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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의 요괴 계약자6화

백야의 요괴 계약자

백야의 요괴 계약자

6화: 그림자 속의 추격자

손가락 끝에 닿는 철제 펜던트는 새벽녘의 서늘함을 흠뻑 머금어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민우는 삐걱거리는 고시원 침대의 모서리에 걸터앉아 손바닥 위의 물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황동과 철이 조잡하게 뒤섞인 펜던트 표면에는 날카롭게 포효하는 백호(白虎)의 문양이 아주 미세한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대한민국 정령청 소속 임시 정보원, 이태민. 방금 전 민우의 손에 사멸한 식인귀 벽루귀(壁漏鬼)의 시커먼 위장 속에서 소화되지 못한 채 잿더미와 함께 흘러나온 유품이었다.

"정령청의 수하 정보원조차 이런 후미진 골방에서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먹잇감으로 사라지는군."

민우의 나직한 혼잣말에는 짙은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이면 세계의 규칙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차 없고 잔혹했다. 한 치의 방심이라도 허용하는 순간, 자신 역시 척수가 텅 빈 껍데기가 되어 요괴의 뱃속으로 들어갈 터였다.

그의 눈가에 푸르스름한 영안(靈眼)의 개채가 돌자, 굳게 닫힌 철제 펜던트 틈새로 은밀하게 흘러나오는 차가운 주술적 마력의 궤적이 선명히 투시되었다.

[흐흥, 인간 사냥개 놈들이 사냥터를 감시하기 위해 제 사냥개들에게 채워놓는 조잡한 목걸이로군. 애송이여, 그런 귀찮은 표식은 당장 창밖 하수구 깊숙한 곳에 던져버려라. 굳이 서울 한복판에서 네놈의 위치를 광고할 필요는 없지 않으냐.]

민우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백랑이 불쾌하다는 듯 낮게 으르렁거렸다. 벽루귀의 귀석을 정화해 절반을 나누어 마신 덕인지, 녀석의 목소리에는 이전에 없던 두터운 영적인 힘이 실려 있었다.

"그냥 버리면 더 위험해, 백랑."

민우가 펜던트 표면을 덧그리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게 그냥 버려진다면 정령청은 그 좌표를 중심으로 신촌 일대의 모든 CCTV와 전출입자 명단을 뒤지기 시작할 거야. 신용불량자나 야반도주한 사람들 틈에서 갑자기 나타난 고등학생인 내가 수사망에 걸려드는 건 시간문제지. 놈들의 코가 닿기 전에, 이 물건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구동하는지 감지해야 해."

민우는 긴 호흡을 내쉬며 오른손등에 새겨진 황금빛 계약의 인장에 정신을 집중했다. 벽루귀의 귀석을 흡수해 그의 영혼 그릇 자체가 이전보다 배는 확장된 덕분인지, 마력을 조율하는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부드럽고 예리해져 있었다.

민우는 손가락 끝에서 정제된 영력을 실처럼 가늘고 길게 자아냈다. 그리고 펜던트의 이음새와 톱니바퀴 틈새로 살며시 밀어 넣었다.

화아악!

정령청 특유의 엄격한 영적 보안 장치가 이질적인 마력의 유입을 거부하며 영혼을 찌르는 듯한 찌릿한 반발 열기를 뿜어냈다. 민우는 미간을 좁히면서도 영력을 물러서지 않았다. 영안의 시야를 극도로 좁혀, 펜던트 내부에서 령격의 파동을 제어하고 있는 주술적 매듭의 형태를 정밀하게 읽어 나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타래의 꼬인 매듭을 하나씩 정교하게 풀어나가는 과정이었다.

틱, 쪼르르륵.

어느 순간 펜던트 내부의 기어가 부드럽게 맞물리는 느낌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철제 덮개가 스르르 열렸다. 펜던트 중앙에 박힌 투명한 영석 핵심부가 영롱한 청색 빛을 번뜩이며 발산했다. 이내 이태민이 생전에 심어둔 영적인 기록 인장의 음성이 민우의 뇌리로 직접 파고들었다.

