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13화

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13화: 첫 번째 접촉

분지 암벽 지대를 빠져나오자 바위산의 험준한 능선이 사방으로 펼쳐졌다.

암갈색 절벽 사이로 길게 뻗은 협곡 끝에는 거대한 관문 요새가 서 있었다. 높이 십 미터가 넘는 투박한 석조 성벽은 겉보기에 평범한 영주의 관문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안의 전술 단말기 센서에는 석벽 하부에 깔린 아치형 정문 기둥의 특이한 밀도가 선명하게 잡혔다.

"보입니까?"

이안이 협곡 능선 바위 그늘에 몸을 숨긴 채 단말기 화면을 가리켰다.

"저 성벽 기둥의 하부는 돌이 아닙니다. 티타늄 강철 복합 장갑재입니다. 후대의 주민들이 고대 시설의 외벽 구조체 위에 돌을 쌓아 관문을 만든 겁니다."

리아 벨렌은 지팡이를 짚은 채 이안 곁에 쪼그려 앉아 관문 요새를 바라보았다. 성벽 위에는 깃발을 든 루미나르 왕국 기사단의 파수병들과 마도학회의 깃발이 함께 나부끼고 있었다.

"아이언월 관문이에요."

리아가 목소리를 낮춰 설명했다.

"왕국 동부 경계를 지키는 핵심 보루이자 현자의 탑 분지로 들어가는 입구를 통제하는 곳이죠. 마도학회 조사단과 국경 기사단이 공동으로 수비하고 있어요."

리아의 시선이 이안의 흑색 전술 슈트와 허리춤의 레일거너 권총으로 향했다.

"이안 당신의 차림새는 이곳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이질적이에요. 게다가 최근 유적지마다 이상 마나 반응이 폭주해서 왕국 전역에 비상 경계령이 내려진 상태거든요. 무작정 다가가면 정찰병들이 유적 도굴꾼이나 이단 마법사로 오인해 공격할 수도 있어요."

"우선 대화로 풀겠습니다."

이안은 데이터 프로브를 단말기에 납착하며 수신 상태를 점검했다.

"은발 소녀, 즉 A-09의 이동 전파 신호가 정확히 저 관문을 통과해 왕국 성도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아이를 추적하려면 우리 역시 저 관문을 지나야 합니다."

"제가 앞장서겠어요."

리아는 품속에서 마도학회가 발급한 은색 금속 인장을 꺼내어 쥐었다.

"저는 왕국 마도학회 정식 승인 학자입니다. 제 신원을 제시하고 이안 당신을 내 유적 조사 호위 기사로 소개하면 통과할 수 있을 거예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협곡 능선을 내려와 조심스럽게 관문 정문으로 향했다.


"거기 멈춰라!"

정문 근처에 다다르자 성벽 위에서 쇠사슬 당기는 소리와 함께 강철 화살을 장전한 석궁병들이 쇄도했다.

성문이 무겁게 열리며 은빛 갑주를 입은 기사들과 붉은 법복을 입은 마법사 한 무리가 걸어 나왔다. 선두에 선 남자는 턱수턱수한 수염을 기른 단단한 체구의 중년 기사였다. 그의 손에 쥐인 장검에는 붉은 마력이 희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아이언월 관문 수비대장 베른이다."

기사단장 베른이 이안과 리아를 가로막으며 차갑게 선언했다.

"분지 방향은 마수 변이와 유적 폭주로 통행이 전면 금지되었다. 방랑 마법사와 신원 불명의 자여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어라!"

리아가 지팡이를 세우고 품속의 은색 인장을 앞으로 내밀었다.

"베른 대장님, 정중히 예를 갖춥니다. 저는 성도 마도학회 3급 조사학자 리아 벨렌입니다. 분지 외부 노드 유적 조사를 마치고 복귀하는 길입니다."

베른의 눈동자가 리아가 내민 인장을 향했다. 마학회 특유의 마나 문양이 새겨진 인장을 확인한 베른의 표정이 약간 완화되었지만 이안을 향한 경계심은 더욱 짙어졌다.

"리아 학자라... 학회의 신원은 확인되었소. 하지만 그 곁의 남자는 누구요? 기사단의 어떤 가문 엠블럼도 없고 마법사의 로브도 입지 않았군. 저 칠흑 같은 괴상한 복장과 허리춤의 쇠붙이는 무엇이란 말이오?"

