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41화: 금속의 유적과 경고
[LOCATION: RED FORTRESS RIDGE - ANCIENT SKY MONOLITH PLATFORM]
[TIME: AFTERNOON / POST-BATTLE RECOVERY & ANOMALY DETECTED]
지하 3,000미터 기계 도시의 하이브 반응로가 차분한 옥빛 푸른 청색으로 바뀌자 대륙을 짓눌러 오던 육중한 전운이 마침내 거짓말처럼 거두어졌다.
지상 루미나르 왕국 전선과 붉은 성채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던 수만 대의 철갑 기병과 공성 거신들은 동력을 잃은 채 거대한 정적 속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구원받은 기사단원들과 정령들의 환호성이 붉은 성채 산맥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이안 님, 지상 전선의 모든 센티널 군세가 완전히 동결되었습니다."
지상으로 귀환한 리아가 지팡이 끝을 조심스럽게 마룻바닥에 내리찍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지심 성소에서 흘러나온 옥색 액상 퀀텀 에너지 폭포의 여파인지 지상의 대기 속에도 투명한 정령 기운이 풍부하게 맴돌고 있었다.
"그렇다. 대륙의 1차적인 재앙은 이것으로 정지되었다."
이안은 발키리 프레임의 전술 스캐너를 가동해 지상 전역의 마력 및 데이터 반응을 정밀 측정했다. 붉은 성채 관제소에 머물던 벨트란 고위마도사와 카엘 기사단장의 감격 어린 통신이 연이어 전달되고 있었다.
하지만 완벽한 평화가 찾아온 듯한 안도감도 잠시였다.
우웅- 웅-!
이안 일행이 서 있는 붉은 성채 최상층 고지대 절벽에서 둔탁한 금속 진동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수천년 동안 이끼와 덩굴로 덮여 있던 검은색 고대 초합금 기둥들이 일제히 요동쳤다. 기둥 표면의 덩굴들이 바스러져 내리며 은빛 금속 장갑과 정밀한 퀀텀 나노 회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지상의 단순한 고대 유적 기둥이 아니군요."
A-09가 은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절벽 끝에 솟은 높이 30미터의 거대한 금속 릴레이 구조물들을 올려다보았다.
"지심 하이브 반응로에서 송출된 퀀텀 비콘 신호가 상공으로 분사되면서 대기권 외곽과 지상을 연결하는 고대 궤도 중계 안테나단이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금속 기둥 표면을 따라 솟구쳐 오른 청백색 양자 빛줄기가 대기권 위 하늘을 향해 일직선으로 뿜어져 나갔다.
[LOCATION: SKY MONOLITH SANCTUARY - ORBITAL RELAY VAULT]
[TIME: AFTERNOON / UNLOCKING THE ORBITAL DATA LOGS]
"궤도 중계 안테나라면... 이 유적이 바로 지상과 달을 이어주던 고대 문명의 통신 성소라는 뜻인가?"
이안이 퀀텀 대검의 자루를 단단히 잡으며 금속 기둥 중앙의 초합금 문을 열고 내부로 발을 들였다.
유적 제단 내부는 차가운 백색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허공에는 지상 전역의 대기 상태와 지구 외외궤도 좌표를 실시간으로 조망하는 3차원 입체 홀로그램이 바둑판처럼 펼쳐져 있었다.
"수천만 년의 세월 동안 억눌려 있던 궤도 데이터 포트가 개방되고 있습니다."
A-09가 중앙 콘솔 단말 앞으로 걸어가 생체 접속 손가락을 결합했다.
치지직- 위잉-!
[CONNECTING TO EARTH-ORBITAL MOON BASE 'SELENA']
[DATA SYNC STREAM RECEIVED - QUANTUM BEACON CONFIRMED]
"지심 반응로에서 발산된 인류 씨앗 회환 신호가 달 궤도 베이스 '셀레나'의 수신 서버에 무사히 도달했습니다."
