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의 요괴 계약자

5화: 고시원의 포식자
손가락 끝에 닿은 시멘트 바닥은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웠다.
민우는 찢어진 누런 장판 모서리를 완전히 젖혀 방구석으로 밀어두었다. 낡고 해진 노란 비닐 장판 아래, 마침내 정체를 드러낸 회색 시멘트 바닥에는 기괴하고 날카로운 문양이 검붉은 핏자국으로 아로새겨져 있었다. 단순한 얼룩이라기엔 피의 흔적이 마치 부조처럼 굳어 있었고, 무엇보다 영안(靈眼)을 통해 들여다보는 시야 속에서는 검붉은 불꽃 같은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며 방 안의 공기를 기분 나쁘게 흐려놓고 있었다.
"백랑. 이게 요괴의 식별 낙인이라고 했나?"
민우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마음속으로 물었다. 그의 그림자 속에서 차가운 은빛 서리와 함께 핏빛 안광이 희미하게 아른거렸다.
[흐흐, 그렇고말고.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 놈이 청파동을 벗어나자마자 또 다른 호랑이 굴로 굴러 들어오다니, 운 하나는 끝내주게 나쁘구나. 이 낙인은 '벽루귀(壁漏鬼)'라는 질척하고 굶주린 포식자가 제 먹잇감의 주변에 새겨두는 피의 흔적이다. 낡은 하수관이나 시멘트 벽 틈새를 흐르듯이 기어 다니며, 깊이 잠든 인간의 목덜미에 주둥이를 꽂아 골수와 생기를 뼈째 빨아먹는 끈질긴 귀물이지.]
백랑의 목소리에는 언제나처럼 조소와 오만함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동시에 피 냄새를 맡은 야수 특유의 감출 수 없는 탐욕과 흥분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 비좁은 궤짝 같은 방에서 기거하던 전 주인 놈도 저 피의 징표를 지우지 못해 결국 척수가 텅 빈 껍데기가 되어 요괴의 위장 속으로 처박혔을 터. 그리고 그 벽루귀라는 귀물은 영리하게도 자신이 낙인을 새겨둔 영역을 주기적으로 맴돈다. 사냥터에 신선한 먹이가 새로 들어왔으니, 녀석의 콧구멍이 벌써 벌렁거리고 있을 것이 분명하겠지. 어쩌겠느냐, 계약자? 네놈의 그 유난히 크고 맑은 영혼의 그릇은 저런 하급 귀물들에게는 평생 구경도 못 할 최고의 만찬일 텐데?]
백랑이 혀를 차며 민우의 두려움을 유도하려 했으나, 민우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분하기만 했다. 오른손등에 새겨진 황금빛 계약의 인은 그의 확고한 의지에 반응하듯 미약하지만 일정한 온기를 뿜어내며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민우는 자리에 서서 찢어진 장판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도망치지 않아."
[호오?]
"도망친다고 해서 이 낙인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면, 그리고 내가 가는 곳마다 녀석이 냄새를 맡고 쫓아온다면…… 피할 이유가 없다. 쫓기기 전에 먼저 목가죽을 물어뜯어 놓으면 그만이지."
민우의 냉혹하고 서늘한 다짐에 백랑은 이채를 띤 붉은 안광을 그림자 밑바닥에서 번뜩였다. 소년의 눈빛은 백랑이 오랫동안 마주해 왔던, 공포에 질려 빌어먹을 주술을 읊어대던 유약한 가문 주술사들과는 완전히 결이 달랐다. 생존의 한계에 몰린 인간이 뿜어내는 가시 돋친 서늘함이 백랑을 묘하게 만족시켰다.
오후 4시를 넘긴 그린고시원의 공용 주방은 환기가 전혀 되지 않아 지독히 눅눅한 기름때와 곰팡이 냄새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민우는 방에서 챙겨 나온 찌그러진 냄비에 물을 담아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라면 봉지를 뜯고 수프의 매콤하고 자극적인 냄새가 좁은 주방을 가득 채울 무렵, 복도 저편에서 낡은 슬리퍼를 직직 끄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나이 지긋한 총무가 어슬렁어슬렁 걸어 들어왔다. 총무는 초점 없는 허연 눈으로 민우를 슬쩍 훑어보더니, 윙윙거리는 공용 냉장고의 문을 열고 찌그러진 페트병을 꺼냈다.
