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의 요괴 계약자

4화: 다가오는 사냥개들
부슬비가 그친 청파동의 아침은 지독하리만큼 무겁고 짙은 안개 속에서 시작되었다.
옥탑방의 부서진 창틀 사이로 축축한 새벽바람이 거침없이 들이쳐 방 안의 온기를 모조리 앗아갔다. 밤새 널브러져 있던 깨진 유리 파편들은 대충 구석으로 쓸어 모아두었지만, 방 안을 가득 채운 비릿한 피비린내와 대요괴 백랑이 뿜어내고 간 시린 서리의 흔적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방 안에 짙게 고여 있었다.
"후우……."
민우는 삐걱거리는 낡은 책상 모서리를 짚고 서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에 엇갈려 메고 있는 물 빠진 더플백에는 당장 필요한 교복 한 벌과 교과서 몇 권, 그리고 어젯밤 식인귀의 가슴팍을 관통했던 부러진 쇠파이프 조각이 들어 있었다. 쇠파이프 끝부분에는 백랑의 빙한 마력이 서려 있던 여파로 여전히 성에가 하얗게 맺혀 있었다.
옥탑방 보증금은 밀린 월세와 공과금으로 인해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집주인에게 사정해서 방을 즉시 뺀다고 해도 돌려받을 수 있는 돈은 고작 수십만 원에 불과했다. 부모가 남겨둔 낡은 통장에 든 푼돈까지 다 긁어모아도 서울 하늘 아래 제대로 된 방 한 칸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생존하는 것도 결국 다 돈이네."
민우가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오른손등에 새겨진 황금빛 계약의 인은 살짝 욱신거리며 미약한 온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흐흐흐, 필멸자 놈들 특유의 나약하고 비루한 고민을 하는구나. 고작 그깟 얄팍한 종이 쪼가리 몇 장 때문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국에 안달복달하는 꼴이라니. 내 목에 주박을 채우며 대요괴의 주인을 자처하던 놈치고는 참으로 눈물겨운 몰골이로다.]
민우의 그림자 속에 고여 있는 어둠 속에서 백랑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뇌리를 울렸다. 조소와 오만함이 가득 실린 음성이었지만, 어젯밤 식인귀의 귀석을 정화하여 흡수해 준 덕분인지 계약을 통해 느껴지던 특유의 날카로운 영혼 저항감은 이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네가 인간 사회에서 살아본 적이 없으니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거지. 누울 자리 하나 마련하는 데도 돈이 필요한 게 인간의 법칙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 존재를 숨겨야 하잖아."
민우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옆구리의 부상은 귀석의 순수한 마력이 혈관을 타고 돌며 완전히 치유되었지만, 영안을 활성화할 때마다 눈 주변의 얇은 핏줄들이 푸르스름하게 떠오르는 이질적인 변화가 생겼다. 그만큼 그의 영혼 그릇이 이면 세계의 규칙에 빠르게 동화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백랑. 네가 경고했던 그 사냥개들…… 이면 세계의 관리 기구인 정령청이 내 흔적을 쫓아올 거라고 했지. 놈들의 추적을 어떻게 피해야 하지?"
[말해주지 않았더냐. 인간들의 더러운 생기가 빽빽하게 들어찬 조밀한 소굴로 기어가야 한다고. 이 도심의 질서를 유지한답시고 으스대는 인간 사냥개 놈들은 영력의 파동을 감지하는 조악한 기구를 들고 다닌다. 맑고 차가운 밤하늘에 피어오르는 연기는 아무리 미약해도 멀리서 똑똑히 보이지만, 뿌연 안개와 먼지가 가득한 시바닥에서는 거대한 연기조차 가려지는 법이지.]
"인기(人氣)를 방패막이로 삼으라는 거군."
[그렇다. 수만, 수십만의 인간들이 뿜어내는 잡다한 감정과 욕망, 그리고 생명이 만들어내는 영적 잡음은 훌륭한 교란 장막이 된다. 그 혼탁한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네놈의 영혼 호흡을 완전히 억누른다면, 놈들의 사냥개 코로도 네놈의 꼬리를 쉽게 낚아채지 못할 거다.]
민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으로 서울의 지도를 빠르게 그렸다. 고등학생의 얇은 지갑 사정으로 당장 정착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들의 번잡한 생기와 온갖 기운이 가장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곳.
"신촌이나 홍대 인근이 좋겠네."
