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14화: 아르카디아의 보안관
새벽안개가 아이언월 관문의 묵직한 석벽을 핥고 지나갔다.
관문 내부 서기실을 나선 강이안과 리아 벨렌은 기사단의 안내를 받아 국경 수송 마차 정류장으로 향했다. 성도로 가는 중장갑 수송 마차는 굵은 통나무와 철판을 덧대 만든 거대한 구형 육륜 마차였다. 마차를 이끄는 여섯 마리의 갈기말들은 마력이 깃든 고삐에 매여 차분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리아 학자님."
수비대원 하나가 정중하게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이안은 허리춤의 전술 단말기를 슬며시 더듬은 뒤 마차 내부로 발을 들였다. 마차 안에는 이미 현지 상인 둘과 서부 마학회 소속의 젊은 마법사 한 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안의 칠흑 같은 전술 슈트와 무기 가방을 본 승객들의 눈빛이 순간 경계로 경직되었으나 리아가 은색 인장을 내보이자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덜컹.
묵직한 철제 관문이 위로 솟구치며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티타늄 탄소관 강철 골조를 덮은 석조 성벽을 지나자 험준한 산악 도로가 눈앞에 펼쳐졌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은 경이로우면서도 기묘했다. 깎아지른 바위 절벽 아래로 흐르는 강줄기 옆에는 수천만 년의 세월 동안 이끼와 흙에 파묻힌 거대한 금속 관로들이 돋아나 있었다.
"보입니까?"
이안이 밖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저 강줄기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계곡이 아닙니다. 지구 시절 지표면 테라포밍용 대형 수로 튜브가 파손되면서 흘러나온 물길입니다. 대지가 문명의 유산 위에 다시 뿌리를 내린 겁니다."
리아가 차창 밖의 이끼 덮인 배관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당신의 눈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고대 문명의 유적으로 보이는군요. 하지만 마도학회 고위층의 생각은 다릅니다. 성도는 대륙의 마력 노드가 집중된 거점이자 마도학회의 본산이에요."
리아가 목소리를 낮추며 이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성도 중앙에 위치한 '세라프의 성소' 주변은 학회 의회의 허가 없이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어요. 이안 당신이 소지한 기계 장치와 파형이 성도 검문소에 포착되면 학회의 정밀 심문관들이 당장 당신을 억류하려 들 겁니다."
"상관없습니다."
이안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빛났다.
"억류든 심문이든 피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그 전에 내가 찾아야 할 단서와 목표가 분명할 뿐입니다."
마차가 산악 도로의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덜컹거리며 올라갔다. 승객들이 하나둘 졸음에 빠져들자 이안은 허리춤의 전술 단말기를 내리누르고 스크린을 켰다.
초미세 홀로그램 스크린 위에 조금 전 포착되었던 암호화 주파수의 로그 데이터가 떠올랐다.
[CARRIER FREQUENCY DETECTED: ARCADIA MAIN SHIP - EMERGENCY BROADCAST]
[TIMESTAMP: 08:14:02]
[SIGNAL TYPE: ENCRYPTED PULSE PING]
단순한 전자기 잔향이 아니었다.
이 신호는 초장거리 개척선 아르카디아의 메인 함교에서 발신되는 최고 등급 비상 핑 주파수였다. 0.1초의 짧은 스침이었지만 수신된 코드에는 아르카디아 탐사대의 암호화 맹약 인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아르카디아 본선은 파괴되지 않았다.'
이안의 가슴 밑바닥에서 뜨겁고 둔탁한 무언가가 요동쳤다.
28세. 아르카디아 탐사대 보안팀장 강이안.
개척선이 지구 궤도의 도킹 베이를 떠나 미지의 외우주를 향해 출항하던 날이 떠올랐다. 수석 연구원 이선아와 백여 명의 간부 승무원들이 동토의 딥 슬립 캡슐에 들어가기 전, 보안관 이안의 손을 잡으며 남겼던 맹세가 귓가를 스쳤다.
'이안 팀장님. 탐사선과 5만 명의 냉동 수면 승무원들의 생명은 당신과 보안팀의 어깨에 달렸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선체 코어를 지켜주십시오.'
차가운 정적 속에서 수십 년간 지속된 동면. 그리고 눈을 떠 마주한 것은 외계 행성이 아닌 수천만 년 뒤의 황폐해진 지구였다.
동료들은 어디로 갔는가. 함선은 어느 지하 깊은 곳에 묻혀 있는가.
이안은 레일거너 권총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그는 단순한 생존자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아르카디아의 보안관이었고 5만 명의 승무원과 인류의 유산을 지켜내야 할 임무를 짊어진 파수꾼이었다.
'Subject A-09, 은발 소녀 역시 아르카디아 본선의 반응을 따라 성도로 향하고 있다. 본선의 핑 주파수와 소녀의 이동 궤적이 성도 지하 코어로 귀결된다.'
그때였다.
투콰아앙!
마차 바깥에서 벼락이 치는 듯한 폭음과 함께 수송 마차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크악!"
"적의 습격이다! 기사단, 무기를 들어라!"
외부 호위 기사들의 고함과 함께 마차가 급정거했다. 갈기말들의 광란 어린 비명과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산악 도로 전체를 흔들었다.
이안은 즉시 전술 단말기의 스캐너를 가동했다.
