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11화

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별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11화: 외계 행성의 밤

푸른 코어의 빛이 강이안의 얼굴을 아래에서부터 차갑게 핥아 올렸다.

홀로그램 화면은 아직도 깨진 문장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손상된 지도와 경고 로그와 복구율 숫자가 겹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수천만 년의 먼지를 삼킨 기계실 안에서 리아 벨렌의 숨소리만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이안."

리아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대답해요. 저 여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당신은 알아들었죠. 저 둥근 지도도 알아본 거죠. 여기가 대체 어디예요?"

이안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는 방금 재생된 기록의 마지막 장면이 아직도 타오르고 있었다. 흰 연구복을 입은 여자의 절망적인 얼굴. 가라앉은 대륙의 윤곽. 그리고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지구의 이름.

그는 콘솔 위에 손을 얹고 화면을 다시 끌어내렸다.

[DATABASE RECOVERY MODE - 12.9% COMPLETE]

[PROJECT GAIA: RESTORATION IN PROGRESS]

[EXTERNAL NODE HANDSHAKE REQUEST PENDING]

마지막 줄을 보는 순간 이안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외부 노드. 이 탑은 혼자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최소 전력만 회복되자마자 주변 어딘가에 잠들어 있는 다른 장치와 접속하려 하고 있었다. 그 장치가 데이터 저장소인지 방어 시스템인지 혹은 더 위험한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기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이안이 짧게 말했다.

리아의 눈썹이 흔들렸다.

"그게 설명인가요?"

"지금은 충분한 설명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 장치는 깨어나자마자 자기 위치와 상태를 외부로 알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 신호를 누가 받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신들의 성소가 깨어났다면 기록해야 해요."

리아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두려움이 그녀의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었지만 학자의 눈빛만은 꺼지지 않았다.

"마도학회가 평생 찾던 진실이 여기 있어요. 당신도 봤잖아요. 이곳은 전설보다 훨씬 큰 장소예요."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이안은 허리의 데이터 프로브를 뽑아 콘솔 하단 포트에 연결했다. 아르카디아 보안팀이 폐쇄 시스템에서 생존 로그만 뜯어내기 위해 쓰는 응급 장비였다. 정상적인 해킹 장비도 아니고 고대 시설을 완전히 분석할 만한 도구도 아니었다.

복사 가능한 항목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대부분은 손상되었거나 권한이 부족했다. 이안은 동영상 로그의 일부와 행성 지도 파일의 저해상도 사본 그리고 외부 노드 호출 기록만 선택했다.

"그 정도로 끝내는 건가요?"

리아가 믿기 어렵다는 듯 물었다.

"내 권한은 임시 접근입니다. 더 깊게 건드리면 시스템이 우리를 침입자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자꾸 우리라고 말하면서도 저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아요."

이안의 손이 멈췄다.

그 말은 정확했다. 그는 리아를 함께 살아남아야 할 동행자로 여기면서도 이 세계의 밑바닥을 뒤집는 진실 앞에서는 그녀를 문밖에 세워두고 있었다.

"저 영상의 여자는 내 고향에서 쓰던 말을 했습니다."

리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럼 신들의 언어가 아니라..."

"내가 태어난 문명의 언어와 같습니다. 그리고 저 지도는 내 고향의 오래된 대륙 윤곽과 닮았습니다."

리아는 숨을 삼켰다. 그 말의 의미를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안의 목소리에 섞인 허탈함은 알아들은 듯했다.

"그럼 당신은 고향을 찾은 건가요?"

이안은 푸른 코어를 바라보았다.

"아직 모릅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은 쪽에 가깝습니다."

그때 콘솔 아래에서 낮은 진동이 올라왔다.

[EXTERNAL NODE HANDSHAKE INITIATED]

[OPERATOR PROTECTION ROUTINE STANDBY]

이안은 망설이지 않고 전력 케이블을 뽑았다. 홀로그램이 찢어지듯 흔들렸다. 코어의 푸른빛이 한 차례 크게 맥동했고 기계실 천장 어딘가에서 무거운 금속판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OPERATOR ACTION DETECTED]

[SIGNAL RELAY PARTIAL COMPLETE]

"나갑니다."

