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12화: 미지의 언어
은발 소녀의 잔상이 사라진 숲에는 차가운 보랏빛 안개만 감돌았다.
소녀가 서 있던 바위 아래에는 미세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이안은 권총 레일거너를 거두지 않은 채 천천히 바위 곁으로 다가갔다. 전술 단말기의 센서 모듈을 바위 표면에 대자 화면 위로 노란색 파형 그래프가 불규칙하게 튀었다.
"이건 마력이 아닙니다."
이안이 낮게 중얼거렸다.
"나노 입자의 잔류 신호와 미세 전자기장이 남아있습니다."
리아 벨렌은 지팡이를 쥔 손을 가늘게 떨며 이안의 뒤를 따라왔다. 그녀의 눈동자는 숲의 어둠과 이안의 손에 쥐인 단말기를 번갈아 비추고 있었다. 밤바람이 그녀의 법복 자락을 차갑게 흔들었지만 리아는 추위를 느끼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방금 그 아이가 한 말..."
리아가 멈칫거리며 입을 열었다.
"당신의 고향 언어라고 했죠. 밤에는 신호를 켜지 말라는 문장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서툴렀지만 분명한 내 고향 문장이었습니다."
리아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충격과 의문 그리고 오래된 신념이 무너질 때 느껴지는 고통이 엉켜 있었다. 그녀는 소녀가 남긴 발자국 옆에 쪼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흙을 짚었다.
"현자의 탑에 새겨진 문자가 당신의 고향 말이었고 탑의 파편이 당신을 보호자로 식별했죠. 그런데 이제는 숲속에서 정체도 알 수 없는 아이가 나타나 당신의 말을 하고 가네요."
리아는 고개를 들어 이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들은 누구죠? 신들의 후예인가요? 아니면 이 세계를 이토록 지독하게 뒤틀어버린 고대의 지배자들인가요?"
"우리는 개척자일 뿐입니다."
이안은 단말기의 수색 기록을 저장하며 대답했다.
"적어도 내 기억 속 인류는 신이 아니었습니다. 무력하고 이기적이며 고향 행성의 자원을 다 쓴 뒤 별 너머로 도망쳐 나온 생존자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럼 왜 그 아이가 당신의 말을 쓰는 건가요?"
"그걸 알아내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겁니다."
이안은 바위 틈새에서 작은 은빛 파편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소녀가 떠나며 남긴 고도 합성 금속의 극소 파편이었다. 전술 단말기와 반응한 파편은 희미하게 진동하다가 이내 이안의 손 안에서 차갑게 식었다.
새벽이 오기 직전 야영지의 불꽃은 푸른빛에서 옅은 잿빛으로 스러져 갔다.
이안은 침낭 위에 앉아 전술 단말기와 데이터 프로브를 직렬로 연결했다. 현자의 탑 지하 코어실에서 추출한 로그와 방금 센서가 포착한 소녀의 음성 파형이 스크린 위에 이중 곡선으로 겹쳐 떠올랐다.
리아는 불꽃 옆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이안의 손놀림을 유심히 관찰했다.
"음성 분석을 시작합니다."
이안의 손가락이 스크린을 훑었다. 단말기 스피커에서 치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잡힌 소리가 재생되었다.
밤에는... 신호를... 켜지 마...
리아가 숨을 죽였다. 이안은 음성 파형의 주파수 대역을 하나씩 분해했다. 사람의 성대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억양과 달리 규칙적인 합성음 패턴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이건 사람이 직접 익혀서 발음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안이 말했다.
"고대 녹음 파일이나 오디오 모듈을 반복해서 듣고 따라 부른 것에 가깝습니다. 음소의 끝부분마다 기계식 억압 신호가 섞여 있습니다."
"오디오 모듈이요?"
리아가 생소한 단어에 고개를 기웃거렸다.
