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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의 요괴 계약자17화

백야의 요괴 계약자

백야의 요괴 계약자

17화: 1급 수장고

청파고등학교 구관을 빠져나온 순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안개처럼 얇게 흩어지던 물방울이 학교 담장을 넘을 즈음엔 굵은 빗줄기로 변했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가로등 불빛이 길게 번졌고 멀리 정령청 순찰 차량의 경광등이 붉고 푸른 잔상을 남기며 어둠을 갈랐다.

민우는 후드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은하린의 뒤를 따랐다. 흑영의 그림자가 발밑에 얇은 막을 펼쳐 물소리와 발소리를 삼켰다. 학교 지하에서 뜯어낸 황동빛 인장은 그의 주머니 안쪽에서 차갑게 흔들렸다.

"남은 시간은?"

"스물세 분."

은하린은 손목 단말기를 확인하며 낮게 대답했다. 그녀의 어깨 곁에 엉겨 있던 자줏빛 안개 속에서 맥이 흐릿하게 눈을 떴다. 청파고 지하에 박아 둔 기폭 침들이 아직 잠잠한지 맥의 코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본부 외곽 감시망은 학교 쪽 긴급 대기조에 절반이 빠져 있어. 그래도 지하 3층은 그대로야. 거긴 본부가 무너져도 마지막까지 닫히는 곳이니까."

"그 정도는 예상했다."

민우의 목소리는 평온했으나 등 뒤 영맥은 뜨겁게 뒤틀리고 있었다. 경비원을 처단할 때 백랑과 흑영의 힘을 동시에 밀어 넣은 여파가 아직 남아 있었다. 맥의 억제 안개가 통증을 눌러 주고 있었지만 눌린 통증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검은 결절점 안쪽에서 서리와 음기가 서로를 갉아먹는 감각이 선명했다.

[애송이여, 발끝이 조금 무뎌졌구나. 벌써 쓰러질 셈이냐?]

백랑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의식 아래에서 울렸다.

'시끄럽다.'

[주인님, 인장 복제 주파수는 안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본부 필터를 통과하면 유지 시간이 급격히 줄어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얼마나.'

[필터 강도에 따라 다르나 십 분 이하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민우는 주머니 속 인장을 움켜쥐었다.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정령청 본부는 도심 업무 지구의 오래된 행정 건물처럼 위장되어 있었다. 밤이 깊은 시간에도 유리 외벽은 희미한 회색 빛을 머금고 있었고 정문 앞에는 일반 경비원처럼 보이는 남자 둘이 서 있었다. 그러나 영안을 열자 건물 전체를 감싼 법륜형 결계가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천천히 회전하는 모습이 드러났다.

은하린은 망설임 없이 옆문으로 향했다. 그녀가 자신의 신분 인장을 문 옆 단말기에 대자 금빛 선이 손목을 훑고 지나갔다.

삑.

문이 열렸다.

"네 차례야. 흑영이 씌운 주파수를 절대 흔들지 마. 이중 계약 필터가 여기서부터 작동해."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단말기 앞에 섰다.

검은 그림자가 그의 왼팔을 타고 올라와 얇은 장갑처럼 손등을 덮었다. 그 위로 황동빛 인장에서 복제한 정령청 요원의 령격이 금색 문양처럼 번졌다. 겉으로는 완벽했다.

단말기의 빛이 민우의 손목을 훑는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단순한 출입 검사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바늘 수백 개가 피부와 영맥 사이를 파고들며 그의 안쪽을 뒤졌다. 백랑의 얼음 냄새와 흑영의 그림자 결이 서로 다른 층에서 걸렸다. 단말기 위 녹색 빛이 노란색으로 떨렸다.

삐이익.

경보가 울리기 직전의 짧고 날카로운 예비음이었다.

은하린의 손이 권총집 근처로 내려갔다. 민우는 숨을 멈추고 하단전의 영 그릇을 접었다. 백랑의 한기를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흑영의 음기도 펼치지 않았다. 두 힘을 억지로 누르는 대신 서로의 가장자리를 맞물리게 했다.

얼음은 그림자의 형태를 얻고 그림자는 얼음의 온도를 입었다. 서로 다른 두 령격이 한순간 같은 박자로 낮아졌다.

녹색 불빛이 다시 켜졌다.

철문이 조용히 열렸다.

민우는 문턱을 넘은 뒤에야 짧게 숨을 내쉬었다. 혀끝에 피 맛이 번졌고 등뼈를 타고 오른 섬뜩한 균열음이 귀 안쪽에서 울렸다. 실제로 뼈가 갈라진 소리는 아니었지만 영맥의 결절 하나가 버티는 방식을 바꾼 것이 분명했다.