그는 데이터 프로브를 회수하고 리아에게 손짓했다. 리아는 반발하려 했지만 천장 패널 뒤에서 무언가가 레일을 타고 이동하는 듯한 마찰음이 울리자 입을 다물었다.

둘은 긴 통로를 거슬러 올라갔다.

백색 조명은 들어올 때보다 불안정했다. 천장 패널들이 순서 없이 깜빡였고 먼지 없는 벽면에는 붉은 경고선이 흐르듯 지나갔다. 리아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남은 기록이 다시 잠들면 어쩌죠?"

"잠드는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어요? 당신에게는 고향의 글자겠지만 우리에게는 세상의 시작을 설명할지도 모르는 유산이에요."

이안은 걸음을 늦췄다.

리아의 말에는 분노가 있었고 그 분노는 정당했다. 그녀는 무지해서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평생을 쫓아온 진실이 눈앞에 있는데 이안이 그것을 위험하다는 말 하나로 덮으려 하고 있었다.

"자격이 있어서 막는 게 아닙니다."

이안은 어두운 통로 끝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두려워서 막는 겁니다. 저 기록이 맞다면 이곳은 성소가 아닙니다. 무언가를 보존하려고 만든 피난처이고 동시에 실패한 문명의 경고입니다."

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탑의 입구를 빠져나왔다.

분지에는 밤이 내려앉아 있었다.

보랏빛 안개는 낮보다 짙어졌고 검은 탑의 외벽은 별빛을 조금도 반사하지 않았다. 하늘에는 낯선 별자리가 빽빽했다. 이안은 무심코 북극성의 위치를 찾으려 했다가 곧 손을 내렸다.

그가 알던 하늘은 이곳에 없었다.

별은 분명히 별이었다. 대기권 밖에서 타오르는 항성들의 빛이었다. 그런데 배열은 기억 속의 어느 성도와도 맞지 않았다. 수천만 년의 세월이 별자리마저 뒤틀어 놓았거나, 그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리아는 탑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 그늘에 작은 불꽃을 피웠다. 장작 없는 푸른 불이 그녀의 손짓을 따라 흔들렸다. 이안은 그 주위에 감시 센서 세 개를 꽂고 전술 단말기의 수동 통신 채널을 열었다.

"아르카디아 본선. 여기는 강이안. 응답하라."

잡음만 돌아왔다.

"아르카디아 본선. 탐사 보안 담당 강이안이다. 현자의 탑 지하에서 고대 인류 기원으로 추정되는 시설을 발견했다. 반복한다. 고대 인류..."

그는 말을 삼켰다.

보고 문장은 사실이어야 했다. 감정이 아니라 관측값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질 문장은 어느 쪽으로도 사실처럼 들리지 않았다. 이 행성은 미래의 지구일 가능성이 있다. 우리 개척선은 출발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인류는 이미 한 번 자기 세계를 잃었다.

그는 단말기를 껐다.

리아가 그를 보고 있었다.

"인류라는 말. 당신 종족을 뜻하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그럼 저도 인류인가요?"

뜻밖의 질문이었다.

이안은 리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인간과 거의 같은 이목구비. 아르카디아의 승무원들과 다르지 않은 표정과 두려움과 호기심. 그러나 마력을 다루는 신경계와 이 행성의 긴 세월이 새겨 넣은 생물학적 차이는 분명 존재했다.

"나는 아직 모릅니다."

리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건조했다.

"잔인한 대답이군요."

"거짓말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맞아요."

리아는 푸른 불꽃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오늘 제가 믿던 세계의 바닥을 계속 뜯어내고 있어요. 현자의 탑은 성소가 아니었고 신성 문자는 당신의 고향 말이었고 신들의 빛은 전기라는 이상한 힘이었죠. 그런데도 저는 당신을 따라 나왔어요."

"왜입니까?"

"당신이 무서워했으니까요."

이안의 시선이 그녀에게 멈췄다.

"신들의 후예라면 두려워하지 않았겠죠. 대현자라면 전부 안다는 얼굴을 했을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그 기록을 보고 숨을 잃은 사람처럼 굳었어요. 그래서 믿기로 했어요. 적어도 지금의 당신은 거짓 계시를 내리는 신이 아니라 길을 잃은 인간에 가깝다고요."

이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감시 센서 하나가 짧게 울었다.

삐익.