"소리를 저장해서 재생하는 장치입니다. 다시 말해 그 소녀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고대 시설에 남겨진 기록 소리를 듣고 그 문장만 외워서 말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안은 파형 스펙트럼을 다음 구간으로 넘겼다. 한국어 경고 다음으로 소녀가 읊조렸던 고대어 발화 구간이었다.
통번역기가 해독하지 못했던 그 문장이 스크린 위에 복잡한 파형으로 길게 늘어났다. 이안은 그 파형의 자음 요소를 현자의 탑 제어 시스템의 영어 및 한국어 명령 코드 데이터베이스와 비교 분석했다.
몇 초 뒤 스크린에 번역 대조표가 떠올랐다.
[AUDIO PATTERN MATCH: 94.2%]
[ORIGINAL STRING: DORMANT UNITS - INTER-NODE CALL DETECTED]
[LOCAL PHONEME EVOLUTION: "잠든 것들이 서로를 부른다"]
이안의 눈동자가 차갑게 흔들렸다.
"이게..."
리아가 이안의 표정을 보고 바짝 다가앉았다.
"무슨 내용을 알아낸 건가요?"
"소녀가 말한 고대어는 신성한 주문이나 마법 언어가 아닙니다."
이안은 스크린의 대조표를 리아가 볼 수 있게 돌려주었다.
"현자의 탑 시스템이 외부로 보낸 비상 통신 문구입니다. 시스템 경고 문장이 오랜 세월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이 세계의 고대어처럼 변형된 겁니다."
리아는 화면에 빽빽하게 적힌 로마자와 파형 기호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도학회에서 수십 년간 고대 유적의 석판을 연구하던 학자들의 얼굴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들이 '신의 계시'라고 부르며 추앙하던 고대 보전 주문이 실상은 경고 메시지와 기계 제어 코드의 일부분이었다는 사실.
"그렇다면..."
리아의 목소리가 크게 떨렸다.
"우리가 마법을 외울 때 쓰는 구절들도..."
"대부분 문명 붕괴 당시 나노 머신이나 에너지 코어를 제어하던 가동 명령어였을 겁니다."
이안이 나직하게 덧붙였다.
"당신들이 마력이라고 부르는 에너지 역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고도 반응성 입자들입니다. 주문은 그 입자들을 자극하는 파형의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리아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지팡이를 쥔 그녀의 손가락끝에 힘이 하얗게 들어갔다. 자신이 평생 배워온 지식의 뿌리가 통째로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경악이 지난 자리에 이성적인 학자의 눈빛이 다시 타올랐다.
"어처구니가 없군요."
리아가 차갑게 중얼거렸다.
"우리는 기계의 경고 문장을 신의 은혜로 알고 읊조리고 있었던 거네요. 신성 문법이라 부르던 그 미묘한 성조조차 장치의 신호음을 흉내 낸 것에 불과했다니."
"리아."
"괜찮아요 이안."
리아는 깊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진실이 슬프다고 해서 거짓에 안주할 생각은 없어요. 오히려 모든 게 연결되는 느낌이 드는군요. 왜 내가 쓰는 바람 마법이 특정 장치 앞에서 부딪혀 깨졌는지 이제야 이해가 돼요."
그녀는 이안의 스크린 하단에서 깜빡이는 붉은 신호 표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신호는 어디로 가고 있나요?"
"소녀의 잔향과 탑의 외부 노드 신호가 동일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안이 지도를 확대했다.
"여기서 북동쪽으로 3킬로미터 떨어진 암벽 지대입니다. 숲이 끝나고 절벽이 시작되는 틈새에 고대 시설의 중계소가 남아있습니다."
"그 아이도 그리로 갔을까요?"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소녀는 밤에 신호를 켜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자신이 신호가 발생하는 장소 근처에 있었기에 위험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겁니다."
이안은 데이터 프로브를 단말기에서 분리하여 허리에 차고 레일거너의 전원을 점검했다.
"날이 밝는 대로 이동합니다."
아침 해가 올라왔지만 분지의 하늘은 맑아지지 않았다.
