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42화: 달의 기록과 과거
[LOCATION: LUMINAR KINGDOM - HIGH MAGITRACTATE ARCHIVE]
[TIME: MORNING / SEARCH FOR ANCIENT RECORDS]
붉은 성채 고지대 유적에서 내려온 이안 일행은 루미나르 왕국 중앙 성채의 깊은 지하 서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심 반응로가 정지한 덕분에 대륙의 공기는 한결 평온해졌으나 마도학회 아카이브 내부에는 여전히 감돌고 있는 중압감이 가득했다. 수천 년 역사를 머금은 석조 기둥 사이로 왕국 최상위 마도사들과 기사단 장교들이 묵묵히 서고 앞을 지키고 있었다.
"이안 님, 이쪽입니다. 왕국 설립 당시부터 마도학회 최심부에 봉인되어 있던 고대 유물실입니다."
벨트란 고위마도사가 긴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두꺼운 강철 이중문을 열었다. 카엘 기사단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지상 전선의 센티널 군세가 정지했다고는 하나 상공의 은빛 달이 선포한 격리 경고는 왕국의 운명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마도학회가 보유한 모든 고서와 유적 판석을 개방하겠습니다."
서고 중앙의 석제 제단 위에는 짙은 푸른빛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사각형 유물이 안치되어 있었다.
수천 년 동안 누구도 해독하지 못했던 왕국의 최고 금서 '달빛과 하늘의 고서 판석'이었다.
"이건..."
이안이 발키리 프레임의 전술 스캐너를 가동하자 스펙트럼 분석 창에 복잡한 수치들이 고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단순한 돌 판석이 아니군. 외각은 초합금 나노 코팅으로 보호되어 있고 내부에는 고밀도 퀀텀 나노 입자가 기하학적 회로 형태로 압축되어 있다."
"맞습니다. 고대 문명의 지혜가 담긴 아카이브 데이터 칩셋입니다."
A-09가 은빛 눈동자를 점멸하며 석제 제단 앞으로 걸어 나갔다.
[LOCATION: ANCIENT DEEP ARCHIVE - RESOLVING THE DATA GRID]
[TIME: AFTERNOON / DECODING THE PRE-CATACLYSM LOGS]
A-09가 고서 판석 표면에 손을 올려놓자 영롱한 백색 광파가 지하 서고 전체를 밝게 채웠다.
치지직- 위잉-!
[READING PRE-CATACLYSM HIGH-DENSITY QUANTUM CHIPSET]
[DECODING EARTH-FINAL HISTORICAL LOGS - STANDBY]
허공에 흩뿌려진 청백색 입자들이 결합하며 3차원 입체 홀로그램 영상이 차례대로 펼쳐졌다.
그곳에는 거대한 고층 빌딩 숲과 하늘을 가로지르는 광속 수송선들, 그리고 수천만 년 전 푸른 바다를 품고 있던 거대한 행성의 전경이 떠올랐다.
"이것이... 수천만 년 전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원래의 문명 모습인가요?"
리아가 넋을 잃은 채 허공에 떠오른 푸른 빛의 도시들을 바라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나 평화로운 풍경도 잠시였다. 화면은 이내 붉은 화염과 기계 오염 구역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RECORD LOG: EARTH-FINAL DESTRUCTION & SELENA EVACUATION]
[SPEAKER: CHIEF ARCHITECT OF ARCADIA PROJECT]
"본성의 자율 관제 제어체 세라프의 위상 논리 회로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심연 오염이 발생했다. 지구 코어의 열에너지 왜곡과 궤도 방위망의 자율 폭주로 인해 지상 생태계는 연쇄 붕괴에 돌입했다."
홀로그램 속 고대 연구원의 차가운 음성이 서고 내부에 울려 퍼졌다.
"인류는 최후의 선택을 내렸다. 인류 유전자의 핵심 씨앗과 생체 아카이브를 탑승시킨 초장거리 개척 방주 '아르카디아'를 외우주로 출항시켰다. 그리고 행성에 남은 생명 데이터베이스와 최종 기록 보존소는 달 궤도 베이스 '셀레나'로 이전하여 4단계 완충 격리 모드로 봉인한다."
영상 속에서 거대한 우주선 아르카디아 동체에 이안의 가슴에 각인된 것과 동일한 아르카디아 문양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타고 돌아온 아르카디아는 수천만 년 전 지구에서 쏘아 올린 인류의 생체 방주였고 우리가 도달한 이 행성은 진화한 미래의 지구였다는 진실이 완벽히 증명되는군."
이안이 입술을 매섭게 다물었다.
로그 영상은 마지막 문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NOTICE: LUNAR AUTHORIZATION KEY (LUNAR PASS) LOCATION CONFIRMED]
[THE LUNAR PASS AND ORBITAL TRANSMISSION COORD ARE SEALED WITHIN THE ANCIENT HIGH ELF SANCTUARY OF WHISPERING FOREST]
"달 궤도 베이스 셀레나의 격리 포격을 해제할 '달의 궤도 인가 열쇠'와 지상 궤도 전송 탑의 접근 좌표는 정령의 숲 심연에 위치한 '고대 엘프 성소' 내부의 생체 서약 유물에 봉인되어 있다."