음성 기록은 다급하게 끊겼지만, 기록의 이면에서 흘러나오는 붉은색 경고 인장이 민우의 영혼에 경고를 때렸다.

민우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3시간인가."

정령청의 수사팀 사냥개들이 이 그린고시원 302호를 정확한 수색 좌표로 찍어 들이닥치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3시간뿐이었다.

[거 보아라. 내 경고하지 않았더냐. 인간 놈들의 올가미가 네 목덜미를 향해 조여오는구나. 3시간 안에 이 지저분한 소굴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은색 사슬에 온몸이 묶여 평생 실험체로 썩어 들어갈 터다.]

백랑이 콧방귀를 뀌며 조롱했지만, 민우는 서두르는 기색 없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3시간이면 흔적을 지우고 도주하기에 차고 넘치는 시간이야."

민우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벽루귀와의 사투가 벌어졌던 좁은 방은 난장판이었다. 깨지고 박살 난 목재 침대 프레임, 벽지에 거무죽죽하게 흘러내린 요괴의 점액질 진액, 그리고 백랑의 빙결 기운이 남기고 간 서리 흔적까지. 정령청의 감식팀 요원들이라면 특수 기구를 대기도 전에 이곳에서 거대한 요괴 사냥이 벌어졌음을 단번에 알아차릴 것이 분명했다.

민우는 바닥에 조용히 가라앉아 있는 벽루귀의 사멸 재를 내려다보았다. 눅눅한 먼지 같으면서도 만지면 기분 나쁘게 차가운 회색 가루였다.

"백랑. 요괴의 사멸 재는 주변의 모든 영적 파동을 흡수해 은폐하는 성질이 있다고 했었지?"

[음? 그렇다만, 그 더러운 먼지 구덩이 가루는 왜 긁어모으는 것이냐?]

"최고의 차단 장벽이 여기 있으니까."

민우는 무릎을 꿇고 바닥의 사멸 재를 한 줌씩 쓸어 모았다. 그리고 그 재 위에 자신의 정화된 영력을 조심스럽게 스며들게 했다. 탁한 요기가 완전히 걸러지고 민우의 순수한 힘이 결합하자, 회색 가루는 푸르스름한 미광을 머금으며 찰흙처럼 끈적한 점성을 띠기 시작했다.

민우는 그 점성 가루를 벽지의 찢어진 틈새와 바닥의 검붉은 핏자국, 한기가 고여 있는 배수구 주위에 아주 얇고 꼼꼼하게 펴 발랐다. 영안으로 방 안을 들여다보자, 기괴하게 소용돌이치던 붉고 푸른 마력의 잔류 파동들이 가루에 빨려 들어가듯 완벽하게 정착하며 소멸하는 광각이 펼쳐졌다. 물리적인 지저분함은 남았을지언정, 주술적인 흔적은 완벽하게 세탁된 것이다.

"후우……."

민우는 심호흡을 하며 령격 압축(靈格 壓縮)을 활성화했다.

영혼의 들숨과 날숨을 하나로 묶어 그 그릇의 심연 깊숙한 곳으로 닫아거는 봉인 기술. 청파동 골목길에서 처음 이를 시도했을 때는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내상과 질식할 것 같은 작열통에 신음해야 했으나, 지금은 전혀 달랐다. 벽루귀의 귀석을 온전히 정화해 흡수한 덕에 단단해진 영혼은, 가슴이 묵직하게 조여드는 둔탁한 압박감만을 남긴 채 마력의 파동을 완전히 숨겨주었다.

방 안의 모든 영적인 색채가 사라지고, 민우는 평범하고 유약한 고등학생의 령격 수준으로 완벽하게 내려앉았다.

민우가 가방을 고쳐 매고 잘려 나간 방 문의 손잡이를 잡으려던 그 찰나였다.

스우우우…….

갑자기 등 뒤의 그림자가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로 비쳐 들기 시작한 붉은 아침 햇살이 가로막히며 방 안의 명암이 극단적으로 찢어졌다. 구석진 음지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가 바닥의 균열을 선로 삼아 민우의 그림자를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덮쳐왔다.

[애송이, 피해라! 놈이다!]

뇌리를 때리는 백랑의 다급한 사호와 동시에, 민우는 주저 없이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스윽—!