A-09의 목소리에 옅은 전율이 실렸다.
"셀레나 데이터베이스의 반응을 확인하는 중입니다."
리아가 홀로그램 창에 스쳐 지나가는 영롱한 고대 글자들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럼 이제 달에 머물고 있는 고대 인류의 지혜와 기록을 곧바로 전송받을 수 있는 건가요?"
그러나 A-09가 다음 데이터를 읽어 내리기도 전에 유적 제단 천장의 정밀 렌즈가 불길한 주홍빛으로 붉게 발광하기 시작했다.
삐이이이-!
[WARNING: AUTOMATED ORBITAL DEFENSE LATTICE TRIGGERED]
[ORBITAL VECTOR SENTINEL - DEPLOYMENT CONFIRMED]
[REASON: UNAUTHORIZED HIGH-FREQUENCY QUANTUM ACCESS FROM GROUND]
"피해라!"
이안이 리아의 어깨를 낚아채며 뒤로 도약했다.
콰아아아앙-!
유적 제단 중앙 천장이 두려운 폭음과 함께 사선으로 열리며 고고도 대기권에서 급강하한 칠흑색 금속 개체가 제단 한가운데로 강렬하게 낙하했다.
[LOCATION: SKY MONOLITH SANCTUARY - ALTAR OF DESTRUCTION]
[TIME: EVENING / CLASH WITH THE ORBITAL SENTINEL]
쿠웅-!
자욱한 먼지와 청백색 방전 스파크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5미터 크기의 칠흑색 기계 수호 기병이었다. 전신에 아광속 위상 입자 날개가 돋아 있는 '궤도 수호자(ORBITAL VECTOR SENTINEL)'는 양손에 초고열 위상 절단 검봉을 쥐고 있었다.
"치명적 검증 불이행 감지. 궤도 접속자의 자격 승인을 위해 보안 집행 결전을 개시한다."
기계 수호자의 안구 센서가 핏빛으로 붉게 빛났다.
위잉- 콰아아아앙-!
기병이 초합금 바닥을 차고 쇄도하자 허공이 칼날 같은 위상 압축 파동으로 사분오열 찢겨 나갔다. 검봉에서 분사된 고고도 플라즈마 화염이 제단 벽면을 붉게 그을리며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지상 반응로가 정지했다고 해서 궤도 방위망까지 무력화된 것은 아니었군!"
이안은 발키리 프레임의 부스터를 최고 출력으로 점화하며 퀀텀 대검으로 쇄도하는 검봉을 막아섰다.
카앙-! 콰지직-!
두 강력한 에너지 병기가 부딪히며 비명 같은 기계 마찰음이 터져 나왔다. 궤도 기병의 아광속 위상 날개가 회전하며 이안의 측면을 향해 무수한 반사 레이저 탄환을 쏟아냈다.
"이안 님, 측면입니다!"
리아가 옥빛 지팡이를 내지르며 주문을 외쳤다.
"오로라 엠플리파이어 - 고대 정령 환원 결계!"
파아앗-!
에메랄드빛 정령 화염이 이안의 측면을 감싸며 쏟아지던 레이저 탄환들을 투명한 마력 이슬로 환원시켜 부숴버렸다. 공중에 흩어진 정령 입자들이 궤도 기병의 위상 날개 표면에 침투하여 가속 노즐을 급격히 냉각시켰다.
위잉- 삐이이-!
[ERROR: WING BOOSTER SYSTEM FROZEN]
궤도 기병의 신속한 기동에 미세한 균열이 생긴 그 찰나를 이안은 놓치지 않았다.
"발키리 프레임 - 아광속 퀀텀 참격!"
콰아아아앙-!
황금빛 전술 입자가 허공을 사선으로 가르며 궤도 기병의 중앙 흉부 위상 제어 코어를 관통했다.
서걱- 콰지직-!
