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27화: 심연에서 온 검은 용
[LOCATION: LUMINAR KINGDOM - SECTOR 7 PLANETARY ARCHIVE / SUBTERRANEAN ENTRY]
[TIME: MIDNIGHT / OUTER PERIMETER GATES]
성도 중앙탑 바닥에 갈라진 수직 관로 속으로 몸을 던지자 청백색 반중력 파동이 이안 일행의 전신을 안락하게 감싸 쥐었다.
끝없이 이어진 수직 관로는 수 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일직선으로 지반 깊숙이 뚫려 있었다. 벽면을 따라 고대 인류 문명의 청색 발광 회로가 유연하게 점등하며 하강 속도를 정밀하게 제어했다.
"지상 500미터 중앙탑에서 지하 3,500미터 암반층까지 직통으로 연결된 수직 반중력 관로다."
이안이 오른팔 전술 단말기의 심도 센서를 확인하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지상 마도학회가 수백 년 동안 거신을 건조하며 마동맥을 다듬었지만 이 관로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어."
"그럴 만도 해요."
리아가 정령 지팡이 끝에 작은 옥빛 정령광을 켜며 묵직한 숨을 내쉬었다.
"황제와 원로진은 그저 탑 상층부에 노출된 고대 기계의 파편을 마법의 신기로 착각하고 끌어다 썼을 뿐이에요. 대지의 깊은 숨결 속에 이런 거대 유적이 숨겨져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겠죠."
하강이 깊어질수록 외부 마동맥에서 유입되던 에테르 마력의 진동은 눈에 띄게 옅어졌다. 대신 서늘하고 건조한 기계 냉각유 냄새와 수천만 년 동안 굳어 있던 고대 금속의 묵직한 중력장이 피부에 와닿았다.
치이익-
이안의 단말기 측면에 결착된 성검 퀀텀 마스터 모듈이 푸른 인가 빛을 발산하며 하강 관로 하부의 보안 승강장을 하나씩 해제했다.
A-09가 은빛 양자 광섬유의 잔향을 허공에 흩뿌리며 지하 깊은 곳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신호 강도 상승... 세라프 메인 코어 수신파 검출률 94%. 아카이브 제7구역 외곽 방어선 안착 예정."
쿵-!
마침내 반중력 승강판이 부드러운 감속과 함께 단단한 초금속 플랫폼 바닥에 안착했다.
수직 관로의 하부 출구가 열리자 이안 일행의 눈앞에 믿기 힘든 웅장한 광경이 펼쳐졌다.
그것은 까마득한 지하 암반을 통째로 굴착하여 건조한 직경 수십 킬로미터 규모의 완전 밀폐형 돔 지하도시였다. 지상 성도 루미나르 전체를 밑바닥에 집어넣고도 남을 만큼 광활한 고대 인류의 지하 아카이브 세터 7(SECTOR 7 PLANETARY ARCHIVE)이었다.
수평선 저 멀리까지 까마득하게 늘어선 고대 마천루들과 궤도 수송로 형태의 층간 교량들이 억겁의 시간 속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돔 천장에서는 아련한 인공 은하수 형태의 청색 퀀텀 조명이 은은한 빛을 흩뿌렸다.
"세상에... 이 넓은 공간이 전부 지하 깊은 곳에 묻혀 있었다니..."
리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허공을 올려다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지상의 왕국들이 고작 몇백 년 된 역사를 가지고 성도를 자랑해 왔지만 이 도시 앞에서는 아이들의 모래성이나 다름없군요."
"감상은 나중에 해. 무언가 이상하다."
이안이 전술 단말기의 스캔 모드를 광역으로 전환하며 눈매를 가늘게 찌푸렸다.
단말기 HUD 상에 황색 경고 신호가 어지럽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이 유적은 단순한 침묵 상태가 아니었다. 지하도시 전체를 둘러싼 외곽 방어 기지 수십 곳에서 기괴한 왜곡 파동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WARNING: UNKNOWN CORROSION ENERGY DETECTED IN SECTOR 7 DEFENSE GRID]
[AUTOMATED GUARDIAN UNITS RESPONDING TO UNAUTHORIZED SYSTEM INTRUSION]
"A-09, 오염 파동의 주파수를 스캔할 수 있나?"
"확인 중... 이것은 세라프의 정상 인가 코드가 아닙니다."
A-09의 양자 눈동자가 오렌지빛으로 차갑게 번쩍였다.