소름 끼치도록 고요하고 날카로운 파공음이 공기를 갈랐다. 민우가 방금 서 있던 문짝 위로 칠흑 같은 어둠의 날붙이가 스쳐 지나갔다. 얇은 합판 문이 두부처럼 깨끗하게 잘려 나가며 바닥에 스산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민우는 좁은 방바닥을 굴러 벽면에 등을 밀착시키며 영안을 부릅떴다.

어두운 옷장 옆의 그림자 더미 속에서, 연기처럼 흐물거리는 실루엣이 실체화되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인간의 모습을 모방하려 한 듯 보였으나 형체가 끊임없이 유동적이었고, 이목구비가 있어야 할 얼굴 부위에는 오직 붉은빛의 서늘한 두 개의 안광만이 칼날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이태민의 기록에 남아 있던 암살자 요괴, '흑영'이었다.

"……일개 인간 놈이 벽루귀를 사냥했다기에 기이하다 여겼는데, 령격을 감쪽같이 억누르고 있었군."

흑영의 목소리는 마치 쇠붙이를 그림자로 긁는 듯한 스산한 고주파 음이었다. 녀석의 붉은 눈빛이 민우의 오른손등에 새겨진 황금빛 계약의 낙인, 그리고 그가 쥐고 있는 이태민의 펜던트로 향했다.

"그 펜던트를 넘겨라. 그리고 네놈의 심장을 내놓아라. 대요괴의 냄새를 뿜어내는 그 거대하고 맑은 그릇을 삼킨다면, 내 격(格)도 사신(四神)에 한 걸음 다가서겠지."

스스스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흑영의 신체가 바닥의 짙은 어둠 속으로 연기처럼 스며들며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녀석은 빛이 닿지 않는 방안의 음지 배관을 통로 삼아 그의 사각지대로 빠르게 기어오고 있었다.

민우는 영안의 초점을 바닥과 벽면에 극도로 집중했다.

'보인다.'

일반인의 육안으로는 쫓을 수 없는 속도였지만, 푸른 영안의 투시 시야 속에서는 어둠을 매개체로 이동하는 검붉은 칼날 같은 마력 선로가 뱀처럼 뿜어져 나오는 궤적이 또렷하게 포착되었다.

스윽!

민우의 오른쪽 허벅지 아래 그림자에서 검은 낫 모양의 흑영 손톱이 불쑥 튀어나왔다.

민우는 즉각 상체를 뒤로 젖히며 책상 모서리를 짚고 도약했다. 날카로운 어둠의 참격이 그가 입고 있던 낡은 셔츠자락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며 책상의 서랍 프레임을 박살 냈다. 파편이 튀며 자욱한 나무 먼지가 일었다.

"이 좁은 방 안에서는 녀석의 독무대야……!"

이대로 시간이 지체된다면 도망치기는커녕 목이 잘려 나갈 판이었다. 그렇다고 그림자 밑의 백랑을 전면 소환해 대대적인 빙한 폭풍을 터뜨릴 수도 없었다. 령격 압축을 풀고 그만한 수준의 대마력을 신촌 한복판에서 폭발시킨다면, 정령청의 수사 요원들이 좌표 추적 프로토콜이 작동하기도 전에 건물 전체를 포위할 터였다.

령격을 억누른 상태에서, 최소한의 마력과 영리한 지략으로 이 그림자 괴물을 밀어내야만 했다.

민우는 좁은 방 안의 가구 배치와 아침 햇살의 위치를 냉정하게 분석했다. 햇살이 창문 틈새로 길게 들이치고 있었으나, 빼곡한 가구들과 부서진 침대의 잔해들이 수많은 짙은 그늘을 형성하고 있었다. 흑영에게는 사방이 무기이자 은신처인 셈이었다.

어둠이 녀석의 길이라면, 그 길을 모조리 왜곡시키면 된다.

"백랑, 내 말 잘 들어."

[무슨 수작이냐, 계약자! 저 건방진 그림자 찌꺼기 놈의 모가지를 당장 얼려 쪼개 버릴까?]