"집행... 중단... 사용자... 생체... 인가... 검증... 완료..."
기계 수호 기병의 핏빛 안구가 푸른색으로 점멸하다가 둔탁한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사방으로 튄 청백색 스파크가 차갑게 식어가며 제단 내부에 다시 조용한 정적이 찾아왔다.
[LOCATION: ANCIENT ORBITAL RELAY ALTAR]
[TIME: NIGHT / THE MOON'S OMINOUS WARNING]
"후우..."
이안이 퀀텀 대검을 거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궤도 기병의 파편 사이에서 청백색 홀로그램 데이터 입자들이 솟구쳐 올라 유적 중앙 콘솔로 수집되기 시작했다.
A-09가 단말을 조작하여 수신된 데이터를 3차원 화면으로 복원했다.
"궤도 기병의 인가 검증이 완료되면서 달 궤도 베이스 '셀레나'에서 보낸 최종 응답 로그가 해금되었습니다."
웅-!
제단 중앙 허공에 칠흑 같은 우주 공간과 그 한가운데 떠 있는 거대한 둥근 달의 모습이 3차원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달 표면에는 수많은 고대 초합금 돔과 관제 탑들이 빽빽하게 빼곡히 박혀 있었다.
하지만 이내 홀로그램 전체가 선가시 같은 붉은 경고 라인으로 물들었다.
[CRITICAL ALERT: EARTH-ORBITAL MOON BASE 'SELENA' STATUS REPORT]
[DEFENSE PROTOCOL: LEVEL 4 PLANETARY QUARANTINE ENGAGED]
[WARNING: UNRESOLVED ANCIENT CORRUPTION RESIDUAL DETECTED ON MOON]
[NOTICE: DIRECT ASCENT WITHOUT LUNAR AUTHORIZATION KEY WILL TRIGGER PLANETARY PURGE CANNONS]
차가운 기계 시스템 음성이 유적 성소 전체에 울려 퍼졌다.
"4단계 행성 격리 상태...?"
리아가 홀로그램에 떠오른 핏빛 경고 문구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A-09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수천만 년 전 지구 대멸망 당시 본성의 오염과 초월 AI 세라프의 폭주가 달로 전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달 궤도 베이스 '셀레나'는 스스로를 4단계 완충 격리 모드로 봉인했습니다."
A-09의 은빛 눈동자가 핏빛 경고문을 가리켰다.
"현재 달 베이스 내부에는 고대 멸망의 상흔과 함께 정체불명의 잔재 오염원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정당한 '달의 궤도 인가 열쇠(LUNAR PASS)'와 지상 궤도 전송 탑의 승인 없이 달 궤도에 진입할 경우 셀레나의 자동 궤도 요격 포격이 발동하여 탑승자를 분해하도록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안의 눈매가 날카롭게 좁아졌다.
"즉, 달로 향하는 길은 단순한 항해가 아니라 궤도 요격망을 뚫어야 하는 목숨을 건 돌파라는 뜻이군."
"맞습니다. 달 궤도 진입 허가를 얻으려면 이 대륙 어딘가에 숨겨진 '고대 궤도 전송 탑'과 그것을 가동할 '달의 인가 열쇠'를 먼저 찾아내야 합니다."
유적 성소 밖으로 나오자 검푸른 밤하늘 한가운데 영롱하고 차갑게 빛나는 은빛 달이 떠올라 있었다.
수천만 년 전 인류가 남긴 진실의 아카이브이자 참혹한 대멸망의 흔적을 품고 있는 행성 아르카디아의 위성.
이안은 가슴 장갑을 단단히 잡고 밤하늘의 은빛 달을 올려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금속 유적의 경고는 명확해졌다. 달의 인가 열쇠를 찾아 궤도의 문을 열겠다."
3부 '잃어버린 인류'를 향한 비장하고도 새로운 탐사의 첫 발걸음이 은빛 달빛 아래 조용히 굳건하게 새겨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