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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16화

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16화: 빛나는 은발

성도 지하 정비 계단은 지상의 숲과 전혀 다른 세계였다.

축축한 흙내음과 울창한 수목 뿌리가 얽혀 있던 입구를 지나자 칠흑 같은 티타늄 탄소관 합금 벽면이 끊임없이 아래로 이어졌다. 계단을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공기는 빠르게 서늘해졌고 정적 속에는 극저온 냉각 가스가 기분 나쁘게 뿜어져 나오는 소리만 감돌았다.

[SECTOR 01: SUB-LEVEL MAINTENANCE TUNNEL]

[ENVIRONMENTAL TEMPERATURE: 4.2°C / HUMIDITY: 12%]

[INTERNAL POWER: AUXILIARY EMERGENCY MODE]

이안은 허리춤의 전술 플래시 조도를 최저로 낮추고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레일거너의 총구가 조용히 어둠을 훑었다. 바로 뒤를 따르는 리아의 지팡이 끝에서 은은한 마정석 불빛이 피어올라 금속 벽면을 비추었다.

둥... 둥... 둥...

30초 주기로 울리는 본선의 융합로 맥동 펄스는 지하로 내려갈수록 한층 더 육중해졌다. 금속 통로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하며 이안의 장갑 낀 손끝에 선연한 잔향을 전했다.

"지상의 숲은 온화하고 생명력이 넘쳤는데 지하 통로는 얼음처럼 차갑군요."

리아가 긴장한 표정으로 쇄골 근처까지 로브를 여미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안은 단말기 스크린을 주시한 채 고개를 살짝 저었다.

"지상의 바이옴 식물군은 테라포밍 생태계입니다. 반면 이 지하 통로는 개척선 동력부와 직접 연결된 메인 정비 구역입니다. 본선 코어를 보호하기 위해 극저온 냉각 장치가 상시 가동 중인 겁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하 50미터 지점에 위치한 1차 차폐문 상단에서 주황색 비상 경고등이 요란하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치지직-

오랜 시간 멈춰 있던 회로가 억지로 가동되는 기분 나쁜 전자기 마찰음이 통로 전체에 울려 퍼졌다. 벽면 하단과 천장 수송 레일에 마그네틱 플러그로 고정되어 있던 금속 구체 세 개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ALERT: UNAUTHORIZED INTRUDER DETECTED]

[SECURITY SENTINEL MODEL-4: ENGAGING THREAT PURGE PROTOCOL]

금속 구체 중앙에서 붉은 센서 안구가 켜졌다. 수천 년 동안 동면 모드에 들어갔던 고대 인류의 자동 경비 병기들이 침입자를 제거하기 위해 일제히 깨어난 것이었다.


경비 센티널 3대가 일제히 기동하며 기체 하단에서 플라스마 발사구와 고주파 레이저 날을 펼쳤다.

슈아아악!

붉은 궤적의 고주파 레이저 사선이 칠흑 같은 통로를 갈랐다. 이안은 리아의 어깨를 낚아채며 반사적으로 측면 정비 홈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가 서 있던 티타늄 바닥재가 레이저에 닿아 검게 그을리며 붉은 불꽃을 튀겼다.

"이건 성도의 마법이 아니에요! 기계가 빛을 쏘아내고 있어요!"

리아가 놀란 눈으로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이안은 전술 슈트의 회로 출력을 120%로 올려 반응 속도를 극대화했다.

"아르카디아 본선 하부 보안 경비 드론입니다. 외부 생체 반응을 침입자로 규정했습니다!"

이안은 허리춤에서 비살상 EMP 충격탄을 꺼내 레일거너 전면 슬롯에 장착했다. 개척선의 자산인 방어 기체를 완전히 파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사선 밖으로 구르며 전술 탄환을 뿜어냈다.

콰아앙!

강렬한 전자기 충격파가 공중을 찢었다. 선두에서 접근하던 경비 드론 한 대가 자세를 잃고 흔들렸지만 나머지 두 대는 기체 표면의 전자기 차폐막을 펼치며 계속해서 이안을 향해 좁혀왔다. 드론의 레이저 발사구가 붉은빛을 모으며 2차 사격을 준비했다.

"제 뒤로 서세요, 이안 님!"

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주문을 외우자 지팡이 끝에서 푸른빛 바람 결계가 겹겹이 피어올랐다.

[AETHER REFRACTION SHIELD]

센티널들이 쏘아낸 레이저 줄기가 리아의 마법 장막에 부딪히며 사방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물리적 에너지와 고밀도 마력이 충돌하면서 정비 통로 내부에 거대한 전자기 불꽃이 일었다.

