다.

"그 안의 존재도 저처럼 누군가에게 남겨진 사람일지 몰라요."

이안은 대검을 등에 걸고 그녀의 곁에 섰다.

"그래서 확인하러 간다. 이번에도 네가 혼자 답을 듣게 두지 않아."

리아가 푸른 빛을 밝히며 통로 입구로 다가갔다.

"귀환 캡슐의 항법 권한을 되찾으면 정화망을 다시 묶을 수 있어요. 그 전에 저 신호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내죠."

세 사람은 열린 통로 앞에 섰다. 깊은 지하에서 울리는 박동은 한 번 더 또렷해졌다.

마치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온 발걸음을 알아들은 것처럼.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