대학가 주변은 언제나 사람들로 넘쳐나고, 보증금 없이 몇 십만 원의 월세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노후한 고시원들이 널려 있었다. 민우는 주저하지 않고 더플백의 끈을 어깨에 고쳐 멨다. 마지막으로 지저분한 방 안을 한 번 훑어본 민우는 망설임 없이 철제 문을 열고 차가운 바깥 공기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청파동의 낡은 골목길은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아 시야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깜빡이는 주홍색 가로등 밑으로 이따금 출근을 서두르는 직장인들이나 우편배달부의 실루엣만이 귀물처럼 흐릿하게 지나갈 뿐이었다.
민우는 영안을 반쯤 활성화한 채 걸음을 옮겼다. 영안의 시야 속에서, 어젯밤 식인귀가 남기고 간 검붉은 마력의 잔해들이 바닥과 벽면에 핏물처럼 말라붙은 흔적으로 훤히 보였다. 민우는 그 흔적들이 가리키는 위험 구역을 피해 우회로를 택했다.
하지만 청파동의 큰길로 나가는 막다른 골목 입구에 다다랐을 때, 민우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감각과 함께 걸음을 멈추었다.
바스락.
골목길 초입은 평범한 경찰 통제선이 아닌, 황색과 청색 주술 기호가 촘촘히 새겨진 특수한 장막 테이프로 가로막혀 있었다. 그리고 그 테이프 너머로, 칠흑처럼 어두운 가죽 코트를 걸친 세 명의 인물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입은 코트의 등 뒤에는 날카로운 흰색 호랑이의 문양이 은은하게 새겨져 있었다. 현대 사회의 장막 뒤에서 초상적인 재앙과 요괴를 통제하는 대한민국 정령청(淨靈廳) 산하의 특수 감식팀 요원들이었다.
민우는 본능적으로 길옆에 방치된 낡은 빌라의 보일러실 음지 뒤로 몸을 숨겼다. 벽돌 틈새로 차가운 습기가 스며들었지만, 민우는 숨을 죽인 채 요원들의 행동을 주시했다.
[흥, 비열한 사냥개 놈들이 생각보다 더 일찍 당도했군. 저놈들의 코는 수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예민해.]
그림자 밑에서 백랑이 이빨을 갈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민우는 영안의 초점을 더욱 정밀하게 조여 요원들의 손끝을 관찰했다.
요원들 중 키가 가장 크고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중년 사내가 황동으로 정교하게 제작된 원형 측정기를 들어 올렸다. 고대의 천문도와 현대의 기계 공학이 기묘하게 결합한 듯한 그 기구의 중심에는 붉은 부적이 감긴 나침반 바늘이 사방으로 요란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위이이잉—!
기구의 내부 기어가 맞물려 돌아가는 불쾌한 금속성 고주파 음이 좁은 골목길의 고요를 깨뜨렸다.
"……이 정도 규모의 한기 강도라면 단순한 하급 귀물의 소행이 아닙니다. 최하 령격 지수 3등급 이상의 상급 요괴가 직접 관여한 흔적입니다."
"한옥 지하에 숨겨져 있던 고대 봉인이 완전히 파괴된 게 분명하군. 누군가 의도적으로 봉인을 해제하고 요괴와 계약했거나, 혹은 요괴가 계약자의 영혼을 씹어 삼키고 어딘가로 도주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른 요원이 차가운 목소리로 답하며, 벽면에 얼어붙어 있는 푸르스름한 성에 조각을 핀셋으로 긁어내어 주술 봉인병에 담았다. 그들의 일 처리는 지독하리만큼 빠르고 체계적이었다.
"이 근처의 잔류 파동이 아직 완전히 휘발되지 않았습니다. 장막이 찢어진 순간 유출된 한기의 흐름을 역추적하면……."
감식팀 조장이 황동 측정기를 천천히 허공으로 돌렸다.
덜컹거리던 측정기의 붉은 바늘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고개를 꺾더니, 정확히 민우가 숨어 있는 보일러실 방향으로 고정되기 시작했다.
황동 바늘이 가리키는 눈금이 민우의 위치를 향해 정확히 조여 왔다.
쿵. 쿵. 민우의 가슴이 미친 듯이 박동했다. 거리는 불과 20미터 내외. 이대로 측정기의 신호가 완전히 고정된다면, 요원들이 총을 빼 들고 이곳을 덮쳐올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백랑, 기구가 이쪽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어. 어떡해야 해?"
민우가 머릿속으로 다급하게 외쳤다.
[방법은 하나다. 령격 압축(靈格 壓縮). 네 영혼의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을 찰나의 순간에 하나로 묶어 그릇의 가장 깊숙한 심연 밑바닥으로 내리눌러라. 네 영혼에 기생하고 있는 나의 마력 파동을 단 한 방울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게 닫아거는 거다.]