"지금입니다!"

리아의 지원에 이안은 주저 없이 센티널의 사선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레일거너를 쏘는 대신 가장 가까운 경비 드론의 기체 상단으로 몸을 날렸다. 이안의 강철 전술 장갑이 드론의 장갑판 틈새를 움켜쥐었다.

이안은 허리춤의 전술 단말기 케이블을 뽑아 드론 하단의 정비 인터페이스 포트에 강제로 꽂아 넣었다.

[OVERRIDE CODE: SECURITY OFFICER LEVEL 2]

[USER: KANG IAN - IDENTIFIED]

스크린 위에 수많은 초록색 데이터 스트림이 번개처럼 흘러갔다. 이안은 전술 단말기 버튼을 내리누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보안관 강이안이다! 즉시 비상 경계 모드를 해제하고 대기 상태로 전환하라!"

위잉-

이안의 보안 승인 코드가 센티널의 메인 제어반에 침투하자 붉게 빛나던 렌즈 안구가 멈칫했다. 3초간의 팽팽한 시스템 동기화 끝에 센티널의 안구가 은은한 정온 푸른빛으로 바뀌었다.

[SECURITY OFFICER AUTHORIZATION CONFIRMED]

[STANDBY MODE ENGAGED]

공중에 떠 있던 센티널 3대가 일제히 플라스마 무장을 거두고 벽면 하단 레일로 천천히 후퇴했다. 기계들의 작동음이 고요해지자 통로 안에는 다시 긴장된 적막만이 흘렀다.

리아가 가쁜 숨을 내쉬며 지팡이를 내렸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수천 년 동안 이 아래를 지키던 무자비한 고대 기계들이... 당신의 말 한마디와 작은 단말기 신호에 침묵했군요."

"이 함선의 보안 담당관으로서 가진 정식 인가 덕분입니다. 기계들은 규정에 따라 상급 명령에 복종한 것뿐입니다."

이안이 단말기 케이블을 거두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함선 시스템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묵직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센티널들이 물러난 정비 통로 끝에는 두꺼운 수압식 차폐 격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안이 단말기 코드를 접촉시키자 묵직한 중저음과 함께 두 겹의 티타늄 격벽이 좌우로 갈라졌다. 격벽 너머로 펼쳐진 광경에 이안과 리아는 일시에 숨을 삼켰다.

그곳은 수천만 년 전의 기술력이 집약된 거대한 융합로 환풍 챔버였다.

높이 30미터가 넘는 아치형 천장 아래로 굵은 고전압 에너지 관로들이 핏줄처럼 얽혀 있었고 그 중앙에는 푸른 빛굴을 뿜어내는 광학 수신반이 우뚝 솟아 있었다. 30초 주기로 숲을 흔들던 전자기 맥동의 진원지가 바로 이곳이었다.

그리고 그 광학 수신반 바로 앞에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은은한 푸른 잔향을 뿜어내는 긴 은발. 사흘 전 고대 정비 해치를 통과해 지하로 진입했던 정체불명의 소녀 Subject A-09였다.

소녀는 단말기 제어반에 한쪽 손을 올린 채 붕괴 직전의 에너지 수신반을 억제하고 있었다. 격벽이 열리는 소리에 소녀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은빛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이안과 리아를 향했다. 소녀의 가슴팍에는 은색 나비 펜던트가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A-09."

이안이 레일거너의 총구를 바닥으로 내리고 천천히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경계할 필요 없다. 우리는 너를 해치러 온 것이 아니다."

소녀는 은색 나비 펜던트를 꼭 쥔 채 경계심 어린 눈으로 이안의 전술 슈트를 바라보았다. 리아가 지팡이를 거두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무서워하지 말아요. 우리는 당신의 궤적을 쫓아 여기까지 내려온 학자와 보안관이에요."

이안은 전술 단말기의 파형을 소녀가 가진 펜던트의 비상 수신 주파수와 동기화시켰다. 단말기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온 주황색 광선이 공기를 지나 소녀의 은색 나비 펜던트에 닿았다.

삐리리릭-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단말기 신호를 수신한 소녀의 긴 은발 머리카락 끝이 양자 광섬유처럼 투명해지며 은은하고 영롱한 푸른빛을 불꽃처럼 피워올렸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고대 전자기 파형을 전송하는 광학 신경망으로 변해 환하게 빛나는 것이었다.

"아..."

