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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의 요괴 계약자2화

백야의 요괴 계약자

백야의 요괴 계약자

2화: 위태로운 주종 관계

쿠구구구구!

머리 위를 받치고 있던 거대한 석조 대청 대들보가 쩍 갈라지는 굉음이 석실을 가득 채웠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돌가루와 흙먼지 너머로, 강민우의 손등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광채는 대요괴 백랑의 심장에 닿아 번쩍이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감히, 감히 하찮은 필멸자 놈이 내 목에 개줄을 채우려 드는구나!"

백랑은 목에 감긴 황금빛 사슬을 뜯어내기 위해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백색의 거대한 앞발이 석실의 바닥을 사정없이 내리칠 때마다 쾅, 쾅 하며 지진이 일어난 듯 충격파가 번졌다. 그 여파만으로도 민우는 갈비뼈가 으스러질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의 오래된 봉인 문양을 적실수록, 백랑의 목을 감싼 사슬은 더욱 사납게 조여들었다. 그것은 고대의 봉인진과 민우의 영안, 그리고 그의 특이한 영혼의 그릇이 결합하여 일어난 강제 예속 주술이었다.

"이 주박을 풀지 못할까! 당장 네놈의 목구멍을 찢어 피를 말려 버리겠다!"

백랑이 붉은 핏빛 눈동자를 부릅뜨며 아가리를 벌렸다. 송곳니 하나가 민우의 상체만 한 거대한 야수가 당장이라도 그의 머리를 물어뜯으려는 그 찰나였다.

지이이잉!

백랑의 이마에 새겨진 황금빛 계약의 인이 격렬하게 빛나며 고주파의 마찰음을 냈다.

"커헉……!"

백랑의 움직임이 단숨에 멈췄다. 치켜들었던 앞발이 허공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리더니, 이내 놈의 주둥이에서 신음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민우 또한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아아아악!"

심장을 뜨거운 인두로 직접 지지는 것 같은 살인적인 고통이었다.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듯한 불쾌하고 끔찍한 작열감이 온몸의 신경을 타고 흘렀다. 입안에서 비릿한 핏물이 울컥 차올랐다.

이것이 불완전한 예속 계약의 패널티였다. 영혼과 영혼이 강제로 결착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역류 현상. 민우의 피를 매개로 억지로 사슬을 채웠기에, 백랑이 민우를 향해 물리적인 살의와 공격을 감행할 때마다 가해지는 주박의 반동이 계약자인 민우에게도 고스란히 흘러드는 것이었다.

[인간…… 네놈이 죽으면 나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을 알고도 이 짓을 벌인 것이냐!]

뇌리를 찌르는 듯한 백랑의 웅장한 목소리가 정신을 잃어가던 민우의 머릿속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놈의 음성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와 깊은 불신, 그리고 자신마저 파멸로 몰고 갈 뻔한 인간 고등학생의 광기에 대한 경악이 섞여 있었다.

민우는 입가에 묻은 피를 거칠게 닦아내며 간신히 고개를 쳐들었다.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지만, 그의 영안(靈眼)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 알고 있어."

민우가 밭은 숨을 몰아쉬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니까 살고 싶으면 처신 똑바로 해, 이 개새끼야. 내가 죽으면 너도 끝이고, 다시는 그 잘난 빛 한 줌 안 드는 어둠 속에서 나오지 못할 테니까."

"네놈이…… 감히 나를 협박하는 거냐!"

백랑의 등털이 날카롭게 일어섰지만, 녀석은 더 이상 민우를 향해 발을 뻗지 못했다. 계약이 강제된 이상, 주인에게 해코지를 하려 할 때 영혼에 각인되는 고통은 대요괴조차 견디기 힘든 극약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석실을 지탱하던 정중앙의 석주가 굉음과 함께 반으로 쪼개졌다.

쿠쿠쿠쿠쾅!

"여기 완전히 무너진다. 빨리 움직여!"

