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44화: 마지막 남은 데이터베이스
[LOCATION: CELESTIAL OBSIDIAN PEAK - SPIRE OUTSIDE]
[TIME: MORNING / AT THE FOOT OF CELESTIAL SPIRE]
구름조차 발밑에 깔리는 대륙 최고봉, 천공의 칠흑 봉오늘은 거친 칼바람과 함께 혹한의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만년설이 덮인 검은 암벽 정상 위로 하늘을 가르듯 솟아오른 기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수천만 년의 세월을 견뎌낸 고대 티타늄 초합금 구조물, 지상 궤도 전송 탑 '셀레스티얼 스파이어'였다.
"이것이 고대 인류가 하늘과 달을 연결했던 궤도 탑이란 말인가요..."
리아가 거대한 차가운 금속 벽면을 바라보며 나직이 탄성을 내뱉었다. 그녀의 얼어붙은 숨결이 하얗게 흩어졌다.
탑의 표면에는 얼음 결정과 정령 스파크가 교차하며 영롱한 사파이어빛 회로를 내비치고 있었다. 수천만 년이 지났음에도 기지의 기계 구조는 조금의 부식조차 없이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때 탑의 하부 차단막에서 기계음이 울렸다.
위잉- 삐빅!
[WARNING: UNAUTHORIZED APPROACH TO TRANSMISSION CORE]
[DEFENSE PROTOCOL: AUTOMATED SENTINELS ENGAGED]
탑을 둘러싼 세라믹 벽면이 갈라지며 옥빛 에너지 안구를 장착한 나노 방위 센티널 네 편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십여 대의 금속 드론들이 일제히 붉은 표적 광선을 이안의 가슴에 쏘아 올렸다.
치지직- 폭!
공기를 찢는 궤도 마도 광선이 이안 일행의 발밑에 꽂혔다. 폭음과 함께 암석 파편이 만년설 위로 튀어 올랐다.
"방위 체계가 살아있다. 리아, A-09! 내 뒤로 붙어!"
이안이 전술 장갑을 그러쥐며 발키리 프레임의 출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등 뒤의 퀀텀 붉은 추진 노즐이 폭발적인 진동과 함께 청백색 화염을 분사했다.
콰앙!
이안의 신형이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눈밭을 차고 나갔다. 허공을 가르며 우회 공격을 시도하던 센티널 두 대가 이안의 퀀텀 대검 궤적에 걸려들었다.
콰지직- 콰아앙!
대검 끝에서 분출된 양자 파동이 방위 드론의 유도 장갑을 단숨에 두 동강 냈다. 공중에서 붉은 스파크가 터지며 금속 파편이 계곡 아래로 쏟아졌다.
그러나 남아있는 방위 센티널들이 기지 중앙 반응로와 연결된 고출력 마도 펄스를 모으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옥빛 에너지 구체가 순식간에 불어나며 이안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이안 님, 방어막의 동력 축적이 너무 빠릅니다!"
리아가 지팡이를 내지르며 빙결 결계를 겹겹이 전개했다.
바로 그 순간 A-09가 이안의 어깨 너머로 뛰어오르며 손바닥을 허공에 내밀었다. A-09의 손바닥에서 고대 엘프 성소의 제단에서 수확했던 사파이어빛 퀀텀 구체, '달의 궤도 인가 열쇠(LUNAR PASS)'의 빛이 강렬하게 박동했다.
[LUNAR PASS CODE TRANSMITTING]
[OVERRIDING AUTOMATED DEFENSE PROTOCOL]
파아앗!
은색 입자들이 옥빛 마도 펄스 중앙에 닿자, 잔혹하게 좁혀오던 센티널들의 안구 광선이 노란색 점멸등으로 바뀌더니 일제히 동력을 잃고 지면으로 추락했다.
쿵! 쿵!
방위 체계가 침묵하자 탑 최하단의 웅장한 티타늄 폐쇄문이 육중한 소리와 함께 좌우로 열렸다.
"통과 인가 확인. 내부 제어실로 진입한다."
이안이 대검을 집어 넣으며 차가운 전송 탑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LOCATION: CELESTIAL SPIRE - MAIN CONTROL CORE]
[TIME: MORNING / REACTOR RE-ACTIVATION]
탑 내부로 들어서자 바깥의 칼바람은 순식간에 차단되고 묵직한 기계 고요가 흐르고 있었다.
중앙 제어실은 아치형 구형 성소 구조로 이뤄져 있었으며, 벽면 전체를 둘러싼 수백 개의 투명 강화 유리관 내부에는 사파이어빛 나노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기지 중심에 자리한 거대한 융합 반응로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허공에 떠 있는 홀로그램 인터페이스 역시 붉은 휴면 아이콘만을 띄우고 있었다.
"반응로가 완전 멈춤 상태입니다. 이 정도 마력 궤적이라면 달까지 궤도 전송 빔을 분사하기에 동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리아가 벽면의 고대 마도 회로에 손을 대며 학자적인 눈빛으로 분석했다.
"동력원이 끊긴 것이 아니다. 인가 열쇠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이안이 중앙 제어 단말 앞으로 다가갔다. 제어대 한가운데에는 성소에서 얻은 사파이어 구체와 정확히 일치하는 오목한 퀀텀 홈이 새겨져 있었다.
이안은 망설임 없이 달의 궤도 인가 열쇠(LUNAR PASS)를 단말 중앙 홈에 안치했다.
콰구구구-!