"총무님. 실례지만 여쭤볼 게 있습니다."
민우가 냄비의 끓는 물을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넸다.
"어, 왜? 무슨 문제 있어? 방에 보일러가 안 돌아가?"
"그건 아니고, 제가 오늘 입실한 302호 말입니다. 서랍 안쪽 구석에 전 거주자가 쓰던 물건이 조금 남아 있어서요. 혹시 그 사람과 연락할 방법이 있나 해서 여쭙니다. 물건을 돌려줘야 할 것 같아서요."
민우의 태연한 표정에 총무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아, 그 친구? 연락 안 돼. 일주일도 더 전에 밤중에 방세도 안 내고 야반도주했어. 밀린 월세가 보증금을 진작에 깎아 먹었는데, 지 쓰던 짐짝 몇 개 놔두고 몸만 쏙 빠져나갔더라고. 요즘 젊은 것들은 당최 신용이라는 게 없어. 경찰에 실종 신고라도 해야 하나 싶었는데, 다른 방 사람들도 귀찮아하고 해서 그냥 짐은 다 처분하려던 참이었어. 쓸 만한 거 있으면 그냥 네가 갖던가 버려."
총무는 혀를 쯧쯧 차며 다시 슬리퍼를 끌고 어두운 복도 저편으로 걸어가 버렸다.
민우는 그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서서히 눈가를 좁히며 영안을 개방했다.
스우우우…….
푸르스름하게 내려앉은 영적인 시야 너머로, 이 낡고 음침한 콘크리트 건물의 뼈대가 비쳐 보였다. 가스배관과 낡은 하수 파이프가 얽혀 있는 공용 주방의 콘크리트 벽면 틈새. 그 조밀하고 어두운 균열 사이로, 질척하고 썩은 물빛을 띤 검붉은 점액질 같은 마력의 궤적이 마치 핏줄처럼 조밀하게 벽면을 타고 흐른 자국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 불길한 궤적의 종착지는 건물 5층의 옥상 환기구였고, 그 줄기는 낡은 벽체 내부의 배관을 거쳐 정확히 민우가 머무는 3층 302호의 하수구와 갈라진 벽지 틈새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도망친 게 아니었어.'
302호의 전 주인은 방세를 떼먹고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야밤에 이 어두운 벽 틈새를 뚫고 기어 들어온 벽루귀에게 습격당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온몸의 골수를 빨린 채 삼켜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요괴는 사냥을 마친 지금도 여전히 이 건물 주변의 영맥을 맴돌며, 302호에 새로 들어온 거대한 영혼 그릇의 냄새를 맡고 다시 스며들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민우는 라면 냄비를 들고 서둘러 302호로 돌아와 철제 문을 걸어 잠갔다.
방 안으로 돌아온 민우는 책상 옆 침대에 걸터앉아 바닥의 어두운 그림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백랑. 거래를 하자."
[거래? 일개 필멸자 놈이 대요괴에게 감히 거래라는 오만한 단어를 입에 올리는가? 오른손의 그 주박을 사용해 강제로 부리지 않고?]
그림자가 일렁이며 방 안의 모든 빛을 삼키는 듯한 짙은 어둠이 일어났다. 이내 은빛 늑대의 거대하고 위압적인 실루엣이 허공으로 반쯤 솟아올랐고, 그와 동시에 방 안의 공기가 급격히 냉각되며 얇은 단판 유리창 위로 하얀 서리가 순식간에 덮여 나갔다.
민우는 차가운 안개 속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주박을 발동해 억지로 부리면 너나 나나 영혼이 찢어지는 역류 통증을 겪는다. 굳이 그런 불필요한 고통을 감수해가며 싸울 이유는 없지. 이번 사냥은 네게도 확실한 대가가 있을 거다."