민우는 옆구리의 부상을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위기 상황 속에서 완전히 개화한 그의 눈은 전혀 다른 세상을 보고 있었다.

평범한 시각으로는 그저 쏟아지는 낙석과 자욱한 먼지뿐이겠지만, 민우의 눈에는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푸른색과 붉은색의 마력 궤적이 실핏줄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봉인진이 부서지며 뿜어져 나온 에너지가 흘러나가는 구멍이 있었다.

"저쪽이야."

민우는 먼지 구덩이 너머, 비스듬히 위쪽으로 연결된 낡은 돌계단 통로를 가리켰다. 석조 불상 아래의 틈새가 아닌, 고대 주술사들이 비상시에 드나들던 숨겨진 통로가 틀림없었다.

"가자, 백랑! 여기 묻히기 싫으면!"

민우가 소리쳤지만, 백랑은 여전히 거대한 신체를 웅크린 채 오만하게 콧방귀를 꼈다.

"흥, 나약한 인간 놈아. 나의 본신(本身)은 발걸음 한 번으로 지상을 뒤흔드는 대요괴다. 이따위 흙더미에 깔려 죽을 염려 따윈 없으니, 나를 비웃거든 혼자 기어 나가 죽어라."

"부탁하는 거 아니야."

민우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며 손등의 계약인을 들어 올렸다. 붉은 마력이 손바닥을 감쌌다.

"명령이다. 들어와."

"무슨 짓을…… 크헉! 네놈이 감히 나를 어디로 가두려는—!"

백랑의 호통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약의 지배력이 사정없이 발동했다.

슈우우우!

백랑의 거대한 형체가 순식간에 은빛 안개로 화하더니, 민우의 발바닥 밑에 길게 뻗은 그림자 속으로 미끄러지듯 빨려 들어갔다. 마치 어두운 잉크가 종이 속으로 번져나가듯, 백랑의 영적 질량 전체가 민우의 그림자에 완벽히 귀속되었다.

"크아아악! 이 굴욕을 반드시…… 백 배로 갚아주마!"

마지막 단발마 같은 비명과 함께 석실을 가득 채우던 압도적인 살기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민우의 발밑에 드리운 그림자만이 평소보다 기이할 정도로 깊고 푸른 어둠을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하아, 하아…… 젠장, 무겁네."

백랑이 그림자 속으로 들어오자마자 민우의 어깨 위로 얹어지는 영적인 무게감이 상당했다. 민우는 이를 악물고 무너지는 석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돌계단을 달렸다. 영안을 통해 실시간으로 붕괴하는 천장의 약한 고리를 파악하며 아슬아슬하게 낙석들을 피했다.

계단 끝에 다다르자 철로 된 낡은 해치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민우는 어깨로 해치를 강하게 밀어젖혔다.

쾅!

바깥으로 나오자 차가운 빗줄기가 온몸을 적셨다. 골목길의 인적이 드문 하수도 빗물받이 틈새였다. 민우는 젖은 몸을 밖으로 끌어올린 뒤 빗물 섞인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뒤를 돌아보자, 오래된 한옥 본채가 완전히 폭삭 주저앉으며 지하실로 통하는 모든 흔적을 흙더미 속으로 묻어버리고 있었다.


밤이 깊은 청파동의 어느 낡은 옥탑방.

양판지로 벽을 대충 마감한 방 안에는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쓸쓸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민우는 젖은 교복 상의를 벗어던지고 바닥에 앉아 구급상자에서 꺼낸 소독약과 붕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그의 옆구리에는 백랑의 손톱 끝에 스쳐 찢어진 서너 줄기의 깊은 상처가 붉게 벌어져 있었다.

"으으윽……!"

소독약을 상처 부위에 들이붓자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에 절로 신음이 튀어 나왔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눈가로 흘러내렸다. 간신히 지혈하고 붕대를 꽁꽁 동여맨 민우는 낡은 매트리스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긴장이 풀리자 뼈마디가 통째로 쑤셔왔고, 영혼을 갉아먹는 듯한 피로감이 해일처럼 덮쳐왔다. 민우는 저항할 틈도 없이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스스스스.