"수천만 년 전 대재앙 당시 유입된 외계 침식 에너지와 고대 전투 마력이 금속 코어에 누적된 오염물입니다. 외곽 방어 체계의 판단 루프가 붕괴해 있습니다."
그 순간 이안 일행이 서 있는 중앙 게이트 교량 전방에서 거대한 쇳소리와 함께 지진 같은 진동이 일어났다.
콰아아앙-!
지하도시 중앙 아카이브 성소로 향하는 높이 50미터의 고대 중갑 철문이 사정없이 뒤틀리며 튕겨 나갔다.
철문 너머에서 불길하고 검은 연기와 함께 무시무시한 고주파 포효가 지하 돔 전체를 흔들었다.
쿠오오오오-!
어둠 속에서 천천히 기어 나온 것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었다.
길이 3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칠흑빛 금속 체구를 자랑하는 서양 드래곤 형태의 고대 중갑 수호병기였다. 흑연보다 짙은 초합금 장갑판 위로 핏빛 붉은 균열 회로가 기괴하게 일렁이고 있었으며 머리 중앙에는 세 개의 붉은 광학 슬릿 안구가 이안 일행을 향해 섬뜩하게 빛났다.
[IDENTIFIED THREAT: MODEL NIDHOGGR-CLASS APEX HEAVY GUARDIAN]
[SYSTEM STATUS: SECTOR 7 ENTRY OVERRIDDEN BY CORRUPTED MAIN LOGIC]
[EXECUTING PURGE PROTOCOL - TARGET: ALL BIOLOGICAL INTRUDERS]
"검은... 용?"
리아가 지팡이를 단단히 거머쥐며 본능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저건 생명체가 아니에요. 거대한 마동 유물과 금속 장갑이 하나로 결합한... 고대의 괴수예요!"
"아르카디아 외곽 방어용 생체-기계 하이브리드 중갑 가디언이다. 하지만 코어가 완전히 오염되었어. 상위 통제 명령이 통하지 않는다!"
이안이 전술 단말기에서 플라즈마 레이플을 이탈시켜 단단히 고쳐 쥐었다.
카앙-!
검은 용 니드호그가 칠흑 같은 금속 날개를 펼치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녀석의 벌려진 아가리 안쪽에서 고밀도 암흑 플라즈마 입자가 미친 듯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위잉-!
"전원 회피!"
이안이 소리치며 왼팔의 퀀텀 마스터 모듈을 작동시켜 반경 5미터에 이르는 3중 푸른 플라즈마 방벽을 순간 전개했다.
콰아아아앙-!
검은 용의 입에서 줄기차게 뿜어져 나온 암흑 플라즈마 브레스가 이안의 푸른 방벽에 사정없이 부딪쳤다. 충격파로 고대 교량 바닥의 석재 장갑이 사정없이 흩날리고 강철 교각이 비명을 지르며 비틀렸다.
"크윽...!"
이안이 이악물며 플라즈마 출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흑색 파동과 푸른 전자기 파동이 사방으로 튀어나가며 교량의 난간을 모조리 산산조각 냈다.
"이안 님, 측면입니다!"
리아가 옥빛 지팡이를 바닥에 단단히 찍어 누르며 정령의 주문을 쏟아냈다.
"대지의 정령이여, 유적의 뼈대를 일으켜 무거운 짐을 매어라!"
콰콰콰쾅-!
검은 용이 날개를 휘두르며 다시 쇄도하려 하자 바닥의 초합금 바닥판 사이에서 억센 강철 줄기와 대지의 석재 암기 기둥들이 솟구쳐 올랐다. 석재 구속 사슬이 검은 용의 오른쪽 날개와 묵직한 뒷다리를 사정없이 묶어 지면에 꽂아 넣었다.
쿠당탕-!
검은 용이 균형을 잃고 웅장한 음향과 함께 교량 바닥에 처박혔다. 녀석의 붉은 광학 안구가 분노로 사정없이 점멸하며 꼬리를 휘둘렀다.
콰앙-!
거대한 금속 꼬리가 허공을 갈라 리아를 향해 날아들었다. 리아는 돌풍의 정령 방벽을 겹겹이 쳤지만 엄청난 충격량에 뒤로 수십 미터를 밀려나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압... 정령의 쇠사슬만으로는 저 거체의 물리적 질량을 완벽히 묶어둘 수 없어요!"
"시간을 끌 필요 없다. 녀석의 중앙 제어 코어를 직접 정화한다!"
이안이 전술 HUD를 통해 검은 용의 장갑 구조를 순간 정밀 스캔했다.