민우는 손가락 끝으로 장판 밑의 핏빛 낙인을 지목했다.
"그 녀석을 처단하면 귀석이 나올 거다. 녀석을 죽이고 귀석을 회수하면, 내가 그 안의 탁한 사기를 정화해서 정확히 절반의 정수를 네게 넘겨주겠다. 네 마력을 복구하는 데 보탬이 되겠지. 어때?"
백랑의 붉은 눈동자가 탐욕스럽게 수축했다. 요괴에게 있어 동족을 처단해 얻는 귀석의 마력은 힘을 되찾기 위한 최고의 양분이었다. 게다가 인간의 육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귀석의 탁기를 부작용 없이 깨끗하게 정화할 수 있는 민우의 비정상적인 체질은, 백랑에게 있어서도 놓칠 수 없는 완벽한 여과 장치였다.
[……흐하하하! 참으로 발칙하고 재미있는 애송이로다! 정령청 사냥개들에게 잡히기도 전에 요괴들의 사냥꾼이 되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꼴이라니. 좋다. 그 거래, 기꺼이 받아들이지. 늙은 늑대의 송곳니가 필요하다면 그만한 대가는 지불해야 하는 법. 원하는 바를 말해라.]
"이 좁은 방 안에서 녀석과 정면으로 들이받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내 지시에 맞춰 방 안의 철제 배수구 구멍과 낡은 환기구 틈새, 그리고 침대 바로 뒤의 갈라진 벽지 틈에 네 차가운 한기를 극도로 가늘게 스며들게 해 줘. 녀석이 벽을 뚫고 들어오는 순간 발을 묶을 수 있는 얼음 덫을 까는 거다."
[말은 쉽구나, 계약자. 내 마력을 손톱 끝만큼만 방출해도 이 조잡한 인간들의 건물이 통째로 얼어붙어 바스러질 텐데, 모래알만 한 틈새에 서리를 가늘게 얹어두라니. 나를 무슨 바느질하는 광대 부리듯 부리는구나.]
백랑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지만, 녀석은 이내 그림자 속으로 매끄럽게 녹아들며 약속된 얼음 마력을 부드럽게 방출하기 시작했다.
스으으으…….
오른손등의 황금빛 인장이 은은하게 요동치며 영혼의 결속을 따라 백랑의 얼음 기운이 민우의 신경을 관통했다. 강제 명령이 아닌 상호 동의에 의한 영력의 공명이었기에, 청파동에서 느꼈던 뼈가 우스러지는 고통에 비하면 가벼운 두통과 손끝이 저려오는 감각에 불과했다.
민우가 영안을 부릅뜨고 방 안을 훑자, 환기구와 하수구 주위로 실타래처럼 조밀하게 얽혀드는 예리한 은빛 마력의 서리 덫이 똑똑히 보였다. 스치기만 해도 피부와 근육을 단숨에 동결시킬 수 있는 치명적인 함정이었다.
민우는 더플백을 열어 청파동 옥탑방에서 들고 온, 성에가 맺힌 부러진 쇠파이프 조각을 단단히 쥐었다. 날카롭게 찢겨 나간 철제 단면이 그의 오른손바닥을 자극했다.
그는 방 안의 불을 끄고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영안을 활성화한 채, 어둠 속에서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사냥감이 덫에 걸려들기만을 기다렸다.
새벽 2시.
신촌 대학가의 휘황찬란했던 불빛들도 꺼져가고, 사방의 인기가 가장 낮게 가라앉아 고요가 방 안을 지배하는 시간이었다.
스스스스…….
갑자기 낡은 벽지 너머에서 시멘트를 거칠게 긁는 불길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정확히 민우가 누워 있는 침대 머리맡 뒤편의 갈라진 벽지 틈새에서 멈추었다.
툭, 툭.
누런 벽지 틈새가 기이한 힘에 의해 부풀어 오르더니, 그 사이로 비릿한 썩은 물 냄새를 풍기는 시커먼 점액질이 빗방울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어 진흙 속에서 지네처럼 딱딱하고 시커먼 다리들이 수십 개씩 불쑥 솟아나와 벽면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벽루귀였다.