상공의 마력층이 자쏏빛 이슬과 안개를 뿜어내며 붉은 햇빛을 보랏빛으로 산곡시켰다. 이안과 리아는 보랏빛 안개가 자욱한 숲의 북동쪽 경계를 따라 걸었다.
나무들의 외형도 점차 이상하게 변해갔다. 기형적으로 꼬인 줄기 사이로 꺾인 철근과 합성 수지 파편들이 돋아나 있었다. 자연과 고대 인공물이 수천만 년의 세월 동안 뒤엉켜 굳어버린 괴이한 풍경이었다.
"마수가 다가옵니다."
리아가 낮게 경고했다.
숲의 덤불 속에서 세 개의 붉은 안광이 일렁였다. 늑대와 유사한 체구였지만 가죽 표면에 금속성 비늘이 돋아 있고 입가에서 푸른 불꽃이 튀는 변이 마수들이었다.
"이안 장비의 전자음 신호를 최소화하세요. 저들은 마력과 전자기파를 함께 감지합니다."
"알겠습니다."
이안은 권총의 조준용 레이저 레이더를 끄고 수동 조준 모드로 전환했다.
첫 번째 마수가 안개를 찢으며 튀어 올랐다. 이안은 쏘지 않고 몸을 옆으로 굴렸다. 마수가 땅에 착지하는 순간 리아가 지팡이를 바닥에 찍었다.
"기압 축소!"
쿵!
마수의 발밑 대기가 순간적으로 붕괴하며 강한 음압이 발생했다. 마수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자 이안의 레일거너가 정밀하게 불을 뿜었다.
탕!
저출력 펄스탄이 마수의 비늘 사이 관절을 꿰뚫었다. 마수는 찌릿하는 불꽃을 뿜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나머지 두 마리가 경계하며 주춤거리는 사이 리아가 손을 뻗어 지팡이 끝에 전격을 모았다.
"방전!"
청백색 전격이 이안의 펄스 잔류 전하와 반응하여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마수들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숲 뒤쪽으로 도망쳐 갔다.
"손발이 맞아가는군요."
이안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당신의 과학적 지식을 빌린 덕분이죠."
리아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암벽 절벽 바로 아래에 도착했다. 우뚝 솟은 거대한 기암절벽 틈새에 짙은 검은색 금속 구조물이 박혀 있었다. 현자의 탑 외벽과 동일한 탄소 나노튜브 티타늄 복합 장갑이었다.
입구 절벽 주변에는 최근에 누군가 오간 흔적이 명확했다. 굳은 흙 위에 남아있는 작은 발자국과 덤불 줄기가 깨끗하게 잘려 나간 자국이 보였다. 은발 소녀가 이곳을 아지트나 통로로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금속 덮개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수동 비상 개폐 레버가 강제로 내려간 상태였다.
"수동 조작 흔적입니다."
이안이 레버 주위의 마찰 흔적을 살펴보았다.
"이 세계의 마수나 일반 주민이 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닙니다. 비상 레버의 위치와 가동법을 정확히 아는 존재가 문을 열었습니다."
"그 은발 아이겠군요."
리아가 지팡이를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겨누었다.
"내부는 탑보다 조용해요. 마력 흐름도 정체되어 있군요."
이안은 전등을 켜고 전방을 비추며 먼저 중계소 내부로 발을 들였다.
중계소 안쪽은 길고 좁은 보조 제어실 형태로 이어져 있었다.
벽면마다 수천 개의 정밀 케이블이 썩지 않은 채 굵은 뱀처럼 얽혀 있었고 중앙에는 세 개의 세로형 가동 콘솔이 서 있었다. 콘솔 스크린은 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중앙 램프에는 주황색 비상 전력 불빛이 미약하게 들어와 있었다.
이안은 화면의 먼지를 장갑 낀 손으로 문질러 닦아냈다.
위잉.
손길이 닿자 감응식 스크린이 약하게 진동하며 기계음이 울렸다.