얼마나 잠들었을까.

잠결에 느껴지는 기이한 냉기에 민우는 본능적으로 눈을 떴다.

이불을 턱 밑까지 덮고 있었음에도 입을 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방 안의 온도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급랭하고 있었다. 창문 유리창에는 하얗게 성에가 끼기 시작했고, 컵에 담아둔 물 표면이 딱딱하게 얼어붙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 새끼가 결국."

민우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매트리스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영안이 방 안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포착했다. 방구석, 가장 짙은 어둠이 고인 책상 아래 그림자로부터 푸른빛을 띤 탁한 냉기가 뱀처럼 똬리를 틀며 침대를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의 중심에서 기괴할 정도로 붉은 안광 두 개가 번뜩였다.

[흐흐흐, 잠에서 깨어났느냐? 하찮은 필멸자 놈. 인간의 육신이란 참으로 가련하도록 약하구나. 이 정도 기온을 견디지 못하고 심장이 멈추려 하다니.]

그림자 속에서 울리는 백랑의 목소리는 조소로 가득했다. 직접적인 공격은 계약의 제약으로 불가능하지만, 민우가 잠든 사이 주변 환경의 온도를 낮춰 동사(凍死)시키는 우회적인 살해 방식을 시험해 본 것이었다.

"이게 계약의 빈틈을 노린 공격이라는 건가."

[그렇다. 나는 그저 기운을 조금 흘려보냈을 뿐. 네놈의 심장이 나약하여 스스로 얼어붙는 것까지 계약이 강제로 막아주지는 않더군. 이것이 너와 나의 격차다.]

점점 더 사나워지는 냉기가 민우의 발목을 타고 올라와 얼어붙게 만들기 시작했다. 극심한 한기가 뼈를 찔렀지만, 민우의 표정에는 공포가 아닌 짙은 혐오와 차가운 이성만이 맴돌았다.

"역시 짐승은 매를 아끼면 안 되는 법이지."

민우가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손등에 새겨진 계약의 낙인이 붉게 타오르며 옥탑방의 어둠을 밝혔다.

[네놈이…… 무엇을 하려는—!]

"꿇어."

민우가 낮게 읊조린 순간, 그의 발밑에 숨겨져 있던 은빛 사슬이 번개처럼 그림자 속을 파고들어 백랑의 숨통을 휘감았다.

콰아아앙!

기형적으로 휘몰아치던 냉기가 단숨에 분쇄되며, 그림자 속에서 거대한 은빛 야수가 방바닥으로 강제 소환되어 처박혔다. 옥탑방의 좁은 천장에 머리를 크게 부딪친 백랑은 비참하게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악! 내 영혼이…… 타들어 간다!"

백랑은 목을 움켜쥐고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민우가 정신을 집중해 주박을 가동하자, 백랑의 영혼에 새겨진 황금빛 굴레가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놈의 신격을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커흑! 인간…… 멈춰라! 제발 당장 멈추지 못할까!"

"몇 번을 말해야 알아처먹겠냐."

민우는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뒹구는 백랑의 앞으로 다가갔다. 대요괴의 거대한 몸이 민우의 발끝 아래에서 자존심도 없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민우는 얼음장보다 차가운 눈으로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어. 네가 쥐새끼처럼 잔꾀를 부릴 때마다, 그 대가는 네놈 영혼이 가장 먼저 치르게 될 거다."

"크으윽…… 네놈을 죽이고 계약을 파기하면 그만이다!"

"할 수 있으면 해봐. 하지만 그전에 네 잘난 영혼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게 더 빠를 거다. 안 그래?"

민우가 손가락을 가볍게 퉁기며 주박의 힘을 한 단계 더 올렸다.

지이잉!

백랑의 붉은 눈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수백 년 전 대륙을 호령하던 요괴의 왕으로서 겪는 굴욕과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증에, 백랑은 이빨을 짓씹으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끄으으…… 항복이다! 내 패배를 인정할 테니 멈춰라, 인간!"