베른 뒤에 서 있던 마학회 조사관이 장대를 들어 이안 쪽을 향해 마력 감지석을 내밀었다. 그러자 감지석이 삐이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붉은 불빛을 뿜었다.

"대장님! 저 자의 소지품에서 마학회에 등록되지 않은 기괴한 고주파 파형이 감지됩니다! 마법이 아닌 미지의 에너지 반응입니다!"

마법사들이 지팡이를 높이 쳐들고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순간 주변 대기가 차갑게 경직되었다.

이안은 손을 올린 채 레일거너에서 손을 떼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적이 아닙니다. 저는 리아 학자의 안전을 책임지는 계약 호위원입니다. 이 장비들은 고대 유적 잔해에서 수습한 기계식 단말 장치일 뿐입니다."

"거짓말 마라!"

마학회 조사관이 소리쳤다.

"고대 유적의 장치를 사사로이 소지하고 동작시키는 것은 왕국 금서법 위반이다! 무기를 차출하고 당장 감금해 조사해야 한다!"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돌았다. 기사들이 검을 쥐고 다가오는 순간 협곡 위쪽 숲에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쿠쿠쿠쿵!

바위산 전체가 진동하며 협곡 숲의 나무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마수다! 숲 쪽에서 마수 떼가 몰려온다!"

성벽 위의 파수병이 비명을 질렀다. 짙은 보랏빛 안개와 함께 온몸에 붉은 회로선이 돋아난 기형 마수 십여 마리가 협곡을 따라 쇄도했다. 늑대의 형상이었지만 주둥이에서 고주파 음파가 뿜어져 나오는 변이 마수들이었다.

시아아아앙!

마수들이 동시에 지른 고주파 비명이 공기를 찢었다.

"으악!"

성벽 앞 마법사들이 귀를 막고 비틀거렸다. 관문을 지키던 마나 방어 장막이 고주파 공명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기사들 역시 이명이 솟구치자 검을 놓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음파 공명 공격입니다!"

리아가 지팡이를 내질러 바람 장막을 쳤지만 마수들의 음압을 완전히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안의 전술 단말기 스크린이 급격하게 붉은색으로 번뜩였다.

[WARNING: HIGH-FREQUENCY ACOUSTIC RESONANCE DETECTED]

[TARGET WAVE PATTERN: NODE 04 SIGNAL OVERLOAD]

"이 마수들은 야생 상태가 아닙니다."

이안의 눈빛이 차갑게 굳어졌다.

"외부 노드 04에서 발생한 비상 통신 신호에 뇌파가 고정되어 발작을 일으키는 겁니다!"

이안은 빠르게 허리춤에서 전술 펄스 탄환 소형 캡슐을 꺼냈다. 단말기의 주파수를 마수들의 음파 역상으로 설정한 뒤 관문 전방 공중을 향해 투척했다.

"리아! 캡슐이 터지는 순간 전격 주문을 상공으로 쏘세요!"

"알았어요!"

이안이 레일거너를 들어 공중의 펄스 캡슐을 향해 저출력 펄스를 발사했다.

탕!

지잉!

공중에서 무음의 진동파가 뿜어져 나오며 마수들의 고주파 비명이 순간적으로 뚝 끊겼다. 마수들이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하며 땅바닥을 굴렀다.

그 직후 리아가 지팡이를 들어 올려 청백색 전격을 공중의 잔류 전하를 향해 내질렀다.

"방전 연쇄!"

쿠콰콱!

푸른 번개가 공중에서 사방으로 튀며 땅바닥에 엉켜 있던 마수 떼를 일제히 타격했다. 마수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전류에 감전되어 기절하거나 숲 뒤편으로 도망쳐 갔다.

불과 십여 초 만에 관문 앞을 습격했던 마수 떼가 완벽하게 무력화되었다.


협곡에는 고요가 찾아왔다.

관문 수비대장 베른과 병사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마법사들의 지팡이조차 둔하게 만드는 변이 마수를 단 두 번의 신속한 공격으로 제압한 신기(神技)였다.

베른이 붉은 마력이 스러진 장검을 검집에 꽂으며 이안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눈빛에는 이전의 경계심 대신 깊은 경외감과 신뢰가 서려 있었다.