[AUXILIARY RELAY NODE 04 ONLINE]
[DATA LINK WITH MAIN TOWER: RESTRICTED]
[SUBJECT MONITORING SYSTEM: ACTIVE]
이안의 눈길이 마지막 줄에 고정되었다. 피험체 감시 시스템.
그가 콘솔의 상세 메뉴를 호출하자 손상된 인적 데이터 파일 하나가 화면 중앙에 떠올랐다. 사진 부분은 이미지가 깨져 하얀 잡음만 가득했지만 텍스트 항목은 비교적 선명하게 유지되어 있었다.
[SUBJECT CODE: A-09]
[PROJECT GAIA: BIOLOGICAL ADAPTATION EXPERIMENT]
[GENETIC BASE: HUMAN BASELINE - MODIFIED]
[STATUS: SURVIVAL CONFIRMED / DORMANT RECOVERY PHASE]
[LAST LOG ACCESS: 4 HOURS AGO (MANUAL OVERRIDE)]
"4시간 전..."
이안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우리가 야영지에서 방어체와 싸우고 그 아이를 만나기 직전 이 아이는 여기서 수동 로그를 조작했습니다."
리아가 스크린 옆으로 다가와 불빛을 조심스럽게 비추었다.
"이게 그 아이에 대한 기록인가요?"
"그렇습니다. 생체 적응 실험체 A-09. 고대 문명의 인간 유전자를 기반으로 환경 변이에 적응하도록 수정된 존재입니다."
이안은 스크린 아래 쪽의 콘솔 평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작은 물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
기계 부품의 은색 기판을 잘라 마찰로 다듬어 만든 나비 모양의 금속 펜던트였다. 조잡하지만 정성스럽게 깎아 만든 모양새였다. 손때가 묻어 윤이 나는 펜던트 중앙에는 얇은 가죽 끈이 꿰어져 있었다.
리아가 손을 뻗어 펜던트를 살포시 집어 들었다.
"이건..."
"그 아이가 떨어뜨렸거나 두고 간 물건입니다."
이안이 콘솔 화면의 이동 로그를 쫓았다. 스크린 위로 빨간점 하나가 이 중계소를 출발하여 대륙 중앙부를 향해 뻗어 나가는 전파 궤적이 그려졌다.
[TARGET ROUTE: SECTOR 01 - LUMINAR CENTRAL BASIN]
"루미나르 왕국 중앙 부근..."
리아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아이는 지금 왕국 중앙의 고대 유적군으로 향하고 있어요. 그곳에는 왕국 마도학회의 본산과 성도가 자리 잡고 있죠."
이안은 화면에 찍힌 궤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르카디아 본선과의 통선은 여전히 끊겨 있었다. 개척선 승무원들이 어디에 착륙했는지 혹은 여전히 궤도 위에 머물러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이 행성의 진실을 쥐고 있는 유일한 열쇠는 바로 저 생체 적응 실험체 A-09, 은발 소녀였다.
그리고 소녀는 이안과 같은 고향 언어로 기록된 로그를 쫓아 왕국의 중앙 유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왕국으로 가야 합니다."
이안이 단호하게 말했다.
리아는 펜던트를 이안에게 내밀었다가 다시 자신의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이상한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마도학회 본산으로 가는 길은 험난할 거예요. 현지 왕국 기사단과 마법사들은 이 유적을 독점하고 있고 외지인인 당신을 순순히 들여보내지 않을 테니까요."
"방법을 찾을 겁니다."
"네. 제가 도와줄게요."
리아는 지팡이를 고쳐 잡으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내 세계의 진실을 가르쳐주었으니 이번에는 제가 당신을 내 세계의 중심으로 안내하죠. 미지의 언어를 쓰는 그 아이를 찾아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계소 밖으로 나오자 보랏빛 안개 사이로 붉은 아침 햇살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수천만 년 전에 죽은 고향의 유산 위에서 새로운 미지의 대륙을 향한 두 사람의 발걸음이 비로소 같은 방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