백랑이 꼬리를 내리는 선언을 하자 민우는 그제야 주박의 힘을 서서히 거두었다. 붉게 타오르던 사슬의 빛이 꺼지자 백랑은 바닥에 엎드린 채 헐떡였다.

민우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백랑의 눈높이에 맞춰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백랑. 거래를 제안하지."

"……감히 나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것이냐? 목줄을 쥔 주제에 조롱하는군."

"조롱이 아니야. 상호 이익을 챙기자는 거지. 너는 계약자로서 나를 보호하고 내 명령에 복종해. 그 대신, 나는 네가 잃어버린 신격과 마력을 되찾을 수 있도록 최대한 돕겠다."

백랑의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졌다.

"내 피와 영혼의 그릇이 아니었다면 넌 아직도 저 차가운 불상 밑에서 썩어가고 있었을 거다. 인정하지?"

백랑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지독할 정도로 정확한 팩트였다. 자신을 가두고 있던 고대의 강력한 결계를 파괴하고 봉인을 강제로 깨뜨린 원동력은 바로 눈앞에 있는 소년의 비정상적인 영적 그릇이었다.

"그리고 네 힘이 완전히 회복되고, 내가 더 이상 네 도움 없이도 이 이면 세계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되는 날……."

민우가 백랑의 핏빛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었다.

"그날, 계약을 완전히 깨고 널 자유롭게 해줄게."

방 안에는 적막만이 맴돌았다. 백랑은 은빛 안개 사이로 소년의 눈빛을 관찰했다. 거기에는 그 어떤 거짓이나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철저한 계산과 생존을 향한 집념만이 있을 뿐이었다.

[……네놈이 만약 약속을 어긴다면, 그 즉시 네 영혼의 파편조차 남기지 않고 씹어 삼켜 주마.]

"약속하지. 그러니까 쓸데없는 짓거리로 기운 빼지 마."

민우가 손을 젓자 백랑은 다시 묵묵히 연기처럼 흩어져 그림자 속으로 돌아갔다. 방 안을 옥죄던 서리가 걷히며 온기가 서서히 되찾아왔다.

민우는 매트리스로 돌아가는 대신, 창틀로 다가가 바깥 골목을 내다보았다.

빗줄기는 아까보다 잦아들었지만 청파동의 밤은 그 어느 때보다 음산했다.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계약자.]

그림자 밑에서 백랑의 무거운 경고가 들려왔다.

[내가 갇혀 있던 봉인이 박살 나며 유출된 마력의 냄새를 녀석들이 맡았다. 굶주림에 미쳐버린 귀물들이 이 주변으로 기어들기 시작했단 뜻이다.]

"귀물……?"

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창문에 이마를 바짝 댔다.

영안의 초점을 외부 골목길로 집중하자,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로등 불빛 아래 흩날리는 빗방울 사이로, 평범한 아스팔트 바닥 위를 기어 다니는 검붉은 탁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악취와 원망이 섞인 듯한 기괴한 에너지의 흐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건너편 주택가 붉은 벽돌 건물의 외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기괴한 그림자가 민우의 시야에 잡혔다.

스스스스.

인간의 팔다리를 기형적으로 꺾으며 거미처럼 벽을 타는 괴물이었다. 녀석의 얼굴에는 인간의 얼굴 가죽 대신 핏빛으로 번뜩이는 여러 개의 붉은 눈알이 불규칙하게 박혀 있었다.

벽을 타던 괴물은 이윽고 민우가 서 있는 옥탑방 창문을 향해 서서히 고개를 꺾어 올렸다.

번뜩!

기괴한 요괴의 수십 개의 붉은 눈동자가 민우의 영안과 허공에서 정확히 충돌했다.

민우의 등줄기를 타고 찌릿한 소름이 돋았다.

백랑과의 주종 관계를 겨우 확립한 첫날 밤, 이면 세계의 진짜 포식자들이 옥탑방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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