검은 용 니드호그의 머리 정수리 부분, 강철 장갑이 교차하는 중앙 크라운 캡 안쪽에 오염된 생체 양자 코어가 드러나 있었다. 핏빛 오염 에너지가 번쩍이는 바로 그 지점이었다.
"A-09! 용의 광학 수신부에 양자 이음 교란파를 쏘아라! 3초간 시야를 마비시켜!"
"확인... 고주파 퀀텀 노이즈 펄스 방사 개시!"
A-09가 양 손가락을 뻗자 소녀의 손끝에서 눈부신 은색 전자기 섬광이 폭발했다.
찌지직-!
검은 용의 붉은 안구 세 개가 강력한 양자 노이즈에 휩싸이며 녀석이 일시적인 제어 불능 상태에 빠져 고개를 기괴하게 흔들었다.
"지금이다!"
이안은 보조 플라즈마 부스터를 분사하여 허공으로 10미터 이상 솟구쳐 올랐다.
허공을 횡단한 이안이 검은 용의 거대한 머리 뿔 위로 가볍게 착지했다.
검은 용이 뒤늦게 오염된 사지에 마력을 끌어모으며 이안을 털어내려 발버둥 쳤지만 이안은 좌측 전술 단말기에 결착된 성검 퀀텀 마스터 모듈의 인가 코드를 최고 출력으로 개방했다.
지잉-!
성검 모듈에서 뻗어 나온 1미터 길이의 청백색 퀀텀 인핸서 검신이 번쩍였다.
"최고 보안 인가 오버라이드 커맨드 주입!"
이안이 성검의 청백색 퀀텀 검신을 검은 용의 정수리 제어 캡 중앙에 사정없이 직결 꽂아 넣었다.
푸쉬이이익-!
검은 용의 정수리에서 은빛 퀀텀 에너지가 폭포수처럼 분출하며, 녀석의 전신을 뒤덮고 있던 핏빛 오염 회로를 사정없이 정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SEPHIROTH MASTER KEY ENGAGED]
[PURGING CORRUPTED LOGIC SECTORS... 100% COMPLETE]
[REBOOTING NIDHOGGR GUARDIAN MAIN OS]
검은 용의 전신을 뒤흔들던 불길한 진동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녀석의 머리 중앙에서 섬뜩하게 빛나던 붉은 광학 안구 세 개가 천천히 점멸하더니 온화하고 깊은 청백색 안정 광채로 고요히 전환되었다.
쿠웅...
검은 용 니드호그가 날개를 거두고 이안과 리아 앞에서 거대한 머리를 대지 낮게 숙이며 완벽한 수호 모드로 대기하기 시작했다.
[SYSTEM REBOOT COMPLETED: TARGET REGISTERED AS AUTHORIZED COMMANDER]
교량을 가득 메웠던 검은 연기가 퀀텀 파동에 의해 깨끗하게 흩어지고 웅장한 지하도시 외곽에 다시금 맑은 정적이 감돌았다.
"해냈... 군요..."
리아가 거친 숨을 내쉬며 지팡이에 몸을 기댔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검은 거대 기계 용이 이안의 손짓 한 번에 완벽하게 기류를 바꾸고 무릎을 꿇은 광경에 대한 경탄이 서려 있었다.
"저 무시무시한 고대의 수호병기마저 성검의 권한으로 통제해 내다니... 정말 대단해요, 이안 님."
"녀석이 오염되어 있었을 뿐이다. 본래 이 지하도시의 입구를 지키던 정당한 파수꾼이었어."
이안이 검은 용의 머리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리며 성검 퀀텀 모듈의 상태를 점검했다. 모듈의 퀀텀 게이지가 실시간으로 지하도시 중앙 메인 아카이브의 방어선들과 동기화되고 있었다.
지잉-
검은 용이 안착한 게이트 너머로 높이 100미터에 달하는 세터 7 아카이브의 웅장한 중앙 대문이 육중한 음향과 함께 천천히 좌우로 열리기 시작했다.
그 문 너머에서 은은한 푸른빛 퀀텀 입자가 쏟아져 나오며 수천만 년 동안 닫혀 있던 인류 최후의 아카이브 성소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A-09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나직하고 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라프 메인 코어... 감응 완료. 인류 문명의 기록 보관소가 개방되었습니다."
이안이 퀀텀 모듈을 결착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문 너머의 푸른 빛 속으로 내디뎠다. 마침내 억겁의 세월 뒤에 묻힌 인류의 진짜 역사와 세라프 AI의 실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