[WARNING: HOSTILE SIGNAL DETECTED]
[TARGET COUNT: 8]
[WEAPON PATTERN: CORRUPTED ANCIENT CIRCUITRY]
마차 창문이 깨져 나가며 검은 로브를 둘러쓴 습격자 셋이 마차 안으로 장검을 찔러 넣었다. 검날 끝에는 보랏빛으로 변질된 기괴한 마력이 일렁이고 있었다.
"학회의 조사관과 이상 외지인을 붙잡아라! 유적의 열쇠를 바쳐라!"
상인들과 젊은 마법사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어졌다. 습격자들의 목표는 리아가 가진 유적 조사 기록과 이안의 전술 장비였다.
"리아, 바닥에 엎드리세요!"
이안은 리아의 어깨를 눌러 앉히며 허리춤에서 섬광-최루 펄스 캡슐을 꺼냈다. 마차 내부의 좁은 공간에서 총기를 난사하면 무고한 승객들이 휘말릴 수 있었다.
이안은 캡슐의 핀을 뽑아 마차 밖으로 던진 뒤 단말기로 신호를 보냈다.
콰아아앙!
강렬한 백색 전자기 섬광과 함께 고주파 압축 음파가 밖으로 터져 나갔다. 마차 외부를 둘러싸고 있던 습격자들이 눈을 감싸 쥐며 비틀거렸다.
"지금입니다, 리아! 마차 외벽에 바람 장막을!"
리아가 지팡이를 내질렀다.
"돌풍의 장막!"
투명한 바람의 결계가 마차 사방을 둘러싸며 습격자들이 던진 오염된 단검들을 튕겨 냈다.
이안은 마차 문을 차고 뛰어나갔다. 그의 몸이 흑색 전술 슈트의 회로와 반응하며 차갑게 고속 이동을 시작했다.
슈우웅!
이안은 레일거너를 저출력 둔화 펄스로 전환했다. 치명상을 주지 않고 적들의 신경계를 순간적으로 마비시키는 보안관 특수 제압 모드였다.
탕! 탕!
푸른 에너지 펄스가 습격자들의 어깨와 무릎을 정확히 타격했다. 습격자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관절이 꺾이며 바닥에 쓰러졌다.
두 명의 약탈자 두목이 오염된 마학 지팡이를 쳐들고 이안을 향해 검은 불꽃을 쏘아 올렸다. 하지만 이안은 차갑게 몸을 비틀어 화염을 피한 뒤 적의 턱 밑으로 레일거너 손잡이를 꽂아 넣었다.
퍽!
마지막 습격자가 기절하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불과 30초 만에 여덟 명의 습격자가 완벽하게 무력화되었다.
산악 도로에는 짙은 고요가 내렸다.
피를 흘리지 않고 적들을 완벽하게 제압한 이안의 모습을 본 호위 기사들은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수비대장 베른이 말했던 '신속하고 통제된 무력'의 실체를 눈앞에서 확인한 순간이었다.
이안은 무릎을 꿇고 쓰러진 습격자 두목의 가슴 팍을 수색했다.
그의 손에 쥐인 것은 검은 수정으로 만들어진 펜던트였다. 하지만 이안이 단말기 분해 센서로 정밀 스캔하자 수정 내부의 실체가 밝혀졌다.
[COMPONENT ANALYSIS: ANCIENT MICRO-CIRCUIT CHIP]
[STATUS: SEVERELY CORRUPTED / OVERCLOCKED]
고대 인류의 마이크로 회로 칩이었다. 누군가 유적에서 굴착한 고대 전자 회로를 오염된 마력으로 강제 과부하를 걸어 무기화한 흔적이었다.
리아가 이안 곁으로 다가와 검은 수정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암시장 유적 암거래상들이 사용하는 오염된 마정석이에요. 마도학회 내부에서 유출된 유물 파편이 틀림없어요."
"성도 내부의 누군가가 고대 기술 파편을 무분별하게 개조해 암시장에 뿌리고 있는 겁니다."
이안이 펜던트를 수거해 전술 가방에 넣으며 차갑게 말했다.
"단순한 도굴꾼이 아닙니다. 성도 마도학회 고위층이나 지하 세력이 고대 유산을 위험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호위 기사들이 쓰러진 약탈자들을 결박하여 후송 마차에 실었다. 기사단장이 이안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이안 님, 당신의 눈부신 제압술이 없었다면 모두의 목숨이 위험했을 겁니다. 감사드립니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안은 차분하게 대답하며 다시 수송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산등성이를 넘어 마침내 루미나르 성도가 위치한 거대한 원형 분지 입구에 들어서자 석양이 대지를 붉게 물들였다.
수평선 너머로 거대한 판타지풍의 석조 성채들과 마법 탑들이 우뚝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웅장한 도시의 하부에는 수천만 년 전 고대 인류 문명의 직경 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원형 구조체 유적(SECTOR 01)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치직.
이안의 전술 단말기가 반응했다.
성도 중앙 지하 깊은 곳에서 아르카디아 본선의 비상 펄스 잔향이 또렷하게 공명해 오기 시작했다.
A-09 은발 소녀가 걸어 들어간 성도 지하 코어, 그리고 살아 숨 쉬는 개척선의 진실.
이안은 성도의 검문소를 바라보며 눈빛을 정돈했다. 개척선 아르카디아의 보안관으로서 그는 이제 문명의 중심부 속으로 발을 내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