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의 요괴 계약자

18화: 목숨을 거는 조율
은하린의 안전 가옥은 폐쇄된 인쇄소 지하에 있었다.
비에 젖은 골목 끝 철문을 지나 계단을 내려가자 눅눅한 종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벽마다 붙은 낡은 광고지는 빛을 잃은 채 너덜거렸고 계단 아래의 철문에는 붉은 부적 세 장이 겹쳐 붙어 있었다.
은하린이 손등을 문에 댔다. 맥의 자줏빛 안개가 부적 문양을 훑자 잠금이 낮게 울렸다.
"안으로 들어가. 여기까지 따라온 기척은 없어."
민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목갑을 안은 팔에 힘이 풀렸다. 발밑이 한 번 기울이자 은하린이 곧바로 그의 어깨를 받쳤다. 맥의 안개가 몸을 감쌌지만 하단전 안쪽의 균열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주인님, 영맥 결절점 세 곳이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버텨.'
[명령만으로 멈출 손상이 아닙니다.]
흑영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철문 안쪽은 작은 작업실이었다. 오래된 인쇄기가 벽을 따라 놓여 있었고 바닥에는 희미한 은색 선으로 그린 원형 진이 세 겹 겹쳐 있었다. 천장의 전등 하나가 흔들리며 작업대 위를 노랗게 비췄다.
은하린은 민우를 가장 안쪽 진 중앙에 앉혔다.
"여긴 외부 령압을 세 겹으로 잘라 내. 정령청 추적 부적도 쉽게 못 들어와."
"쉽게가 아니라 아예 못 들어오게 해."
"지금은 그 말 할 기운도 아껴."
민우가 목갑을 놓지 않자 은하린은 손을 뻗다 멈췄다. 억지로 빼앗을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대신 작업대 위에 소금과 청동 못, 검은 실타래를 꺼내 놓고 맥에게 짧게 손짓했다.
자줏빛 안개가 진 바깥을 한 바퀴 돌았다. 안개가 지나간 자리마다 바닥의 은색 선이 조금씩 밝아졌다.
진의 첫 번째 원은 바깥에서 밀려드는 령압을 흩어 냈다. 두 번째 원은 흩어진 기운을 맥의 안개에 섞어 방향을 잃게 했다. 마지막 원은 민우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서리와 그림자를 안쪽으로 되밀었다.
그러나 마지막 원의 빛은 이미 여러 곳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결계가 민우를 치료하는 게 아니라 폭발할 자리를 좁은 원 안에 가둬 두고 있을 뿐이라는 뜻이었다.
민우의 손등 위로 검은 핏줄이 올라왔다. 손가락 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등 뒤에서는 불에 달군 쇠꼬챙이를 박아 넣은 듯한 통증이 치솟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목갑의 푸른 봉인끈을 내려다보았다.
"열면 돌이킬 수 없을 수도 있어."
은하린의 목소리가 조용해졌다.
"안 열어도 죽어."
민우는 푸른 끈을 잡아당겼다.
툭.
봉인끈이 끊어지며 목갑 안에서 서늘한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안에는 손바닥만 한 옥빛 목패와 접힌 비단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비단에는 글자가 없었지만 민우가 영안을 열자 푸른 선들이 물결처럼 솟아올랐다.
그 선은 곧장 민우의 하단전을 향했다.
지직!
등 뒤 영맥이 튀며 민우의 몸이 앞으로 꺾였다. 입안에서 피가 쏟아졌다. 바닥에 떨어진 피가 진의 은색 선을 타고 번지자 비단 위 문장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서로 다른 령격을 누르지 말 것.
서로 다른 령격을 섞지 말 것.
계약자의 령핵을 실로 삼아 두 흐름 사이에 길을 만들 것.
은하린의 눈빛이 굳었다.
"이건 치료법이 아니야. 네 령핵을 중심축으로 삼으라는 주법이야."
"알고 있다."
"이대로 하면 네가 둘의 충돌을 전부 받아 내야 해."
