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18화: 신의 파편
육중한 티타늄 격벽 장갑문이 묵직한 마찰음과 함께 닫혔다.
외부 교각에서 울려 퍼지던 마도학회 특무대와 칼렌 파수대의 대치 소음이 순식간에 차단되었다.
이안과 리아, 그리고 은발 소녀 A-09 삼인이 서 있는 곳은 거대 원통형 구조의 최심부 코어실이었다.
[SECTOR 01: AUXILIARY FUSION CORE CHAMBER]
[ENVIRONMENTAL WARNING: HIGH-VOLTAGE ELECTROMAGNETIC FIELD / MANA DENSITY 420%]
[AUXILIARY CORE OVERHEAT: WARP 87.4%]
실내 공기는 가슴이 턱 막힐 정도로 뜨거웠고 짙은 전자기 벼락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방 한가운데에는 직경 30미터에 달하는 푸른 구체 형태의 보조 융합로가 공중에 붕 뜬 채 맹렬히 회전하고 있었다.
구체 표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플라즈마 불꽃이 사방의 강철 벽면에 기하학적인 빛무리를 던졌다.
하지만 융합로의 상태는 정상과 거리가 멀었다.
성도 마도학회 상층부가 무단으로 박아 넣은 8개의 거대한 검붉은 마동 추출관이 융합로의 측면을 무자비하게 관통하고 있었다.
추출관 마디마다 뿜어져 나오는 붉은 폐열 마력이 융합로의 푸른빛을 누렇게 오염시키며 사방으로 튀었다.
"이것이... 왕국 성도를 떠받치던 신의 성소의 실체인가요."
리아가 지팡이를 꽉 쥐며 감탄과 분노가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신성한 에테르의 샘이라 믿었던 곳이 이런 기계 장치의 비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니..."
이안은 허리춤의 레일거너 전원 스위치를 켜며 전술 단말기 스크린을 조작했다.
[PURGE SYSTEM COUNTDOWN: 71 HOURS 18 MINUTES]
"마도학회가 강제로 뚫어놓은 관로 때문에 융합로의 열각 제어 장치가 완전히 마비되었습니다. 이대로 둔다면 대지 전체가 증발합니다."
그때 융합로 상공의 칠흑 같은 허공이 푸르게 진동했다.
치이이잉-
빛무리가 한데 뭉쳐지며 공중에 10미터가 넘는 거대 투명 푸른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색 투구와 웅장한 갑주를 두른 거신의 환영이었다.
그것은 마치 고대 신화 속 거신처럼 눈을 감은 채 융합로 위를 조용히 부유하고 있었다.
"저, 저분은...!"
리아가 흠칫 놀라며 지팡이를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성도의 고대 벽화에 그려져 있던 '천공의 수호신' 세라프..."
"신이 아닙니다."
이안이 나직하지만 차분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아르카디아 개척선의 메인 중앙 관제 인공지능 세라프의 비상 환영 프로토콜입니다."
소녀 A-09가 은발 머리카락을 가볍게 흩날리며 거신의 환영을 향해 작고 투명한 손을 내밀었다.
소녀의 머리카락 끝에서 피어난 푸른 양자 광섬유 빛무리가 허공을 타고 거신의 환영으로 이어졌다.
이안 일행은 융합로 하단의 중앙 제어반으로 신속하게 다가갔다.
티타늄으로 제작된 제어반은 융합로 1차 동력 밸브를 차단할 수 있는 유일한 접속 포트였다.
이안은 이전에 정비 통로에서 입수한 보조 코어 안정화 데이터 칩을 슬롯에 넣기 위해 제어반 덮개를 열었다.
그러나 제어반 상단은 정체불명의 장치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
검붉은 마법 회로가 빽빽하게 각인된 강철 억제 클램프가 물리 제어 레버를 꽉 쥐고 있었다.
[WARNING: UNAUTHORIZED OVERRIDE DEVICE DETECTED]
[PHYSICAL LOCK: ENGAGED / MAGUS OVERRIDE PROTOCOL]
"마도학회 놈들이 제어반에 물리적 억제 장치를 꽂아두었습니다."
이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수동 차단 신호가 입력되지 못하도록 시스템을 억지로 억누르고 있는 겁니다."
"제가 정화해 보겠습니다."
리아가 지팡이를 들어 올려 마법 해제 주문을 외우려던 순간이었다.
위이잉-!