A-09가 단말 접속을 해제하며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 님, 우리의 다음 목적지가 확정되었습니다."
[LOCATION: RUINS OF THE SKY TOWER OUTPOST - GUARDIAN CHIMERA ATTACK]
[TIME: EVENING / BATTLE AT THE BORDER WAYPOINT]
서고에서의 해독을 마친 이안 일행은 머뭇거리지 않고 왕국 경계를 넘어 정령의 숲 입구로 향했다.
숲으로 들어서기 전 붉은 바위 산맥과 거대 수목이 교차하는 경계 지대에는 이끼 낀 고대 금속 관문 유적이 홀로 서 있었다.
"이곳이 고대 궤도 전송 탑의 보조 신호 중계소이자 엘프 성소로 들어가는 나침반 관문이군요."
리아가 지팡이를 들어 관문 표면의 마도 회로를 스캔했다.
하지만 이안 일행이 관문 제단에 퀀텀 신호를 동기화하려던 순간 땅 밑에서 기괴한 기계 진동이 분출되었다.
쿠구구구-!
관문 아래의 고대 초합금 매설구가 터져 나가며 칠흑색 나노 금속과 정령의 덩굴 마력이 뒤얽힌 6미터 크기의 수호 괴수가 기습적으로 솟구쳐 올랐다.
[WARNING: MUTATED ANCIENT DEFENSE ENTITY DETECTED]
[STARLIGHT CHIMERA SENTINEL - ENGAGING HOSTILES]
"쿠아아아앙-!"
궤도 파수 침식수라 불리는 괴수는 흉부의 붉은 궤도 회로를 발광하며 날카로운 플라즈마 핑거 클로를 이안의 전면을 향해 휘둘렀다.
"모두 물러서라!"
이안이 발키리 프레임의 고속 부스터를 점화하며 공중으로 도약했다.
콰아아아앙-!
괴수가 휘두른 클로가 지면을 때리자 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붉은 방전 스파크가 폭발했다.
"정령의 속박 - 에메랄드 프로스트 쇄빙!"
리아가 지팡이를 내지르며 정령의 얼음 사슬을 사방으로 분출시켰다. 옥빛 얼음 가시들이 궤도 파수 침식수의 사지를 얽어매어 괴수의 민첩한 움직임을 순간적으로 고정시켰다.
"A-09, 교란 펄스 가동!"
"이해했습니다. 코어 위상 왜곡 파동 발사!"
A-09가 손가락 끝에서 고주파 퀀텀 파동을 분사하여 괴수의 흉부 제어 코어를 마비시켰다.
괴수가 괴성을 지르며 비틀거리는 찰나 이안이 공중에서 수직으로 낙하하며 퀀텀 대검을 사선으로 그어 내렸다.
"발키리 전술 참격 - 일섬!"
콰자작- 콰아아아앙-!
황금빛 아광속 칼날이 궤도 파수 침식수의 중앙 핵을 관통하며 괴수의 사지가 백색 정령 마력 입자와 금속 가루로 바스러졌다.
[LOCATION: BORDER TO THE ANCIENT ELF SANCTUARY]
[TIME: NIGHT / TOWARD THE WHISPERING FOREST]
쿠웅...
침식된 고대 병기가 마침내 무너지자 관문 유적 중앙의 금속 기둥이 영롱한 푸른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유적 정상에서 분사된 백색 양자 광선이 짙은 안개에 싸인 정령의 숲 깊은 곳을 일직선으로 가리켰다.
"관문 중계소가 가동되면서 고대 엘프 성소로 향하는 전송 영류 경로가 해금되었습니다."
A-09가 손끝의 센서로 공중의 데이터 흐름을 측정하며 말했다.
"판석의 기록에 따르면 달의 궤도 인가 열쇠는 단순한 보안 암호문이 아닙니다. 고대 인류 연구진과 엘프 선조들 사이에 맺어진 '생체 퀀텀 서약 유물' 형태로 성소 깊은 곳에 안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리아가 밤하늘을 밝히는 은빛 달과 안개 낀 정령의 숲을 번갈아 바라보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고대 엘프들의 성소는 외인의 출입을 극도로 경계하는 금기의 구역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과거와 달의 진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이안은 퀀텀 대검을 집어넣고 가슴의 발키리 프레임 장갑을 단단히 가다듬었다.
"우리가 마주할 과거가 참혹한 대멸망의 상흔일지라도 달의 궤도를 열고 진실을 확인하는 일은 멈출 수 없다."
이안의 눈빛이 밤의 안갯속에서 강렬하게 빛났다.
이안, 리아, A-09 세 사람은 청백색 궤도 광선이 인도하는 정령의 숲 심연을 향해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은빛 달빛이 깊은 숲의 안개 위로 차갑고도 아련한 빛을 내리쬐는 가운데 3부 '잃어버린 인류'의 새로운 탐사 장이 차분하고도 장엄하게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