민우는 비단의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조율선이 끊기면 계약자는 빈 그릇이 되고 남은 령격은 그 빈자리를 차지한다.
백랑의 웃음이 의식 깊은 곳에서 낮게 울렸다.
[크하하. 재미있는 말이로군. 네놈이 부서지면 누가 남을지 정하라는 뜻인가?]
[주인님께 위험이 지나칩니다. 이 의식은 중단하셔야 합니다.]
"둘 다 입 다물어."
민우의 목소리는 갈라졌으나 흔들리지 않았다.
"날 살리겠다고 훔쳐 온 주법이다. 지금 멈추면 여기까지 온 의미가 없다."
은하린이 비단을 다시 살폈다. 그녀의 손끝이 마지막 줄에서 멈췄다.
"첫 조율은 계약 요괴 둘이 서로의 본체를 향해 힘을 밀어야 시작돼. 그런데 그 충돌을 멈추는 건 너야. 네가 중심을 잃으면 둘 중 하나가 다른 쪽을 밀어낼 거고 그 반동이 네 영맥을 찢어."
"준비해."
"민우."
"지금은 네가 물러날 때가 아니다. 결계만 지켜."
은하린은 잠시 그를 노려보다 청동 못을 진의 여덟 방향에 박았다. 맥의 안개가 못마다 감기며 천장까지 이어지는 얇은 막을 만들었다.
"맥이 네 의식에 직접 들어가진 못해. 대신 네 몸이 멈추지 않게 바깥을 붙들어 둘게."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옥빛 목패를 양손 사이에 끼우고 눈을 감았다.
차가운 서리가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바닥 아래에서 끝없는 그림자가 올라왔다.
세 겹의 결계와 작업실의 냄새가 멀어졌다. 민우가 눈을 뜬 곳은 얼어붙은 벌판과 검은 늪이 맞닿은 경계였다. 하늘에는 별 하나 없었고 한쪽에는 백랑이 하얀 숨결을 토하며 서 있었다.
반대편 그림자 속에는 흑영의 붉은 눈이 떠 있었다.
[애송이여, 이곳까지 나를 끌어냈으면 명령을 내려라.]
[주인님, 명령하시면 흑영은 힘을 거두겠습니다.]
"둘 다 힘을 거둬선 안 돼."
민우가 두 존재 사이로 걸어갔다.
"서로를 향해 밀어 넣어."
흑영의 그림자가 출렁였다.
[그리하면 주인님의 영혼이 먼저 찢어집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다."
백랑이 긴 이빨을 드러냈다.
[저 하찮은 그림자와 내 힘을 나란히 세우겠다는 것이냐?]
"나란히 서라고 한 적 없다."
민우는 손바닥을 펼쳤다. 현실에서 쥔 목패의 푸른 빛이 이곳에도 가느다란 선으로 나타났다.
"내 명령에 맞춰라."
백랑의 앞발이 얼어붙은 땅을 짓눌렀다. 흰 폭풍이 민우를 향해 쏟아졌다. 동시에 흑영의 늪에서 검은 창 수십 개가 솟구쳤다.
서리와 그림자가 서로를 노린 채 민우의 가슴 앞에서 부딪쳤다.
콰아앙!
첫 충돌이 일어난 순간 민우의 영혼이 뒤집혔다. 현실의 몸이 진 위에서 크게 경련했다. 은하린이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들었고 맥의 안개가 콧속으로 스며드는 피를 막았다.
"민우! 박자를 잡아!"
민우는 의식 속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가슴 한복판이 찢어지며 푸른 선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백랑의 한기는 왼쪽 팔을 얼려 감각을 지웠고 흑영의 음기는 오른쪽 어깨를 검게 잠식했다.
그는 손을 뻗어 두 힘을 붙잡았다.
"하나."
백랑의 폭풍이 다시 밀려왔다.
"둘."
흑영의 창이 그림자를 뚫고 솟았다.
"셋."
이번에는 두 힘이 같은 순간에 멈췄다.
그러나 백랑이 으르렁거렸다.