이안은 즉시 권총 레일거너를 뽑았다. 단말기 화면에 붉은 점 하나가 떠올랐다. 인간형에 가까운 열원. 속도는 느렸지만 이동 궤적은 지나치게 직선적이었다.

이어 두 번째 센서가 켜졌다.

치직.

단말기 스피커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음성 파형이 흘러나왔다. 사람의 목소리처럼 낮았지만 단어로 분해되지 않았다. 리아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는 순간 숲속 안개가 가늘게 갈라졌다.

"마수인가요?"

"아닙니다. 걷는 방식이 너무 정확합니다."

딱. 딱. 딱.

금속성 발소리가 보랏빛 숲의 밤을 두드렸다.

나무 사이에서 나타난 것은 사람만 한 크기의 검은 장치였다. 얇은 다리 네 개가 거미처럼 접혔다 펴졌고 상부에는 금이 간 렌즈 하나가 박혀 있었다. 렌즈 안쪽의 붉은 광점이 이안을 향해 고정되었다.

[TEMPORARY OPERATOR IDENTIFIED]

차가운 기계음이 숲을 갈랐다.

[OPERATOR SAFETY PRIORITY ACTIVE]

붉은 렌즈가 천천히 리아에게 돌아갔다.

[UNREGISTERED MUTATION ENTITY DETECTED]

[QUARANTINE RECOMMENDED]

리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저게 저를 말하는 건가요?"

"뒤로 물러서요."

이안이 장치를 겨눴다.

검은 장치의 옆구리에서 얇은 총구가 솟아났다. 리아가 반사적으로 바람 장벽을 펼쳤다. 동시에 청백색 빛줄기가 야영지를 가르고 지나갔다. 바람 장벽과 충돌한 빛은 유리 깨지는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안은 몸을 낮추고 달렸다.

그는 정면 장갑을 쏘지 않았다. 장치의 붉은 렌즈 아래에 노출된 회전축을 겨누었다.

탕!

저출력 펄스가 회전축을 때렸다. 장치가 한쪽으로 기울었으나 곧바로 균형을 회복했다.

[PLEASE DISTANCE FROM MUTATION ENTITY]

"명령 거부."

이안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OPERATOR COMMAND INVALID UNDER SAFETY ROUTINE]

"그럼 안전 루틴부터 꺼주지."

두 번째 탄환이 등판의 안테나를 찢었다. 불꽃이 튀며 검은 장치가 움찔했다. 리아가 그 틈에 지팡이를 휘둘렀다. 압축된 바람이 장치의 다리를 한꺼번에 묶었다.

"오래 못 버텨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안은 가까이 접근해 장치의 하단 패널을 걷어찼다. 덮개가 열리자 내부 회로가 드러났다. 그는 전술 나이프를 꽂아 보조 전원선을 끊었다.

검은 장치가 마지막으로 떨었다.

[SIGNAL... RELAYED...]

붉은 렌즈의 빛이 꺼졌다.

숲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더 이상 안전한 침묵이 아니었다. 리아는 무너진 장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비등록 변이체."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신들이 남긴 장치가 저를 그렇게 불렀어요."

"그 장치는 신이 아닙니다."

"그럼 당신의 고향이 저를 그렇게 부른 거겠죠."

이안은 그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때 숲 반대편에서 아주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이안이 총구를 돌렸다. 안개 속에 은빛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어린 소녀처럼 작은 체구였다. 달빛을 받은 은발은 숲의 푸른 마력보다 더 차갑게 빛났다.

감시 단말기가 그녀를 포착하지 못하고 화면 위에서 하얗게 잡음을 일으켰다.

소녀는 두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밤에는 신호를 켜지 마."

이안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소녀의 발음은 서툴렀지만 분명한 한국어였다.

리아가 숨을 들이켰다.

"당신도 그 말을 알아들었어요?"

이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소녀는 이번에는 이 세계의 고대어처럼 들리는 낮은 문장을 덧붙였다. 통번역기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안은 그 뜻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잠든 것들이 서로를 부른다."

안개가 흔들렸다.

소녀의 모습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남은 것은 부서진 정찰 장치의 잔열과 멀리 탑의 꼭대기에서 한 번 더 깜빡인 붉은 신호뿐이었다.

외계 행성의 밤은 더 이상 낯선 자연의 어둠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전에 죽은 고향이 아직 완전히 잠들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