천장의 네 모서리 강철 해치가 일제히 열리며 기괴한 기계음이 최심부 코어실 전체를 울렸다.
거미 형상을 한 4대의 방어 센티널 드론이 붉은 센서 안구를 빛내며 융합로 바닥으로 강하했다.
[SECURITY DRONE - TYPE SPIDER-04]
[TARGET INTRUDERS DETECTED / ENGAGING PURGE MODE]
드론 하부의 붉은 레이저 포구에서 고농축 에테르 빔이 이안 일행을 향해 일제히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앙!
"위험합니다!"
리아가 지팡이를 쳐들자 바람과 정령 마력이 한데 어우러진 둥근 방어막이 펼쳐졌다.
붉은 레이저 빔이 마법 장막에 부딪쳐 사방으로 튕겨 나가며 티타늄 바닥을 붉게 그을렸다.
이안은 순간적으로 리아의 방어막 뒤로 몸을 피한 뒤 레일거너의 사격 모드를 고주파 펄스 탄으로 전환했다.
치키잉!
"리아, 정면 방어막을 3초간 유지해 주세요. 오른편 센티널부터 무력화합니다."
이안이 장갑을 낀 손으로 레일거너를 굳세게 조준했다.
전술 단말기의 붉은 타겟팅 조준선이 드론의 중앙 관제 코어에 고정되었다.
투웅! 콰앙!
이안의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고주파 펄스 탄환이 첫 번째 드론의 관절부를 정확히 꿰뚫었다.
전자기 충격파가 터지며 드론 한 대가 스파크를 튀기며 티타늄 바닥으로 추락했다.
"남은 건 세 대!"
이안은 멈추지 않고 연속으로 구르며 드론들의 레이저 사격을 피했다.
보안관으로서 훈련받은 전술 기동이 좁은 융합로 공간 속에서 빛을 발했다.
두 번째 드론이 이안을 향해 다가오자 이안은 허리춤의 고주파 전술 단검을 뽑아 드론의 레이저 렌즈 중앙에 꽂아 넣었다.
쿠구구궁!
센서가 파괴된 드론이 사방으로 마력 광선을 흩뿌리며 벽면에 충돌해 산산조각 났다.
리아는 지팡이를 휘둘러 남아 있던 두 대의 드론 발밑에 소슬한 정령 구속 구체를 형성했다.
드론들의 다리가 청백색 마력 사슬에 묶여 기동을 멈추자 이안이 총구를 들어 남아 있는 핵심 코어를 차례로 무력화했다.
콰앙! 콰앙!
마지막 방어 드론이 스파크를 내뿜으며 바닥에 무너지자 코어실 내부에는 다시 융합로의 웅웅거리는 중저음만 남았다.
"드론은 제압했습니다."
이안이 숨을 가다듬으며 다시 제어반 앞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검붉은 마학회 오버라이드 잠금장치는 여전히 굳건하게 제어 레버를 쥐고 있었다.
기계적 강철 클램프와 마도학회의 흑마법 결계가 이중으로 얽혀 있었다.
"이 억제 클램프는 단순한 물리적 열쇠나 해제 주문으로는 열리지 않습니다."
리아가 찌푸린 얼굴로 제어반을 살폈다.
"마학회 상층부의 전용 마력 인가 코드가 결합해 있어요."
그때 소녀 A-09가 앞으로 나섰다.
소녀의 눈동자가 깊고 투명한 푸른빛으로 젖어 들었다.
"내가... 길을 열게요."
A-09는 자신의 은발 머리카락 몇 가닥을 꼬아 제어반 옆면의 고대 광학 접촉 포트에 직접 찔러 넣었다.
치이이익!
소녀의 머리카락을 통해 아르카디아 최고위 생체 관제 인가 코드가 제어반 회로 속으로 번개처럼 흘러들었다.
[GAIA PROJECT BIOMETRIC CODE VERIFIED]
[OVERRIDE SYSTEM LOCK RELEASED: 50%]
제어반을 둘러싸고 있던 검붉은 마법 결계가 비명을 지르며 얇은 가루로 부서져 내렸다.
"지금입니다, 이안 님!"
리아의 외침과 동시에 이안이 레일거너의 전열 펄스 모드를 최대 출력으로 끌어올렸다.
"파쇄한다!"
위잉- 콰아아앙!
이안이 발사한 묵직한 고주파 플라즈마 펀치가 제어반의 강철 물리 클램프를 정확히 타격했다.