"그걸 어떻게 하는 건데!"
[말 그대로 네 영혼을 걸어 잠가라! 마치 심장을 쥐어짜 멈추게 하는 느낌으로 영혼의 입구를 봉쇄해라. 상상 이상의 고통이 뒤따르겠지만, 견디지 못하면 저놈들의 은색 사슬에 묶여 평생 실험체 신세로 썩게 될 터다!]
민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영안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영혼의 거대한 그릇 속에 마치 은빛 소용돌이처럼 출렁이고 있는 백랑의 강력한 마력이 보였다. 민우는 오른손등의 계약 낙인을 꽉 움켜쥐며, 온 신경을 집중해 그 은빛 안개들을 그릇의 가장 어둡고 깊은 나락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넓게 열려 있던 그릇의 아가리를 강제로 오므려 닫았다.
지이이이잉!
순간, 민우의 갈비뼈 전체가 안쪽으로 우스러지는 듯한 극심한 압박감이 몰려왔다. 허파에서 산소가 강제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숨이 턱 막히며 목구멍에서 비릿한 핏물이 울컥 올라왔다.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시야가 순식간에 하얗게 번졌다. 영혼을 인위적으로 압착하여 억누르는 것은 물리적인 칼날에 베이는 고통과는 격이 다른 종류의 형벌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정신이 나갈 것 같은 혼미함 속에서도 안광을 잃지 않았다. 소년의 강인하고 냉혹한 생존 의지가 백랑의 방대한 파동을 기어코 억눌러 숨겼다.
그 찰나, 요원의 손끝에 들려 있던 황동 감지기의 붉은 바늘이 틱 소리를 내며 방향을 잃고 어지럽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 신호가 끊겼습니다."
"바람에 실려 온 단순한 잔류 마력이 흩어진 모양이군. 일단 본부에 현장 감식 결과를 보고하고, 청파동 일대의 최근 전출입자 명단과 영적인 특이 사항이 기록된 인물들을 확보해라. 봉인 해제 지점과 가장 가까운 거주자들부터 훑는다."
"알겠습니다, 조장님."
요원들은 길 반대편의 한옥 잔해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민우는 그제야 령격의 압축을 서서히 해제했다.
"컥…… 커헉! 헉……!"
민우는 더러운 빌라 벽면을 짚은 채 바닥으로 고꾸라져 마른기침을 토해냈다. 폐포가 하나하나 찢어지는 듯한 작열통에 눈물이 번졌지만, 민우는 옷소매로 거칠게 입가를 닦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더 지체했다가는 정말로 잡힌다. 민우는 모자를 눌러쓰고, 안개 속으로 녹아들듯 서둘러 골목을 빠져나갔다.
서울 서대문구 신촌의 낮 거리는 청파동의 음산한 침묵과는 180도 다른 별천지였다.
정오를 넘긴 거리는 거대한 소음과 혼잡함으로 들끓고 있었다. 젊은 대학생들의 활기찬 소란, 쉴 새 없이 늘어선 상점가에서 흘러나오는 소음, 도로를 메운 차량들의 경적이 공중에서 무겁게 짓눌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이 내뿜는 생명의 열기와 욕망의 찌꺼기—인기(人氣)가 신촌 하늘을 두꺼운 안개막처럼 덮고 있었다. 영안의 시야로 본 신촌은 그야말로 형형색색의 아우라와 혼탁한 기운이 폭풍처럼 요동치는 거대한 쓰레기통이자, 가장 완벽한 위장막이었다.
[으으윽…… 지독하군. 썩어빠진 인간들의 가증스러운 욕망과 생기가 뒤섞여 영혼이 오염될 것 같다. 이런 돼지우리 같은 구덩이에 나를 머물게 하려는 것이냐, 계약자?]
그림자 깊은 곳에서 백랑의 혐오감이 가득 실린 비명이 머릿속을 때렸다. 대요괴의 민감한 영적 감각에 있어 도심의 혼탁한 인기는 마치 악취가 진동하는 진흙탕에 얼굴을 처박히는 것과 다름없는 고역이었던 것이다.
"조용히 해. 덕분에 네 그 잘난 마력 파동이 완벽하게 가려지고 있으니까. 살고 싶으면 이 정도는 참아라."
민우는 흘러나오려는 목소리를 삼키며, 좁은 상가 골목 안쪽에 자리한 낡은 5층짜리 콘크리트 빌라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건물 외벽에는 빛바랜 녹색으로 '그린고시원'이라는 낡은 간판이 매달려 있었다.