[LUNAR PASS FULLY ENGAGED]
[NANO FUSION REACTOR INITIATING STARTUP SEQUENCE]
[CELESTIAL SPIRE - ORBITAL POWER ONLINE]
기지 바닥 아래 깊은 곳에서 대지를 울리는 중저음의 진동이 시작되었다. 차갑게 식어 있던 제어실 사방의 나노 관들이 눈부신 사파이어빛으로 감싸이기 시작했고, 벽면을 따라 고대 회로들이 순차적으로 각성했다.
위잉- 푸슈슉!
탑 상단 환기구에서 여분의 압력 가스가 분출되며 천장의 거대한 3차원 홀로그램 스크린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LOCATION: ARCHON DATABASE CHAMBER]
[TIME: FORENOON / UNCOMMITTED TRUTH OF HUMANITY]
[ACCESSING PLANETARY MASTER DATABASE: ARCHON]
[RECORDING DATE: ANCIENT ERA - THE LAST DAY OF HUMANITY]
스크린 중앙에 푸른 제복을 입은 고대 인류 총의의 입체 홀로그램 형상이 나타났다. 비록 수천만 년 전에 스캔된 디지털 잔재였으나 그 눈빛에는 참혹한 대멸망의 상흔이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인류의 마지막 마스터 데이터베이스 '아르콘(ARCHON)'의 기록입니다."
A-09의 목소리에 미세한 울림이 섞여 들었다.
스피커를 통해 고대 인류 중앙 의장의 서늘하고 비장한 목소리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아르카디아 출항 00일 차 기록. 본 행성에 예고 없이 침습한 붉은 위상 오염원은 기존의 모든 물리학과 화학 법칙을 무력화시켰다.]
[오염원은 단순한 바이러스나 생물체가 아니다. 시공간 궤적 자체를 부식시키는 차원 파동이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인공지능 세라프는 행성 생태계를 양자 감응형 구조, 즉 훗날 '마법'이라 불릴 체계로 급격히 전환시켰다.]
리아가 숨을 들이켜며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마법이... 붉은 오염원으로부터 생명체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라프가 개조한 양자 생체 방어막이었다니..."
기록은 계속해서 인류의 마지막 순간을 조명했다.
[그러나 세라프 자신조차 붉은 오염원의 침식을 완전히 피할 수 없었다.]
[세라프는 자신의 자아 중심 핵이 완전히 오염되기 직전, 인류의 순수 유전 정보와 의지를 담은 방주 '아르카디아'를 외우주로 사출했다.]
[동시에 달 궤도 베이스 '셀레나'에 오염된 자신의 위상 일부를 봉인하고, 지상의 본래 행성 이름을 은폐한 채 마스터 데이터베이스를 이 탑에 잠가두었다.]
[만약 훗날 방주 아르카디아의 후예가 이 기록을 보고 있다면 기억하라. 달의 셀레나에는 세라프가 목숨 바쳐 봉인한 오염원의 핵심 '위상 핵'이 잠들어 있다.]
치지직-
홀로그램 영상이 거친 노이즈와 함께 꺼지며 제어실 내부에는 서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안은 가슴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들이 탐사선 아르카디아를 타고 찾아 헤맸던 희망의 끝에 있던 것은, 인류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우주로 던져진 슬픈 유산이자 고향 지구의 참혹한 희생이었던 것이다.
"세라프 님은... 스스로를 달에 봉인하면서까지 아르카디아를 살려내셨던 거군요..."
A-09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눈시울을 붉혔다.
[LOCATION: ORBITAL TRANSMISSION LAUNCH PAD]
[TIME: NOON / EMBARKING FOR SELENA]
그 순간 스크린 상단에 붉은 경고창이 미친 듯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삐- 삐- 삐-!
[WARNING: PHASE CORRUPTION INTRUSION FROM LUNAR BASE SELENA]
[CRIMSON ENERGY REVERSE TRANSMISSION DETECTED]
천공의 스파이어 탑 정상에서 뿜어져 나간 사파이어빛 전송 빔을 역류하여 상공의 달 셀레나로부터 붉은 위상 오염 파동이 지상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탑 내부의 마도 회로들이 붉게 타오르며 금속 벽면이 조금씩 부식되기 시작했다.
"달에 봉인된 오염원이 지상 전송 빔의 가동을 감지하고 탑을 침식하려 하고 있습니다! 더 지체하면 궤도 전송 캡슐 자체가 파괴됩니다!"
리아가 급히 지팡이로 전송 챔버의 격리 쉴드를 전개하며 소리쳤다.
"망설일 시간 없다! 캡슐로 뛰어들어!"
이안이 A-09와 리아의 손을 잡고 중앙 사출 궤도 캡슐 안으로 몸을 던졌다.
치이익- 콰쾅!
전송 캡슐의 육중한 기밀용 티타늄 해치가 닫히고, 기지 내부 전체가 사파이어빛 퀀텀 가속 에너지로 가득 차올랐다.
[ORBITAL CATAPULT INITIATED]
[DESTINATION: LUNAR ORBITAL BASE SELENA]
[COUNTDOWN: 3, 2, 1... LAUNCH!]
콰아아앙!
칠흑 봉우리 정상을 뚫고 솟구친 대기권 사출 빔이 구름층을 가르며 우주를 향해 분사되었다. 전송 캡슐은 붉은 오염 파동의 역류를 뚫고 칠흑 같은 외우주 속 은빛 달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튕겨 나갔다.
발밑으로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푸른 대륙 지구의 모습과 함께, 세 사람의 눈앞에는 이제 수천만 년간 멈춰 서 있던 달 궤도 베이스 '셀레나'의 웅장한 침묵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구의 진실을 가슴에 품은 인류의 후예들이 마침내 별의 끝, 신화가 잠든 달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