[내가 왜 멈춰야 하지? 힘이 약한 쪽이 물러나는 게 자연이다.]
흑영의 그림자가 민우의 발목을 감쌌다.
[주인님, 흑영이 물러나겠습니다. 주인님의 령핵을 태우게 둘 수 없습니다.]
"안 돼."
민우는 피가 흐르는 입술을 닦았다.
"누가 물러나도 내 안은 다시 무너진다. 백랑은 내 칼이고 흑영은 내 그림자다. 둘 중 하나만 남으면 난 계약자가 아니라 반쪽짜리 그릇이 돼."
그 말과 함께 푸른 선이 한 번 끊어질 듯 흔들렸다.
민우는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붉은 빛이 흘렀다. 령핵을 태우는 대가였다. 그는 그 빛을 푸른 선 위에 눌러 바르듯 흩뿌렸다.
"그러니 나를 중심으로 돌아. 내 몸이 버티는 동안은 내 명령이 기준이다."
백랑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건방진 놈.]
하지만 백랑은 폭풍의 끝을 한 걸음 물렸다.
흑영도 늪에서 솟은 창을 거두었다.
[명령을 받듭니다.]
두 존재의 힘이 다시 밀려왔다. 이번에는 서로를 삼키려 하지 않았다. 백랑의 한기가 푸른 선 왼편을 따라 흐르고 흑영의 음기가 오른편을 타고 내려갔다.
민우는 두 힘이 만나는 가운데에 서서 이를 악물었다.
푸른 선이 하나의 고리로 이어졌다.
현실의 작업실에서 옥빛 목패가 밝게 빛났다. 진의 은색 선 위로 서리와 그림자가 반씩 번졌다가 푸른 빛에 눌려 고요해졌다. 민우의 등 뒤에서 터져 나오던 검은 기운도 천천히 가라앉았다.
은하린은 손을 떼지 못한 채 목패를 바라봤다.
"성립했어?"
민우는 눈을 뜨지 못했다. 숨이 끊어질 듯 가빴다.
"아직."
그때 목패 한가운데에 가느다란 금이 갔다.
푸른 빛이 진 바깥으로 튀며 천장 결계를 두드렸다. 맥이 놀라 안개를 세웠지만 파문은 멈추지 않았다. 목패 표면에는 민우와 백랑, 흑영의 박자와 전혀 다른 느린 맥박 하나가 떠올랐다.
은하린의 얼굴이 굳었다.
"뭐야. 이건 네 령격도 아니고 맥의 기운도 아니야."
민우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목패를 바라봤다. 푸른 문양은 마치 멀리 있는 누군가의 심장 소리를 받아 적듯 천천히 깜빡이고 있었다.
[주인님, 조율선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목패가 외부의 동종 주파수를 감지하고 있습니다.]
'같은 주법을 쓰는 놈이 있다는 건가.'
[판단할 정보가 부족합니다.]
민우의 가슴에서 마지막 경련이 지나갔다. 하단전의 균열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푸른 선이 그 틈을 가로질러 두 령격을 붙들고 있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왼쪽은 차갑고 오른쪽은 무거웠다. 고통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서로를 밀어내던 두 힘이 같은 박자 안에서 잠시 멈춰 있었다.
은하린은 진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목패의 파문이 결계에 남긴 푸른 얼룩은 한 번 더 바깥을 향해 떨렸다.
"이 반응이 밖으로 새면 누군가 알아챌 수 있어. 지금 당장 흔적을 지워야 해."
"아니."
민우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흔적은 숨겨. 하지만 반응은 기록해 둬. 저쪽도 이 주법을 쓴다면 언젠가 다시 울린다."
은하린은 잠시 침묵하다 단말기를 꺼냈다. 맥의 안개가 푸른 파문을 얇게 감싸자 목패의 빛은 천천히 안으로 수그러들었다.
목숨을 건 첫 조율은 끝났다.
하지만 목패는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낯선 맥박은 안전 가옥 밖 어딘가를 향해 계속해서 대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