보증금 없음, 월세 25만 원.
이것이 민우가 가진 보잘것없는 재정 상태로 구할 수 있는 도심 최고의 요새였다.
고시원 총무실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총무는 민우의 낡은 더플백과 학생증을 대충 훑어보더니, 신원 조사나 꼬치꼬치 묻는 말 한마디 없이 열쇠 하나를 툭 던져주었다. 이곳은 신원을 드러내기 꺼리는 도시의 낙오자들이 흘러들어와 조용히 숨는 막다른 골방이었기에 민우에게는 더없이 적합했다.
민우가 안내받은 302호 방은 성인 한 명이 누우면 꽉 차는 비좁은 크기였다. 삐걱거리는 싱글 침대와 낡은 목재 책상, 그리고 미니 냉장고가 방의 전부였다. 창문은 손바닥만 해서 햇빛 대신 옆 건물 빌라의 회색 콘크리트 벽면만이 바로 코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철컥. 문을 잠그고 더플백을 바닥에 내려놓은 민우는 침대 모서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겨우 한숨 돌렸네."
민우가 긴장을 풀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런 관짝 같은 방이라니. 내 수백 년 동안 온갖 굴욕적인 주술사들을 마주했다만, 일개 필멸자가 쓰다 버린 좁아터진 침대 밑 그림자에서 기거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백랑이 민우의 발밑 그림자에서 스르륵 고개를 쳐들며 투덜거렸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법이지. 언제든 계약을 깨고 그 차가운 청파동 지하실 석상 밑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말해. 즉시 주박을 발동해서 보내줄 테니까."
[……네놈은 아주 말대꾸 하나는 뱀처럼 징그럽게 잘하는구나.]
백랑이 쯧 하고 혀를 차며 침대 아래 어둠 속으로 깊숙이 몸을 숨겼다.
민우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낡은 장판 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한결 안정된 상태에서 영력을 천천히 가다듬던 민우의 영안에, 책상 밑바닥 구석의 장판 틈새가 문득 이상하게 비쳤다.
"……어?"
민우는 책상 아래, 낡고 노란 장판지가 찢겨 나가 시멘트 바닥이 훤히 드러난 구석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일반적인 인간의 눈에는 습기가 차서 장판 밑바닥이 시커멓게 썩어 들어간 흔적으로 보이겠지만, 민우의 영안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그곳에는 시커멓게 타들어 가며 굳어버린 피로 쓰인, 기이하고 날카로운 영적 궤적이 숨겨져 있었다. 누군가 손가락 끝에 붉은 피를 가득 묻혀 벽바닥을 긁어내려 쓴 주술적인 흔적이었다.
민우는 침대에서 내려와 찢어진 장판 조각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들춰냈다.
드러난 회색 시멘트 바닥 위에는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형성된 기괴하고 날카로운 기호 문양이 선명하게 그 형상을 드러냈다.
"이건 주술 문양인가……?"
[호오?]
그림자 속에서 백랑의 붉은 안광이 민우의 어깨너머로 아지랑이처럼 솟아올랐다. 백랑의 목소리에서 방금 전의 불평과 장난기가 순식간에 싹 사라진 채, 얼음처럼 차가운 포식자의 본능이 스며들었다.
[이것은 요괴를 퇴치하는 수호 결계도, 귀물을 막아주는 주술도 아니다. 계약자.]
"그럼 도대체 뭔데?"
[사냥감의 영역을 표시해 둔 사냥꾼의 낙인(烙印)이지. 이 좁은 궤짝 같은 방에 머물던 이전 놈은…… 이면 세계의 어둠 속에 도사리는 무언가에게 아주 참혹하게 물어 뜯겨 삼켜진 모양이군.]
백랑이 주둥이를 벌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기괴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피 냄새를 쫓는 사냥꾼의 이빨 자국은…… 아직도 이 건물 주변의 영맥을 끈질기게 맴돌고 있다.]
민우는 바닥에 새겨진 피의 낙인을 짚은 채 손가락 끝을 살짝 떨었다.
정령청의 삼엄한 수색을 피해 도망쳐 온 안전한 대피소라 굳게 믿었던 이 비좁은 골방조차, 이미 이면 세계의 피비린내 나는 또 다른 사냥터였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민우의 푸른 영안이 어두운 골방의 침묵 속에서 다시금 차갑고 서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청파동의 밤은 무사히 탈출했지만, 도심 한복판에서 생존을 건 소년의 진짜 싸움은 이제 겨우 서막을 올렸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