리아가 탄성을 터뜨렸다. 단순한 은빛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초고도 문명 시절 함선 메인 AI 세라프 및 아르카디아 코어망과 직접 신경망을 동기화하기 위해 합성된 생체 양자 광선 유전체였다.

소녀는 자신의 은발이 빛나는 것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안의 단말기에서 흘러나오는 신호가 자신이 오래전부터 기억하고 있던 개척선 아르카디아의 정식 보안 주파수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소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르카디아... 보안관..."

서툴고 맑은 음성이 수신반 챔버 안에 울려 퍼졌다. 고대 인류의 정식 언어 표음식 발음과 현지 왕국의 언어가 기묘하게 섞여 있었다.

"응답... 확인... 인가 코드... KANG IAN."

"내 이름을 알고 있나?"

이안의 물음에 소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은색 나비 펜던트를 가리키며 나직하게 말을 이어갔다.

"세라프의... 기록 데이터... 보안관 강이안. 딥 슬립 개척대... 2급 관재관."

리아가 소녀에게 다가가며 다정한 눈빛으로 물었다.

"너는 사흘 전 왜 혼자 이 차갑고 위험한 지하 유적으로 들어온 거니?"

소녀 A-09는 은색 머리카락을 파르르 떨며 상부 벽면을 가리켰다.

"위험... 위험해요. 위의... 인간들. 붉은 로브를 입은 자들..."

소녀의 찌푸린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은 융합로 광학 수신반 상단에 강제로 뚫려 있는 기묘한 금속 파이프관들이었다.

그것은 고대 인류의 정식 규격품이 아니었다. 성도 마도학회가 신의 마력을 강제로 추출하기 위해 융합로 보조 배선관을 기계적으로 뚫고 연결한 비인가 마동 추출관이었다.

"추출... 강제 추출... 87% 임계점."

이안이 단말기를 융합로 출력 제어반에 대고 정밀 스캔을 실행했다. 스크린 위에 핏빛 알림창이 실시간으로 떠올랐다.

[WARNING: UNAUTHORIZED MANA SIPHONING DETECTED]

[AUXILIARY CORE OVERHEAT: CRITICAL WARP 87%]

[AUTOMATIC PURGE SYSTEM COUNTDOWN: 72 HOURS]

이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성도 마도학회가 신의 은혜이자 축복이라 부르던 마력의 추출 방식은 융합로의 안전 장치를 무시한 채 에너지를 강제로 쥐어짜 내는 흉포한 범죄였다. 이대로 마력을 계속 추출한다면 사흘 뒤 아르카디아 메인 코어가 대폭발을 일으키거나, 함선 메인 AI 세라프의 자동 위협 제거 프로토콜이 가동되어 성도 루미나르 분지 전체가 지표면에서 증발할 위기였다.

A-09 소녀는 지금까지 혼자서 융합로 수신반 자리에 남아 마학회의 무단 추출로 발생하는 과부하 열각을 자신의 생체 제어 권한으로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소녀 혼자서 이 거대한 폭발 위험을 막아내고 있었던 겁니다."

이안의 나직한 일갈에 리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리아의 눈에 거친 분노와 깊은 부끄러움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마도학회 상층부가... 학문의 발전과 신의 축복이라는 명목으로 성도 전체를 폭탄 위에 올려놓고 있었단 말인가요?"

소녀 A-09가 이안의 전술 장갑 낀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펜던트에 장착되어 있던 차가운 청색 데이터 칩 하나를 이안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STABILITY CORE PROTOCOL CHIP]

"코어실... 최심부 SECTOR 01. 추출관을... 차단해야 해요. 세라프가... 깨어나기 전에."

소녀의 진심 어린 호소와 눈빛에 이안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데이터 칩을 전술 단말기에 수용하며 레일거너를 굳게 고쳐잡았다.

"걱정 마라, A-09. 내가 이 함선의 보안관이다. 본선 융합로와 너를 이 위험에서 구해주마."

리아 역시 지팡이를 틀어쥐며 소녀를 향해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나도 함께하겠어요. 우리 학회의 그릇된 욕망이 이 세계를 파멸시키게 둘 수는 없으니까요."

그 순간 상부 지하 정비 계단 너머에서 강렬한 마력 반응과 함께 묵직한 군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도 마도학회 최고위 특무대의 추적 장치가 기동하는 소리였다.

이안은 레일거너의 안전장치를 풀고 어둠 너머 상부를 향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손님이 너무 일찍 찾아왔군요. 최심부 코어로 이동합니다."

은발 소녀의 머리카락이 푸른 광채로 더욱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고 삼인은 성도 최심부를 향해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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