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15화: 숲속의 고요
석양이 완전히 기울고 루미나르 분지 전체에 짙은 푸른빛 야경이 흘러들었다.
산악 도로를 빠져나온 중장갑 수송 마차는 원형 분지 외곽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거목 숲에 다다랐다. 웅장한 석조 성벽 너머로 수천 년 묵은 고목들이 빽빽하게 이어져 있었지만 숲에서는 미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수목의 잎사귀 하나 흔들리지 않았고 밤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기이한 적막이 대지를 덮고 있었다.
"이곳이 루미나르 성도를 둘러싼 '고요의 숲'이에요."
마차 창밖을 바라보던 리아 벨렌이 목소리를 줄이며 나직하게 설명했다.
"성도가 세워지기 먼 옛날부터 존재했던 숲인데 소음과 왜곡된 마력을 스스로 흡수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마도학회에서는 이 숲을 신성한 성림으로 보호하고 있죠."
이안은 허리춤의 전술 단말기를 내리눌러 스캐너를 가동했다. 스크린 위에 주황색 분자 구조선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ENVIRONMENTAL SCAN: GAIA BIO-SHIELD]
[ECO-FILTRATION SYSTEM LEVEL 4 CONFIRMED]
[ATMOSPHERIC PURIFICATION / MANA WAVE DAMPENING DENSITY: 98.7%]
자연적인 숲이 아니었다. 수천만 년 전 고대 인류가 지구 지표면 테라포밍 당시 방사성 물질과 이상 대기 유해 물질을 차단하기 위해 합성한 생태 차단막 시스템이었다. 거대한 바이옴 식물군이 이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문명의 왜곡을 흡수하며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온 것이었다.
"자연의 은혜가 아니라 고대 인류의 대기 정화용 생태 숲입니다."
이안의 차분한 단정에 리아는 눈을 곱게 접으며 작게 혀를 내둘렀다.
"당신은 성도의 신성한 전설조차 한순간에 기계 장치의 기록으로 만들어 버리는군요."
그때 마치가 끼에익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성도 루미나르 외곽 검문소였다.
검문소 주변에는 붉은 로브를 둘러쓴 마도학회 심문관들과 중장갑을 갖춘 성도 수비대원들이 겹겹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보랏빛 마정석이 박힌 감지 척후석이 들려 있었고 입성하는 모든 마차와 승객들을 향해 마정석을 내밀며 정밀 검문검색을 진행했다.
"다음 마차! 승객 전원은 내려서 소지품을 제시하라!"
마차 문이 열리고 호위 기사의 안내에 따라 이안과 리아, 그리고 상인들이 바닥으로 내렸다.
붉은 로브를 깊게 뒤집어쓴 상급 심문관 카엘라가 묵직한 마정석 척후석을 든 채 다가왔다. 카엘라의 눈빛은 칼날처럼 차가웠고 입성하는 외지인들을 향한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부 산악 도로를 넘어온 수송 마차인가."
카엘라가 척후석을 내밀어 승객들을 스캔하던 중 이안의 앞을 지나는 순간이었다.
삐이이이-!
척후석 내부의 붉은 마정석이 격렬하게 요동치며 날카로운 경보음을 뿜어냈다. 척후석 광선이 이안의 칠흑 같은 전술 슈트와 전술 가방에 부딪히며 불꽃을 일으켰다.
"이상 이종 파형 감지! 비인가 마도 장치 소지자다!"
순식간에 주변 성도 수비대원 십여 명이 긴장한 채 장검과 마도 창을 내지르며 이안을 둘러쌌다.
"동요하지 마라!"
카엘라가 손을 들어 대원들을 제지한 뒤 이안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너는 누구냐. 성도 마도학회의 허가를 받지 않은 괴이한 장비를 몸에 두르고 있구나. 당장 무기를 내려놓고 지하실 심문실로 이동한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리아가 이안의 앞을 막아서며 품에서 은색 인장을 내보였다.
"거두어 주십시오, 심문관님. 저는 성도 마도학회 3급 조사학자 리아 벨렌입니다. 이분은 제가 서부 유적지 조사를 위해 정식으로 고용한 특수 호위원이자 고대 언어 해석관입니다."
"3급 학자 리아 벨렌?"
카엘라가 인장을 확인하고 눈을 찌푸렸다. 리아가 아이언월 관문 수비대장 베른의 친필 통과 서한을 내밀었다.
"아이언월 관문 대장 베른 님의 확인을 받은 신원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가지고 온 것은 위험한 무기가 아닙니다."
이안이 전술 가방에서 산악 도로 습격자들에게서 압수한 검은 수정 펜던트를 꺼냈다. 전술 슈트의 회로를 억제하여 단말기 신호를 숨긴 채 펜던트를 카엘라에게 내밀었다.
"산악 도로에서 수송 마차를 기습한 습격자들에게서 수거한 유물 파편입니다. 고대 회로 칩을 오염된 마력으로 강제 과부하 걸어 무기화한 흔적이 있더군요."
카엘라가 펜던트를 낚아채 정밀 스캔하자 척후석의 불빛이 검붉게 변했다. 카엘라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건... 암시장에서 유통되는 오염된 마핵 회로 파편이다. 성도 외부까지 이 물건이 유출되었단 말인가?"