지네를 수백 마리 뭉쳐놓은 듯한 거대하고 기형적인 몸뚱이. 머리가 있어야 할 위치에는 이목구비가 뭉개져 짓눌린 사람의 얼굴이 달려 있었고, 쩍 벌어진 주둥이 안쪽에는 둥글게 배열된 수백 개의 날카로운 이빨이 검붉은 타액을 흘리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녀석은 침대에 누워 숨을 죽이고 있는 민우의 머리맡을 향해 천천히 아가리를 벌리며 다가왔다.
[지금이다, 계약자!]
뇌리를 찌르는 백랑의 호통과 동시에, 벽루귀가 민우의 목덜미를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몸을 날렸다.
파앗!
민우는 찰나의 순간에 침대 아래 바닥으로 몸을 날려 굴렀다.
쿠구구궁!
벽루귀의 묵직한 대가리가 민우가 누워 있던 침대 매트리스를 그대로 박살 내며 목재 프레임을 산산조각 냈다. 사방으로 튀는 나뭇조각들이 민우의 뺨을 스쳐 지나갔지만, 민우는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바닥을 딛고 신속하게 돌아섰다.
캬아아아악!
사냥감을 놓친 벽루귀가 짓눌린 인면의 주둥이를 벌려 귀가 찢어질 듯한 고주파의 비명을 질렀다. 녀석은 몸을 비틀어 수십 개의 단단한 다리로 바닥을 긁으며 민우를 향해 다시 돌진해 왔다.
민우는 냉정함을 잃지 않고 녀석의 공격 궤적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좁은 방안에서 무모하게 힘으로 맞붙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그는 일부러 침대 모서리를 방패막이 삼아 몸을 움츠린 뒤, 녀석이 자신을 덮치기 위해 공중으로 도약하는 순간 욕실 문을 향해 거칠게 몸을 던졌다.
벽루귀는 사나운 포식욕에 눈이 멀어 민우의 꼬리를 쫓아 욕실 바닥으로 거침없이 기어들어 갔다.
"백랑, 닫아라!"
[얼어붙어라, 천한 귀물 놈아!]
백랑의 서늘한 마력이 욕실 배수구 밑바닥에서 화산처럼 폭발하듯 솟구쳤다.
파자작! 콰과과광!
순식간에 욕실 바닥 전체가 시퍼런 서릿발과 함께 두꺼운 얼음판으로 변했다. 욕실 벽면과 바닥을 휩쓴 극한의 추위는 벽루귀의 수십 개의 다리와 딱딱한 껍질을 얼음판 위에 강제로 고정시켰다.
끼샤아아아악—!
하반신이 얼음 속에 파묻혀 완전히 결빙된 벽루귀가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며 날뛰었다. 녀석의 상체가 격렬하게 흔들리며 낡은 욕실 타일을 박살 냈지만, 백랑의 차가운 서리는 녀석의 마력 흐름마저 단단히 얼려 둔화시켰다.
마력의 순환이 멈추자, 녀석의 등덜미 뒤쪽 깊은 곳에서 붉은 심장처럼 맥동하는 마력의 핵심—귀석의 정확한 물리적 위치가 민우의 푸른 영안에 훤히 투시되었다.
"걸렸군."
민우는 날카롭게 부러진 쇠파이프를 양손으로 꽉 움켜쥐고, 몸부림치는 벽루귀의 등덜미를 향해 온 힘을 실어 아래로 내리찍었다.
푸우욱! 콰작!
쇠파이프의 거친 단면이 요괴의 외갑을 꿰뚫고 척수 중앙에 박혀 있던 붉은 핵을 정확히 관통했다.
쩍! 쩌적!
쇠파이프 끝부분에 맺혀 있던 백랑의 빙한 기운이 상처 틈새로 들이치며 요괴의 내부 장기와 마력을 통째로 얼려버렸다. 벽루귀는 미처 마지막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한 채 하얗게 얼어붙은 석상처럼 굳어버렸고, 이내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며 서서히 바스러져 내렸다.
