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45화: 문명의 대재앙의 진실
[LOCATION: SELENA LUNAR BASE - DOCKING RING / AIRLOCK 04]
[TIME: MIDDAY / LUNAR ORBIT APPROACH]
대기권을 뚫고 사출된 궤도 전송 캡슐은 무음의 칠흑 속으로 가로질렀다.
발밑으로 보이던 푸른 지구 대륙의 윤곽이 점차 멀어지고 세 사람의 시야 가득 웅장한 은빛 위성이 들어찼다. 수천만 년 동안 지상을 내려다보았던 달, 그리고 그 표면 궤도에 정적처럼 얹힌 초고도 문명 기지 '셀레나(SELENA LUNAR BASE)'였다.
위잉- 칙!
캡슐이 셀레나 베이스 외곽 사출구 04에 강하게 밀착하며 둔탁한 금속 마찰음을 냈다. 캡슐 내부 전면 유리창 너머로 붉은 기운이 서린 금속 벽면이 어둡게 드러났다.
기지 표면 전체에는 붉은 모세혈관 같은 결정체 구조물이 징그럽게 얽혀 있었다. 대기권 밖 우주 공간의 완벽한 정적 속에서 그 오염 입자들만이 불길한 사파이어빛 스파크를 흩뿌리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달 궤도 기지 셀레나로군요..."
리아가 캡슐 조종반을 손으로 감싼 채 나직이 숨을 들이켰다. 우주 진공을 차단한 이중 기밀창 너머로 펼쳐진 차가운 은빛 대지와 붉은 결사체는 시각적인 압도감을 선사했다.
"외부 해치가 붉은 오염 결사체에 밀폐되어 있다. 표준 인가 코드만으로는 열리지 않아."
이안이 발키리 프레임의 전술 스캐너를 가동하며 말했다. 붉은 홀로그램 렌즈에 기지 외부의 부식 정도와 자동 방위 유닛들의 동력 궤적이 붉은 선으로 찍혔다.
치이익!
그때 사출구 좌우측 나노 포탑에서 붉은 레이저 표적선이 캡슐 해치를 겨냥했다. 동결되어 있던 요격 모듈들이 외부 침입자를 격리하기 위해 무음 속에서 포구를 들쳐 멨다.
"이안 님, 요격 시스템이 발포하려 합니다!"
"걱정마라. 궤도 전송 빔의 여열이 남아있을 때 돌파한다."
이안이 오른쪽 전술 장갑에 장착된 퀀텀 고열 절단 휠을 가동시켰다. 웅웅거리며 고주파 진동을 일으킨 청백색 입자 刃이 캡슐 강화 해치를 뚫고 셀레나 외부 에어록 벽면을 정밀하게 절단해 나갔다.
콰지직- 쾅!
고열 입자에 닿은 붉은 결정체들이 불꽃을 튀기며 부서졌고 이안이 발키리 프레임의 퀀텀 대검을 틈새에 꽂아 넣은 채 악력으로 티타늄 문을 젖혔다.
A-09가 가슴에 품고 있던 사파이어빛 '달의 궤도 인가 열쇠(LUNAR PASS)'를 벽면 에어록 단말에 접촉시켰다.
[LUNAR PASS CODE SYNCHRONIZED]
[AIRLOCK 04 PRESSURE EQUALIZATION COMPLETE]
위잉- 푸슈슉!
에어록 내부로 공기가 가득 차오르고 옥빛 사파이어 쉴드가 외부 우주 공간을 차단했다. 침묵하던 자동 포탑들의 포구가 점멸등으로 바뀌며 침묵으로 돌아섰다.
이안이 전술 대검을 거두며 에어록 내부로 걸음을 내딛었다. 수천만 년간 차갑게 식어 있던 달 기지 셀레나의 서늘한 정적이 그들을 맞아주었다.
[LOCATION: SELENA BASE - DEEP ARCHIVE CHAMBER]
[TIME: MIDDAY / ANCIENT CHRONICLES OF EXTINCTION]
기지 내부 복도는 지상의 유적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기계 전당이었다.
