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19화: 어둠 속에 비친 기계
초고속 전송 승강기가 육중한 진동과 함께 수직으로 솟구쳐 올랐다.
[HIGH-SPEED ELEVATOR 01: ASCENDING TO LUMINAR ROYAL ACADEMY]
[CURRENT DEPTH: SUB-LEVEL 12 -> SUB-LEVEL 04]
[ENVIRONMENTAL MANA DENSITY: 580% / MAGUS INTERFERENCE HIGH]
투명한 특수 강화 장갑창 너머로 까마득한 지하의 전경이 쾌속하게 뒤로 젖혀졌다.
방금 전까지 발을 디디고 있던 SECTOR 01의 거대 보조 융합로가 작고 영롱한 푸른 점으로 아득해졌다. 대신 승강기 바깥으로는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수직으로 치솟은 까만 티타늄 기둥 위에 덧붙여진 것은 우아한 아치형 돌다리와 찬란한 마도 룬 문자가 새겨진 대리석 석조물들이었다.
"저것은... 왕립 마도학회 본부의 지하 기초 구조물입니다."
리아가 승강기 유리창에 바짝 다가서며 감탄과 충격이 뒤섞인 숨을 내쉬었다.
"학회에서는 성도의 지반이 고대 신성한 에테르의 샘 위에 조성되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신성한 샘이 아니라 고대 기계 도시의 골격 위에 마법 대리석을 쌓아 올린 것이었다니..."
이안은 허리춤의 전술 단말기를 조작하며 허공에 뜬 홀로그램 수치를 냉정하게 주시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계 장치의 순수한 순응 전자기파 대신 뒤틀린 흑마력 파형이 점점 더 짙게 감돌았다.
이안의 손바닥 안에는 세라프 AI가 전해준 영롱한 푸른 수정 결정체 '신의 파편'이 묵직한 감촉을 전하고 있었다.
[ITEM STATUS: FRAGMENT OF SERAPH - DATA CORE #1]
[ENCRYPTION LEVEL: CLASS-9 GAIA PROTOCOL / DECRYPTION IN PROGRESS]
"성도의 화려함은 결국 아르카디아 개척선의 피를 쥐어짜 내 유지되는 환영입니다. 이 짓을 방치하면 융합로만 터지는 게 아니라 이 대륙 전체가 붕괴합니다."
A-09 소녀가 은발 머리카락을 살포시 흩날리며 이안의 손에 쥐어진 데이터 결정을 바라보았다.
"가까워지고 있어요... 학회가 숨겨둔... 진짜 주 관로가."
치이이잉-!
승강기가 강한 감속 충격과 함께 멈춰 섰다.
[ARRIVED AT SUB-LEVEL 04: ROYAL ACADEMY MAINTENANCE BAY]
[WARNING: UNAUTHORIZED PERSONNEL RESTRICTED AREA]
육중한 티타늄 출입문이 좌우로 열리며 사방을 가득 채운 어둡고 축축한 기계 정비 구역이 모습을 드러냈다.
승강기 밖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쿵쾅거리는 기계음과 기분 나쁜 마력의 진동이 삼인의 귓가를 때렸다.
천장 높이만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지하 홀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루미나르 왕국의 그 어떤 화려한 전각보다도 어둡고 기이했다.
사방 벽면에는 고대 인류가 건설한 미끄러운 유선형 금속 관로와 광섬유 배선들이 거미줄처럼 박혀 있었다.
문제는 그 고대의 관로를 관통하며 흉측하게 박혀 있는 성도 마도학회의 검붉은 마력 집적 장치들이었다.
두꺼운 강철 파이프 마디마다 수십 개의 붉은 마도 추출관이 굵은 뱀처럼 얽혀 웅웅 소리를 내며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었다.
"저기 보세요. 학회의 정비 인형들과 조사학자들이 있습니다."