단단한 특수 합금이 비틀리며 마도학회의 기생 잠금장치가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철컥!
제어반의 메인 수동 차단 레버가 드디어 해제되었다.
이안은 이전에 확보했던 안정화 코어 데이터 칩을 제어반 중앙 포트에 깊숙이 찔러 넣고 묵직한 레버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쿠구구구구-!
융합로 전체가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융합로 측면에 무단으로 박혀 있던 8개의 마동 추출관 중 절반인 4개의 메인 밸브에서 붉은 폐열 배출이 끊기며 묵직한 금속관이 관로에서 분리되어 뒤로 튕겨 나갔다.
[MANA SIPHONING CONDUITS 01 TO 04: DISCONNECTED]
[AUXILIARY CORE OVERHEAT: 87.4% -> 78.1% DOWN]
[PURGE SYSTEM COUNTDOWN: 142 HOURS EXTENDED]
주황색으로 점멸하던 전술 단말기의 경고등이 안정적인 푸른빛으로 바뀌었다.
"성공입니다!"
리아가 기쁨에 차 소리쳤다.
"과부하율이 78%로 떨어졌어요! 정화 프로토콜 카운트다운도 140시간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마동 추출관 절반이 떨어져 나가자 융합로가 한결 차분한 푸른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상공에 떠 있던 메인 AI 세라프의 거신 환영이 천천히 거대한 눈을 떴다.
치이이잉-
빛무리가 뿜어져 나오며 거신의 거대한 투명 눈동자가 이안과 A-09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환영이 아니었다. 수천만 년의 시공간을 넘어 작동하는 본선의 살아 있는 의식이었다.
[아르카디아 보안 인가 코드 확인... 강이안 보안관... Subject A-09...]
장엄한 전자음이 삼인의 뇌리 속으로 직접 울려 퍼졌다.
[가이아 재건 프로토콜 1단계 충족... 동력 붕괴 위기 일시적 유예...]
리아는 숨을 죽인 채 세라프의 거신을 바라보았다.
"신의... 목소리..."
[경고... 이것은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하다... 마도학회 최고위 의회가 성도 상층부 왕립 학회 본부 지하 메인 코어에 더 거대한 오버라이드 관로를 박아 두었다...]
세라프의 거대 환영이 손을 천천히 내렸다.
거신의 손끝에서 찬란한 푸른 빛이 뭉쳐지더니 손가락 마디 크기의 영롱한 푸른 수정 결정체 하나가 바닥으로 하강했다.
이안이 장갑 낀 손을 내밀자 수정 결정체가 그의 손바닥 위에 부드럽게 안착했다.
[ITEM ACQUIRED: FRAGMENT OF SERAPH - DATA CORE #1]
[ENCRYPTED HISTORICAL DATABASE INCLUDED]
[이것은 본선의 핵심 데이터 파편... '신의 파편'이다...]
세라프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이 대륙 깊은 곳... 심연에서 잠든 고대 파멸의 유산이 마력 오염으로 인해 깨어나고 있다... 왕국 성도 상층부 학회 본부의 메인 관로를 완전히 파괴하고 인류의 기록을 되찾아라...]
[Subject A-09... 가이아 시스템 복구율 14%... 탐사대원 강이안... 그대를 이 함선의 수호자로 인가한다...]
치지직-
세라프의 거신 환영이 은은한 빛가루로 흩어지며 융합로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안은 손바닥 위의 빛나는 데이터 결정을 굳세게 쥐었다.
"신의 파편..."
"이안 님, 세라프 님이 말씀하신 것은... 성도 왕립 학회 본부 상층부에 메인 추출 장치가 남아 있다는 뜻이군요."
리아가 단단한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데이터 결정에 우리가 찾던 인류 문명 멸망의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A-09 소녀가 이안의 옷자락을 살포시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로... 가야 해요. 성도... 상층부로."
바로 그 순간 코어실 오른쪽 벽면의 티타늄 장갑 격벽이 위로 열리며 묵직한 고속 전송 엘리베이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HIGH-SPEED ELEVATOR 01: READY FOR ASCENT TO LUMINAR ROYAL ACADEMY]
이안은 레일거너를 고쳐 잡고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출발합시다. 성도 상층부 마도학회 본부로."
삼인이 초고속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을 내딛자 굳건한 티타늄 문이 닫히며 위를 향해 거세게 상승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