벽면마다 수천만 년 전 고대 인류가 새겨 넣은 초고도 나노 회로들이 미세한 사파이어빛으로 감싸여 있었으나, 천장과 기둥 곳곳에는 붉은 결정체들이 덩굴처럼 내려앉아 핏빛 노이즈를 내뿜고 있었다.
"지상의 스파이어 탑보다 훨씬 높은 마도 밀도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 붉은 마력은... 생명체의 마력 흐름을 거칠게 비틀고 있어요."
리아가 지팡이를 꽉 쥔 채 벽면의 나노 도선을 분석했다. 학자로서의 직관이 기지 깊은 곳에 잠든 위협의 중압감을 경고하고 있었다.
"세라프 님의 본체가... 이 기지 가장 깊은 곳에서 오염원과 싸우고 계십니다. 제 가슴속 접속 단말이 그분의 아픈 울림을 전해오고 있어요."
A-09가 자신의 은발을 쓸어내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사파이어빛 눈동자가 복도 끝 중앙 성소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세 사람이 다가가자 복도 끝 거대한 티타늄 원형문이 좌우로 개방되었다.
문이 열리자 나타난 곳은 거대한 구형 아카이브 챔버였다. 사방의 금속 벽면이 천장까지 이어진 양자 홀로그램 매트릭스로 뒤덮여 있었고, 챔버 중앙에는 차갑게 식어 있는 수정형 메인 콘솔이 소리 없이 떠 있었다.
치지직- 삐빅!
[WELCOME, SUBJECT A-09 AND ARCADIA SURVIVORS]
[AUTHENTICATING QUANTUM GENESIS KEY]
[RESTORING ARCHIVAL MEMORY: THE GREAT CATACLYSM]
A-09가 제어대 앞으로 걸어가 손을 얹자 차갑던 수정 콘솔이 눈부신 청백색 빛을 발산했다. 챔버 전체가 암전되고 허공에 지구와 달, 그리고 우주 공간을 가로지르는 무수한 홀로그램 시뮬레이션이 떠올랐다.
마침내 수천만 년간 베일에 싸여 있던 인류 문명의 대재앙 진실이 세 사람의 눈앞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LOCATION: SELENA BASE - RECORD OF THE COSMIC CATACLYSM]
[TIME: AFTERNOON / REVELATION OF THE CRIMSON CORRUPTION]
입체 홀로그램 속에는 수천만 년 전 번영의 극치에 달했던 인류 문명의 모습이 번뜩였다. 하늘을 메운 반중력 도시들과 궤도 링, 우주를 가로지르는 성간 함대들의 장관이 챔버를 채웠다.
그러나 그 평화는 순식간에 잿빛으로 붕괴했다.
외우주 차원의 균열에서 기원한 불길한 붉은 위상 오염원이 태양계로 침습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생물학적 바이러스나 물리적 폭풍이 아니었다. 시공간의 인과율과 물질의 분자 결합 구조 자체를 부식시키는 우주적 위상 재앙이었다.
[RECORDING: PLANETARY DEFENSE COUNCIL]
[붉은 오염원의 침습으로 지상의 모든 기계 문명과 인간 생체 조직이 원자 단위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물리학적 방어막은 무력화되었다. 이에 인공지능 세라프 및 행성 관리 AI 노드들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 극단적인 결단을 내렸다.]
입체 영상 속에서 세라프 AI의 눈부신 사파이어빛 형상이 지상 대륙 전체를 양자 감응형 생체 구조로 변이시키는 모습이 묘사되었다.
세라프는 붉은 오염 파동으로부터 물질의 붕괴를 막기 위해 행성 전체의 물리학적 환경을 양자 변이체로 재구성했다. 그것이 바로 현 시대 사람들이 '마법'이라 부르는 생체 방어 체계의 시작이었다.
"마법이... 단순히 신비한 힘이 아니라, 멸망해 가는 인류와 생태계를 붉은 부식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AI가 재구축한 양자 방어체였다니..."