스스스스…….
얼어붙었던 요괴의 육신이 검은 먼지가 되어 바닥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흩어진 재 더미의 중심에서, 손가락 마디 크기의 영롱한 청회색 빛을 발하는 결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벽루귀의 귀석이었다.
민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꿇고 바닥에 떨어진 차가운 귀석을 주워 올렸다.
[크하하하! 과연 훌륭한 사냥이었다, 계약자. 주박의 채찍 없이도 이렇게 훌륭하게 먹잇감을 가져오다니. 약조한 것을 내놓아라.]
그림자 속에서 백랑이 탐욕스럽게 주둥이를 벌리며 군침을 흘렸다.
민우는 자리에 앉아 귀석을 오른손에 쥐고 자신의 정화 능력을 활성화했다. 영혼의 그릇을 필터 삼아 귀석에 깃든 요괴의 혼탁한 사기와 원한을 서서히 걸러냈다. 손바닥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고, 청회색의 탁한 기운이 하얀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휘발되었다.
잠시 후, 그의 손안에는 잡스러운 기운이 완벽히 여과된, 영롱하게 빛나는 푸른빛의 순수한 영력 덩어리만이 남게 되었다.
민우는 약속대로 이 정제된 영력의 절반을 계약의 끈을 통해 자신의 그림자 속 백랑에게 보냈다.
[아아……! 이 맑고 깊은 서리의 기운이라니! 네놈의 그 기이한 그릇 덕에 상급 귀석에 버금가는 영액을 맛보는구나!]
백랑이 맑은 영력을 탐욕스럽게 들이켜며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민우 또한 남은 절반의 순수한 영력을 자신의 단전과 영혼 그릇 속으로 흡수했다.
화아아아악!
온몸의 혈관을 타고 뜨거운 에너지가 홍수처럼 범람하며 그의 영혼 테두리를 사방으로 확장시키는 감각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령격 압축을 시도했을 때 겪었던 가슴뼈 근처의 내상과 누적된 영적 피로가 흔적도 없이 씻겨 내려갔고, 백랑과의契約을 묶어두고 있던 주박의 끈이 한결 부드럽고 안정적으로 정착되는 것이 느껴졌다.
민우는 떨리는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손끝을 맴도는 영력의 결이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져 있었다. 영안의 투시 시야는 한층 명확해졌고, 이제는 령격을 억누르는 령격 압축을 실행하더라도 이전 같은 잔인한 극통을 겪지 않고도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바닥을 내려다보자, 찢어진 장판 아래에 굳어 있던 피의 식별 낙인이 완벽하게 정화되어 연기처럼 사라져 있었다.
"후우……."
민우는 박살 난 침대 모서리에 몸을 기대며 깊은 안도의 숨을 뱉었다. 신촌에서의 첫 밤은 잔인한 피비린내와 습격으로 채워졌지만, 마침내 이 보잘것없는 골방을 자신만의 진정한 안전지대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때, 민우의 시선이 요괴가 남긴 검은 재 더미 구석에 섞여 있는 작은 물체에 머물렀다.
"이건……?"
민우는 몸을 굽혀 재 속에서 그것을 집어 올렸다.
그것은 반쯤 그을린 낡은 철제 펜던트였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정령청의 공식 상징인 날카로운 백호의 문양과 함께, 날인된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정령청 소속 임시 정보원 - 이태민]
민우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어졌다.
302호의 전 주인은 단순한 야반도주생이 아니었다. 정령청이 이 대학가 주변의 요괴 흐름과 특이 사항을 감시하기 위해 심어두었던 은밀한 정보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실종과 사망이 확인되는 순간, 정령청의 정식 요원들이 이 고시원과 302호를 가장 먼저 수사 대상에 올릴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숨통이 좀 트였다 싶었는데…… 쉴 틈을 주지 않는군."
민우는 펜던트를 더플백 깊은 곳에 밀어 넣으며, 깨진 창문 밖으로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는 신촌의 새벽하늘을 묵묵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