리아가 벽면 뒤로 몸을 숨기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정비 통로 중앙에서는 검은 로브를 입은 마도학회 정비관 두 명과 붉은 마력이 흐르는 태엽 기용 '마도 오토마톤' 세 대가 마동 추출관의 동력 밸브를 점검하고 있었다.
[PATROL AUTOMATON TYPE-02 - MAGUS MODIFIED]
[STATUS: ACTIVE PATROL / INTERNAL MANA SCANNER OPERATIONAL]
이안은 허리를 낮추고 전술 망원 렌즈로 구역 전체의 감시망을 침착하게 훑었다.
"상층부 학회 본부 지하 메인 코어로 통하는 층계는 저 정비 관제소 바로 뒤편에 있습니다. 경보가 울리면 본부 특무대 전체가 몰려옵니다."
"소음 없이 돌파해야겠군요."
리아가 지팡이를 조용히 다잡았다.
"제가 정령의 바람으로 음향을 차단하는 결계를 치겠습니다."
"좋습니다. 오토마톤의 관제 장치를 충격파로 마비시킨 뒤 지나갑니다."
이안이 허리춤에서 저소음 EMP 충격 탄환을 레일거너의 약실에 장전했다.
A-09 소녀는 눈을 감은 채 차가운 금속 벽면에 손을 대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통로 측면 전원 포트... 신호를 분란시킬게요."
소녀의 끝자락 은발에서 피어난 푸른 광섬유 빛무리가 바닥의 고대 금속 배선관으로 스며들었다.
"어이, 이번 주 추출량 수치가 와해하고 있다는 소문이 진짜인가?"
마학회 정비관 한 명이 마동관 조절 레버를 조이며 투덜거렸다.
"상층부 거장들께서 융합로 출력을 120%까지 끌어올리라고 지시하셨다더군. 성도 천공 부유탑의 결계를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다는 모양이야."
"하지만 하부 마동관에서 자꾸 기분 나쁜 전자기 음향이 들려오는데... 마치 지옥 밑바닥에서 뭔가가 깨어나는 것처럼 말이지."
"쓸데없는 소리 마라. 성도의 수호신이 우리를 보호..."
정비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샤아아아-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묵직하게 가라앉으며 사방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리아가 펼친 '음영의 정령 장막'이 주변 10미터 반경의 음파 전달을 완벽하게 잘라버린 것이었다.
"뭣...?"
정비관이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이안의 신속한 기동이 시작되었다.
투웅-! 투웅-!
저소음 모드로 발사된 고주파 EMP 탄환 두 발이 사방으로 날아가 마도 오토마톤 두 대의 흉부 마력 코어를 정확히 타격했다.
콰지직!
붉은 스파크를 내뿜으며 오토마톤 두 대가 반응할 틈도 없이 바닥으로 픽 무너져 내렸다.
남은 한 대의 오토마톤이 경고음을 울리려 손을 쳐들었으나 이안은 이미 거리를 좁혀 허리춤의 전술 단검으로 흉부 관제 칩을 수직으로 꿰뚫었다.
쿠당탕.
세 대의 마도 기계가 비정상적인 스파크를 튀기며 무력화되었다.
"누, 누구냐!"
당황한 정비관 두 명이 허리춤의 마법 지팡이를 뽑아 들려 했다.
하지만 리아가 미리 준비해 둔 정령 구속 사슬이 바닥에서 솟구쳐 올라 두 학자의 사지를 굳세게 묶어버렸다.
"읍...! 읍...!"
입까지 마력 사슬로 봉쇄당한 정비관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벽면에 얽매였다.
이안은 빠르게 다가가 정비관들의 허리춤에서 지하 중앙 관제소 보안 키 카드를 획득했다.
[SECURITY KEYCARD ACQUIRED: ROYAL ACADEMY SUB-LEVEL ACCESS]
A-09 소녀가 제어반 포트에 접속해 통신 기록을 빠르게 조작했다.