"방금 그 무기는... 마법 주문이 아니었소. 소리도 없고 불꽃도 없는데 마수들의 머리를 짓눌렀단 말인가."

"고주파 공명을 상쇄하는 음향 음압 기법입니다."

이안이 차분하게 대답하며 레일거너를 집어넣었다.

"우리는 관문을 해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이 세계의 균형을 뒤흔드는 유적의 폭주를 막기 위해 이동 중입니다."

리아가 베른 대장 옆으로 다가섰다.

"베른 대장님. 이안은 제 목숨을 구한 은인이자 현자의 탑 유적의 이상 폭주를 가장 잘 이해하는 분입니다. 제가 모든 책임을 지고 학회에 보고하겠으니 통행을 허가해 주세요."

베른은 한참 동안 이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안의 단단한 눈빛에서 침략자나 거짓말쟁이의 둔탁함이 없음을 확인한 베른이 마침내 한숨을 내쉬었다.

"좋소. 당장 성도로 보내줄 수는 없지만 관문 내부 거류지에 머무는 것은 허가하겠소. 리아 학자의 인장과 방금 보여준 공로를 참작하는 것이오."

관문 철제가 둔중한 소리를 내며 위로 올려졌다.

이안과 리아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관문 성채 내부로 발을 들였다.

성벽 통로 내부로 들어서자 이안의 눈길이 거대한 아치형 천장을 향했다. 겉은 깎아지른 석재로 뒤덮여 있었지만 내부 골조는 인류의 고도 티타늄 탄소관 구조였다. 이 관문 전체가 수천만 년 전 고대 인류 연구 시설의 비상 관문이었던 셈이다.

이안이 베른 대장 옆을 걸으며 나직하게 물었다.

"대장님. 혹시 사흘 전쯤 이 관문을 지나간 은발의 어린 소녀를 본 적이 있습니까?"

베른이 걸음을 멈추고 이안을 돌아보았다. 베른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은발의 소녀라... 그 아이를 아는가?"

"추적 중입니다. 중요한 단서를 쥐고 있습니다."

"사흘 전 새벽이었지."

베른이 목소리를 낮추며 기억을 더듬었다.

"우리가 가동하는 마학 결계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소. 마치 환영처럼 경계 결계를 유유히 걸어서 지나간 은발 아이가 있었지. 파수병들이 쫓아갔지만 바람처럼 사라졌고 중앙 성도 유적군 방향으로 이동한 흔적만 남았소."

이안과 리아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Subject A-09, 은발 소녀는 인류 문명의 경계 시스템과 고대 결계에 등록된 생체 코드 덕분에 아무런 제약 없이 결계를 통과한 것이 확실했다. 소녀는 이미 이곳을 지나 루미나르 왕국 중앙 성도를 향해 가고 있었다.

"성도로 향하는 수송 마차가 내일 아침 출발하오."

베른 대장이 통행증 서류에 서명하며 말했다.

"그 마차에 두 사람의 자리를 마련해주지. 하지만 성도 마학회 본산에 도착하면 고위 학자들의 입회하에 조사를 받아야 할 것이오."

"감사합니다 대장님."

리아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서기실을 나와 관문 거류지 숙소로 향하는 길, 이안은 허리춤의 전술 단말기를 슬며시 끌어올렸다.

치직.

단말기 화면 구석에서 미세한 잡음과 함께 짧은 암호화 신호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CARRIER FREQUENCY DETECTED: ARCADIA MAIN SHIP - EMERGENCY BROADCAST]

[DURATION: 0.1 SEC]

이안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어졌다.

개척선 아르카디아 본선의 비상 송신 주파수가 0.1초 동안 단말기에 잡혔다가 스러진 것이었다. 궤도 위에 머물러 있거나 행성 어디엔가 불시착한 본선 역시 가동되고 있음을 뜻하는 신호였다.

"이안? 무슨 일 있나요?"

앞서 걷던 리아가 돌아보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안은 단말기 스크린을 끄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출발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성도로 향하는 길은 더욱 긴장해야 할 테니까요."

보랏빛 석양이 관문 요새 너머로 지기 시작하고 두 사람은 신화의 문명 중심부를 향한 새로운 진입로 앞에 섰다.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