"괜찮아?"

"걷는 데 문제 없다."

"그건 대답이 아니야."

"지금 필요한 대답은 그거다."

은하린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복도 끝 비상 승강기 쪽으로 빠르게 걸었다. 본부 내부는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밤 근무 인원들이 각 층 관제실에 묶여 있었고 외곽 기동대는 학교 주변 사태를 기다리며 대기 중이었다. 폭풍 전의 적막이었다.

승강기는 지하 2층까지만 내려갔다. 지하 3층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은 별도의 봉인문 뒤에 있었다.

은하린은 단말기를 꺼내 봉인문 하단의 은색 접점에 꽂았다. 푸른 회로가 문 위로 퍼지다 중간에서 끊겼다.

"여기서부터는 내 권한으로 안 열려. 네 복제 인장이 필요해."

민우가 손을 올렸다. 흑영의 그림자가 다시 금빛 령격을 뒤집어썼다. 그러나 이번엔 손등의 문양이 흐릿하게 번졌다. 조금 전 필터를 지나며 인장 주파수가 벌써 소모된 탓이었다.

[주인님, 남은 안정 시간은 약 칠 분입니다.]

"충분해."

그가 문에 손을 대자 거대한 법륜 문양이 떠올랐다. 문양은 민우의 령격을 받아들이는 듯하다가 갑자기 안쪽에서 날카로운 하얀 선을 뻗었다. 등록 인장과 영혼 주파수의 깊은 층을 대조하는 장치였다.

민우는 이를 악물었다. 단순히 외피를 위장하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인장이 품고 있던 정령청 요원의 잔류 령격을 흑영이 베껴 냈다면 그 안쪽의 박동은 백랑의 한기로 고정해야 했다.

[크하하! 정령청 놈들의 문지기가 제법 꼼꼼하군!]

'웃지 말고 맞춰.'

백랑의 한기가 실처럼 좁아졌다. 흑영의 그림자 장막 안쪽으로 들어간 서리는 금빛 주파수의 틈을 하나씩 얼려 고정했다. 민우는 자신의 영혼을 그 위에 얇게 눌러 숨겼다.

철컥.

봉인문이 열렸다.

그러나 문이 열리는 순간 본부 천장 전체에서 붉은 등이 켜졌다.

은하린이 웃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정확히 터졌네. 이제 본부 인원이 학교로 빠질 거야. 동시에 지하 보안도 잠긴다는 뜻이지."

"뛰어."

두 사람은 지하 3층 계단을 단숨에 내려갔다.

1급 수장고 앞은 사찰의 내전처럼 고요했다. 검은 석재로 만든 복도 양쪽에 부적이 새겨진 기둥들이 늘어서 있었고 맨 끝에는 둥근 금속문이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 문 위에는 용과 학이 뒤엉킨 낡은 법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민우가 다가서자 문장이 눈을 뜨듯 빛났다.

은하린이 속삭였다.

"령격 동조 결계야. 등록 인장과 사용자의 령격이 동시에 맞아야 열려. 강제로 부수면 수장고 전체가 봉쇄돼."

민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바닥을 문 중앙에 붙였다. 흑영이 복제한 금빛 인장이 문 안쪽으로 스며들었고 백랑의 한기가 그 주파수를 깨지지 않게 붙들었다.

심장 박동이 느려졌다.

하나.

둘.

셋.

문 안쪽에서 무언가가 민우의 영혼을 들여다보았다. 차갑고 무표정한 시선이었다. 정령청이 수십 년간 쌓아 올린 규칙과 의심이 형체를 얻어 그의 정체를 벗기려 했다.

민우는 그 시선 앞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영혼 가장 밑바닥에 백랑과 흑영의 힘을 납작하게 접어 넣었다. 금빛 령격의 껍데기만 문 앞에 남겼다.

잠깐의 침묵 뒤, 둥근 금속문이 무겁게 옆으로 밀렸다.

수장고 안은 좁지 않았다. 오래된 목함과 봉인된 유리관, 붉은 천으로 감싼 부적 더미들이 층층이 늘어서 있었다. 어떤 유리관 안에서는 손톱만 한 검은 비늘이 살아 있는 심장처럼 뛰고 있었고 어떤 목함에서는 낮은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구경할 시간 없어. 중앙 서가, 푸른 봉인끈이 묶인 목갑."

은하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민우는 중앙으로 움직였다. 영안의 시야 속에서 수많은 유물의 령압이 서로 엉겨 소용돌이쳤다. 그중 유독 맑고 고요한 흐름이 하나 있었다. 불도 얼음도 그림자도 아닌, 서로 다른 기운을 한 줄기로 엮어 숨 쉬게 하는 푸른 흐름.