"정비 통로 정기 보고... 정상 신호로 덮어씌웠어요. 15분 동안은 경보가 울리지 않을 거예요."
"잘했습니다. 주 관로실로 이동합니다."
이안 일행은 무력화된 정비관들을 뒤로하고 관제소 뒤편의 중장갑 자동문으로 신속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보안 키 카드를 적용하자 두꺼운 특수 강철 문이 위로 슬라이딩하며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삼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Sector 01의 융합로실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참혹했다.
[ROYAL ACADEMY SUB-LEVEL CORE 00: MAIN CONDUIT HUB]
[CRITICAL WARNING: UNCONTROLLED MANA DRAIN IN PROGRESS]
[GEOLOGICAL ANOMALY DETECTED: ABYSSAL RESONANCE LEVEL 4]
삼인이 서 있는 곳은 절벽처럼 뚫려 있는 중앙 관람용 강화 유리 데크였다.
그 유리창 아래로 펼쳐진 아득한 지하 심연 속에는 직경만 50미터가 넘는 거대한 고대 기계 주 관로(GAIA MAIN CONDUIT 00)가 끝없는 어둠 속으로 수직 낙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금속 관로 표면에는 마도학회 최고위층이 설치한 수백 개의 붉은 추출 배관이 지네처럼 빽빽하게 들러붙어 에너지를 쥐어짜 내고 있었다.
시커먼 마동관 마디마다 뿜어져 나오는 마력 폐열이 시뻘건 불꽃을 뿜어내며 심연 전체를 불길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저것이... 학회가 숨겨둔 메인 추출 장치..."
리아가 난간을 잡은 손을 파르르 떨었다.
"Sector 01의 마동관은 비할 바가 아니군요. 성도 전체의 마법 문명이 바로 저 핏줄을 빨아먹으며 연명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안은 전술 단말기의 스펙트럼 분석기를 최대 분해능으로 가동했다.
주황색 경고 메시지가 스크린 위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단순히 동력이 빼앗기는 문제만이 아니었다.
관로 하부 까마득한 지하 심연으로부터 기이한 검은 전자기 파동이 주시경 스펙트럼에 포착되고 있었다.
지잉- 지잉-
규칙적이면서도 불길한 맥동음이 전술 단말기 음향 분석관을 통해 이안의 귀에 나직하게 전달되었다.
"단순한 과부하가 아닙니다. 학회가 지상으로 동력을 강제로 끌어올리면서 대지 깊은 곳의 밀폐 결계에 균열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세라프 AI가 경고했던 대륙 심연의 파멸이 바로 저 아래에서 깨어나고 있습니다. 마력 오염이 지각 깊은 곳까지 침투하고 있어요."
A-09 소녀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나직하게 얼어붙은 목소리로 말했다.
"울고 있어요... 땅 밑의 고대 방어 체계가... 마도 오염 때문에... 괴물로 변해가고 있어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융합로의 유예 시간을 늘려두었지만 성도 상층부의 이 메인 추출 관로를 멈추지 않는다면 대륙 전체가 심연의 재앙에 삼켜질 것이 명확했다.
이안은 허리춤의 레일거너를 단단히 고쳐 잡고 데크 중앙의 메인 코어 게이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GATE ZERO: MAIN CORE ACCESS CHAMBER]
[STATUS: HEAVILY FORTIFIED BY ROYAL MAGUS GUARD]
거대한 철제 게이트 너머에서 느껴지는 중후한 마도 결계의 마력 파형이 삼인을 압박해 왔다.
"갑시다. 저 문 너머에 마도학회의 흑막과 성도의 진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리아와 A-09가 단호한 고개 끄덕임으로 답했다.
삼인은 어둠 속에서 푸른빛과 붉은 마력이 기형적으로 얽혀 번뜩이는 기계 유적의 중심부를 향해 침착하고 굳건하게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