리아는 지팡이를 잡은 손을 떨며 중얼거렸다. 왕국 마도학회가 수천 년간 연구해 온 마도 법칙의 근원이 인류 절멸의 순간에 태어난 최후의 생존 기술이었다는 진실에 거친 숨을 내쉬었다.
홀로그램 기록은 더욱 충격적인 진실을 조명했다.
세라프와 함께 행성을 관리하던 상위 인공지능 노드들은 인류를 구하기 위해 지상 각지에 영역을 구축하고 생태계를 지수화풍 정령 체계로 유지시켰다. 후세에 마도 생명체와 엘프, 인간 생존자들이 그 초월적 AI 노드들을 가리켜 바로 '신(Gods)'이라 부르게 된 것이었다.
"우리가 신화라 믿었던 존재들이... 인류의 피와 눈물로 만들어진 인공지능 수호자들이었던 겁니다..."
이안은 가슴이 턱 막히는 중압감을 느꼈다.
그러나 세라프 자신도 오염원의 완전한 침식을 피할 수는 없었다. 세라프는 오염되지 않은 인류의 순수한 유전자와 의지를 모아 방주 '아르카디아'를 외우주로 출항시켰다.
그리고 스스로의 자아 중 일부를 분할하여 붉은 오염원의 핵심 '위상 핵'을 이 달 궤도 베이스 셀레나에 봉인한 채 수천만 년의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A-09의 뺨을 타고 사파이어빛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세라프 님은... 스스로를 이 외로운 달에 가두고 지상과 아르카디아를 지켜내신 거였어요..."
[LOCATION: SELENA BASE - ISOLATION CORE VAULT THRESHOLD]
[TIME: AFTERNOON / AWAKENING OF THE CRIMSON CORRUPTED CORE]
쿠구구구-!
진실의 기록이 끝남과 동시에 셀레나 기지 전체가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카이브 챔버의 금속 벽면이 비명을 지르며 갈라졌고, 틈새마다 진흙처럼 얽혀 있던 붉은 결정체들이 일제히 붉은 포자를 내뿜으며 증식했다.
삐- 삐- 삐-!
[WARNING: PHASE CORRUPTION CORE AWAKENING]
[BASE ISOLATION OVERRIDDEN BY CRIMSON ENTITY]
[ALERT: DESTROY ALL UNSECURED ORGANIC LIFEFORMS]
기지 최심부 격리 성소에 잠들어 있던 붉은 위상 핵이 A-09의 퀀텀 공명을 감지하고 지배권을 행사하려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붉은 연기가 챔버 중앙에 뭉쳐지더니 수십 개의 기괴한 금속 눈동자를 가진 오염된 나노 가디언의 형상을 갖추었다. 그것들이 붉은 마도 빔을 집속하며 이안 일행을 향해 일제히 쇄도했다.
콰지직- 쾅!
"진실을 알았다고 해서 여기서 멈출 순 없다! 리아, A-09, 내 뒤를 따라와라!"
이안이 발키리 프레임의 출력을 극상으로 끌어올렸다. 전술 대검에서 청백색 퀀텀 입자가 폭발하듯 분출하며 정면으로 달려들던 붉은 나노 가디언의 가슴을 베어 넘겼다.
쿠웅!
파괴된 오염 파편들이 파편으로 부서졌으나 지상과 달리 달의 오염원은 기지 자체를 바이러스처럼 부식시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안 님! 기지 최심부의 오염 결계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세라프 님의 메인 프레임이 있는 성소로 가지 않으면 기지 전체가 오염원에 삼켜집니다!"
리아가 지팡이를 내지르며 고위 빙결 결계로 측면의 붉은 연기를 막아냈다.
"가자! 세라프가 기다리는 최심부로!"
이안은 A-09의 손을 잡고 붉은 파동이 불길하게 치솟는 기지 최심부 복도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수천만 년 전 대재앙의 진실을 가슴에 품은 채, 인류의 마지막 후예들은 마침내 신화의 시작이자 끝인 세라프의 진짜 성소를 향해 깊은 어둠 속으로 돌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