민우는 목갑을 집었다.

그 순간 수장고의 붉은 등이 검게 변했다.

천장에서 금속 격벽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입구가 닫히기까지 남은 틈은 손바닥 두 개 너비도 되지 않았다.

"민우!"

은하린이 먼저 몸을 날려 틈 밖으로 빠져나갔다. 민우는 목갑을 품에 끌어안고 입구로 달렸다. 그러나 수장고 안쪽 바닥에서 붉은 부적 사슬이 솟구쳐 그의 발목을 휘감았다.

정식 반출 절차 없는 유물 이동을 막는 마지막 함정이었다.

[찢어 버리겠습니다!]

'소리 내지 마.'

민우는 백랑의 한기를 발목 아래로 떨어뜨렸다. 사슬이 얼어붙은 순간 흑영의 그림자가 사슬 안쪽 문양을 먹어 치웠다. 부적 사슬은 찢어지는 대신 재처럼 조용히 무너졌다.

격벽이 어깨 높이까지 내려왔다.

민우는 달렸다.

마지막 순간, 은하린의 맥이 자줏빛 안개로 긴 코를 뻗어 민우의 손목을 감았다. 동시에 민우는 왼손에서 얼음 쐐기를 만들어 격벽 아래에 박아 넣었다.

끼기기긱!

금속이 얼음에 걸려 찰나 동안 멈췄다. 민우의 몸이 틈을 통과했고 격벽은 그의 뒤꿈치를 스치며 바닥에 박혔다.

쾅.

수장고가 닫혔다.

민우는 복도 바닥을 구르다 목갑을 놓치지 않기 위해 팔을 더 세게 감았다. 은하린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챙겼어?"

민우는 목갑의 푸른 봉인끈을 확인했다.

"천화조율주법. 확보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본부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위층에서 요원들의 발소리가 폭우처럼 쏟아졌고 통신 방송은 청파고 폭주 대응 지시를 반복했다. 정령청의 눈이 학교로 향하는 바로 그 틈이었다.

은하린은 맥의 안개를 넓게 펼쳤다. 보랏빛 연무가 복도에 번지며 두 사람의 형체를 야간 근무 요원 둘로 바꾸어 씌웠다. 민우는 흑영의 그림자로 발소리를 지웠고 백랑의 한기로 감시 부적의 회전축을 순간적으로 얼려 시선을 비껴가게 했다.

승강장 앞에서 실제 요원 한 명과 마주쳤다.

"지하 3층에서 올라오는 겁니까? 봉쇄 확인은?"

은하린이 지체 없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맥의 보랏빛 안개가 요원의 동공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확인 완료. 학교 쪽 지원 명령이 우선이다."

"아, 예. 지원 명령 우선."

요원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갔다.

비상문을 통과해 바깥 골목으로 빠져나온 뒤에야 민우는 걸음을 멈췄다. 빗줄기가 얼굴을 때렸다. 차가운 물이 입술을 타고 흘렀는데 피와 섞여 있었다.

"민우?"

은하린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민우는 목갑을 품에 안은 채 무릎을 꿇었다. 하단전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찢어지는 감각이 올라왔다. 백랑의 서리와 흑영의 음기가 방금까지 강제로 맞물렸던 반동으로 서로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맥의 억제 안개가 그 틈을 막으려 했으나 이미 벌어진 균열은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큼 넓어져 있었다.

"커흑."

검붉은 피가 그의 입술 밖으로 튀었다.

은하린이 그를 붙잡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여유가 사라졌다.

"무리했다는 말로 끝날 상태가 아니잖아. 당장 안전 가옥으로 가야 해. 주법을 손에 넣었으면 바로 펼쳐야 해."

민우는 떨리는 손으로 목갑을 은하린에게 넘기지 않고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

"내가 들고 간다."

"고집부릴 때가 아니야."

"내 목숨줄이다. 남 손에 안 맡겨."

은하린은 이를 악물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민우의 팔을 자기 어깨 위로 걸쳤다. 맥의 안개가 두 사람을 감싸 빗속의 어둠과 같은 색으로 녹여 냈다.

멀리 청파고등학교 방향에서 붉은 섬광이 밤하늘을 찢었다. 강현과 정령청 대원들이 그쪽으로 몰려가고 있을 것이다. 본부 수장고가 털렸다는 사실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민우는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목갑의 푸른 봉인끈을 놓지 않았다.

살아남을 방법은 손에 넣었다.

이제 문제는, 그 방법을 펼치기 전까지 자신의 몸이 버텨 주느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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