"성도 마도학회의 보수적인 기술 통제에도 불구하고 지하 암시장 세력이 고대 유산을 위험하게 무기화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그 유출 경로를 추적하여 보고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이안의 차분하고 논리적인 설명에 카엘라의 경계심이 점차 약화되었다. 카엘라는 펜던트를 보관함에 넣은 뒤 이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좋다. 학회 인장과 베른 대장의 서한을 참작하여 조건부 입성을 승인한다. 하지만 명심해라, 외지인. 성도 중앙의 SECTOR 01 유적군과 '세라프의 성소'는 마도학회 최고위 의회의 절대 봉인 구역이다. 그 주변에 발을 들이는 순간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즉형 처형이다."
검문소를 통과한 수송 마차가 성도 루미나르 내부의 웅장한 석조 대로에 들어섰다.
성도는 화려함과 고대의 그늘이 공존하는 기묘한 도시였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은빛 마법 탑들과 웅장한 석조 궁전들이 늘어서 있었지만 도시 중앙부로 갈수록 높고 두꺼운 티타늄 합금 융기층과 거대한 원형 분구 외벽이 도시를 짓눌러 덮고 있었다.
이안과 리아는 마차에서 내려 성도 중앙에 위치한 공공 생태 보호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도 내부에도 '고요의 숲'의 일부가 마치 신성한 정원처럼 보존되어 있었다.
밤이 깊어가자 숲속은 사위가 완전한 정적에 휩싸였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조용한 수목 사이로 달빛이 은은하게 내리쬐었다.
이안은 허리춤의 전술 단말기를 내리누르고 저주파 전자기 스캐너를 가동했다.
[SCANNING SUBTERRANEAN SIGNALS...]
[TARGET LOCK: SECTOR 01 CORE ACCESS PORTAL]
[DISTANCE: 120M / DIRECTION: DOWNWARD]
"이쪽입니다."
이안이 숲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리아가 지팡이를 틀어쥐고 학회 감시원들의 전파 반응을 살피며 이안의 뒤를 바짝 쫓았다.
거대한 바오밥나무 형태의 고대 수목들이 우거진 숲의 중심부에 도달하자 대지 위로 굵은 뿌리들이 얽혀 있었다. 이안은 무릎을 꿇고 뿌리 사이에 덮인 이끼와 흙을 털어냈다.
그러자 차가운 칠흑색 티타늄 탄소관 합금 해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해치 상부에는 읽기 힘든 고대 영문 표식이 돋아나 있었다.
[SUB-LEVEL ACCESS 07]
[PROJECT GAIA - EMERGENCY MAINTENANCE PORTAL]
"고대 정비 해치입니다."
이안이 단말기 스캐너를 해치 가장자리에 대자 스크린에 굵은 노란색 알림이 떠올랐다.
[RECENT ACCESS LOG FOUND]
[USER: SUBJECT A-09]
[TIMESTAMP: 72 HOURS AGO - BIOMETRIC MATCH 99.8%]
리아가 스크린의 로그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 은발 소녀가 사흘 전 이 해치를 통해 성도 지하로 들어갔군요. 마도학회의 겹겹이 쌓인 마학 결계를 전혀 건드리지 않고 고대 관리 권한으로 유유히 지나간 거예요."
"A-09는 고대 인류 생체 적응 실험체입니다. 이 시설 전체가 소녀에게는 자신의 집과 다름없을 겁니다."
이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안은 전술 단말기의 보안 승인 코드를 해치 제어반에 접촉시켰다.
위잉-
묵직한 금속 마찰음과 함께 칠흑색 해치가 부드럽게 진동하며 수평으로 갈라졌다.
그 순간 숲 전체를 흔드는 나직한 전자기 잔향이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둥... 둥... 둥...
30초 간격으로 정확하게 맞춰진 울림이었다. 대지가 미세하게 진동했고 숲속의 고요함 속에서 그 소리는 마치 거대한 거인의 심장박동처럼 귓전을 울렸다.
[ARCADIA CORE HEARTBEAT DETECTED]
[MAIN FUSION REACTOR: DORMANT SUSTAINING MODE]
"이 소리는... 마력이 아니에요."
리아가 손으로 가슴을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
"성도 마도학회가 '세라프의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신의 축복이라 부르던 마력의 파동이에요. 매일 밤 성도 지하에서 울려 퍼지던 그 신성한 울림이... 정말로 당신들의 함선 동력원이었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이안이 지하 계단을 내려다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초장거리 개척선 아르카디아의 메인 융합로와 함선 AI 코어가 성도 지하 깊은 곳에 매몰된 채 최소 가동 유지 모드로 버티고 있는 겁니다. 마도학회가 신의 은혜라 믿는 마력은 본선 융합로에서 누출되는 고밀도 미세 전자기 에너지입니다."
신화와 마법으로 포장된 성도 루미나르의 진실. 현지 문명이 신으로 숭배하던 존재는 수천만 년 전 인류가 만들어낸 초고도 인공지능 세라프였고, 마력의 근원은 땅속에 묻힌 개척선의 하부 융합로였다.
저 멀리 성도 중앙 탑에서 야간을 알리는 묵직한 둔종 소리가 세 번 울려 퍼졌다. 학회의 감시망이 가장 느슨해지는 밤의 한가운데였다.
"내려갑니다, 리아."
이안이 레일거너의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전술 플래시의 조도를 낮추었다.
"지하 깊은 곳에서 아르카디아의 코어와 은발 소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안은 칠흑 같은 지하 정비 계단 속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고요의 숲'의 적막을 뒤로한 채 이안과 리아의 형체가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