"아니, 마력 방출을 극도로 억제해. 방 천장에 달린 낡은 형광등 유리 덮개와 창문 유리창에만 아주 미세한 얼음 서리 결정을 씌워 줘. 령격 측정 기구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얇게!"

[쳇, 나를 무슨 유리 장식가로 아는구나!]

백랑이 투덜거리면서도 계약을 통해 연결된 서늘한 마력의 줄기를 부드럽게 흘려보냈다.

파지직, 파자작…….

찰나의 순간, 방 천장의 낡은 일자형 형광등 표면 위로 침엽수 잎사귀 모양의 정교하고 예리한 은빛 서리 결정들이 순식간에 돋아났다. 부서진 창틀 틈새에 남은 유리 파편 위로도 아주 얇고 투명한 얼음 막이 형성되었다.

흑영은 인간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바닥의 그림자 속에서 민우의 목덜미를 끊어놓기 위해 사방에서 날카로운 검은 가시들을 소환해 돌진했다.

민우는 돌진해 오는 검은 가시들을 피하는 대신, 벽에 달린 형광등 스위치를 향해 온 몸을 던져 거칠게 내리눌렀다.

딸칵—!

찌르르릉하는 노이즈 소리와 함께 낡은 형광등이 일제히 백색 광을 뿜어냈다.

단순한 형광등 불빛이었다면 흑영의 깊은 음지를 완전히 걷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형광등 표면을 덮은 백랑의 극 미세 얼음 결정들은 훌륭한 돋보기이자 프리즘이었다. 쏟아져 나온 빛줄기들은 유리 표면의 무수한 서리 결정에 부딪혀 사방으로 굴절되고, 굴절된 빛들이 다시 창문의 얼음막에 튕겨 나가며 빛의 지독한 난반사(亂反射)를 일으켰다.

화아아아아앙—!

순식간에 302호 골방 내부가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눈부신 백색 빛의 감옥으로 화했다.

빛과 그림자의 뚜렷했던 대비가 한순간에 지워지고, 가구 밑과 옷장 옆에 존재하던 모든 음지가 사방에서 꺾여 들어오는 빛에 의해 강제로 소멸했다.

"끼아아아악! 이, 무슨……!"

그림자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 있던 흑영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대기 중으로 강제 유출되었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 그 자체를 신체로 삼는 흑영에게, 공간 전체를 메운 무수한 각도의 굴절광은 온몸을 세포 단위로 지져대는 강산과 같았다. 녀석의 검은 실루엣이 촛농처럼 녹아내리며 지독한 연기를 내뿜었다.

"교활한 필멸자 놈이…… 감히……!"

흑영은 붉은 안광을 기괴하게 팽창시키며 민우를 쳐다보았으나, 이미 녀석의 영적인 파동과 형태는 형편없이 깨져 있었다. 더 이상 방 안에서 형체를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진 흑영은, 빛이 미처 닿지 않은 복도 문밖의 좁은 그늘을 향해 미끄러지듯 다급하게 퇴각했다.

"기억하마, 계약자……. 그림자가 존재하는 한, 네놈은 결코 나의 손아귀에서 피할 수 없다……."

스산하고 날카로운 고주파 소리만을 복도에 남긴 채, 흑영의 기척은 완전히 사라졌다.

방 안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고, 난반사를 일으키던 형광등 불빛만이 지직거리며 조용히 깜빡였다.

"후우…… 후우……."

민우는 박살 난 책상 모서리를 짚고 서서 거친 숨을 내쉬었다. 령격 압축을 유지한 채 기지를 발휘하느라 영혼에 쌓인 피로가 상당했다. 하지만 안도할 시간은 없었다. 흑영은 물러갔으나 녀석의 말대로 그림자가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 다시 찾아올 터였고, 정령청의 사냥개들이 고시원에 도달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2시간이 조금 안 되는 시점이었다.

민우는 바닥의 더플백을 집어 어깨에 메고, 잘려 나간 문틀 사이로 빠져나와 어두운 고시원 복도를 가로질렀다.

창밖으로 붉은 신촌의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으나, 소년의 앞날에는 그보다 훨씬 짙고 깊은 음지의 그림자가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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