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의 요괴 계약자

15화: 은밀한 경계망
어두컴컴한 자취방의 공기는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방 한구석의 미세한 틈새로 스며드는 가로등 불빛만이 장판바닥 위로 길게 누워 있을 뿐, 방 안에는 어떠한 소리도 나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인 낡은 탁상시계의 초침 소리조차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민우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자신의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미술실에서 은하린의 요괴 '맥'이 내뿜은 자줏빛 안개를 들이마신 이후, 지옥 같던 화상 통증과 영맥을 찌르던 서릿발의 고통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끊어질 듯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영혼의 그릇이 한결 부드럽게 이완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님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일주일인가……."
민우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영안의 감각을 내면으로 돌려 척추 뒤편의 영맥을 살피자, 맥이 주입해 둔 자줏빛 마력의 띠가 백랑의 서리와 흑영의 음기가 충돌하는 길목을 억지로 가로막아 완충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완충 작용이 가해진 하단전의 결절점들은 이미 검푸르게 착색된 상태였고, 미세한 균열이 그 주변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댐의 균열을 임시 점토로 때워둔 형국이었다. 일주일의 시간이 지나 점토가 녹아내리면, 그 뒤에 도사린 한기와 음기의 폭풍이 민우의 심장을 통째로 터뜨려 버릴 것이 분명했다.
'천화조율주법. 그 주법이 없으면 난 일주일 뒤에 죽는다.'
냉혹한 현실이 머릿속을 스치자 민우의 갈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때, 민우의 교복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검은색 무선 단말기가 징, 하고 묵직한 진동을 울렸다.
은하린이 미술실을 떠나기 직전 그의 손에 쥐여주었던 정령청 비공식 특수 수사대용 주파수 수신기였다. 민우가 단말기의 전원을 켜자, 붉은색 액정 화면 위로 홀로그램 형태의 입체 지도와 복잡한 이동 경로를 나타내는 화살표들이 춤추듯 펼쳐졌다.
동시에 기기 내부의 특수 스피커를 통해 은하린의 목소리가 얇은 노이즈와 함께 흘러나왔다.
- 수신 확인했지, 강민우? 약속대로 정령청이 내일 새벽 5시를 기점으로 청파동 일대에 전개할 추가 밀착 수색 계획서야.
민우는 화면을 응시하며 지도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수색 강도가 생각보다 높은데. 청파동 골목 구석구석에 임시 초소를 배치하는 모양이군."
- 맞아. 강현 대장이 바보는 아니거든. 어제 체육관 검진에서 널 통과시키긴 했지만, 령압 스캔 과정에서 네가 보여준 미세한 위화감에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어. 그래서 일부러 네 자취방이 위치한 블록을 핵심 정밀 순찰 경로에 편입시켰어. 오전 5시 정각에 요원들이 네 집 앞 골목을 이 잡듯 뒤질 거야.
화면 속에 뜬 붉은색 격자망이 민우의 원룸 건물을 붉게 가두고 있었다.
- 교문을 통과할 때 썼던 단순한 위상 반전으로는 이번 수색을 넘기 힘들 거야. 이번엔 이동식 령격 측정기뿐만 아니라, 요원들이 직접 마력 유도 탐침기를 들고 가가호호 주변 영맥 주파수를 조사할 테니까. 특히 이중 계약자의 흔적을 걸러내는 특수 필터를 작동시킨다고 해. 네가 백랑과 흑영의 힘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걸 강현이 눈치채는 순간, 넌 그 자리에서 즉시 처형 대상이야.
"대책은?"
- 오전 4시 30분. 수색대가 완전히 포위망을 좁히기 30분 전에 골목을 빠져나와. 순찰대 교대 시간이라 감시망에 딱 5분의 공백이 발생하는 지점이 있어. 내가 전송해 준 지도의 파란색 루트를 따라 움직여. 수색을 피해서 청파동 외곽의 낡은 철도 건널목으로 와. 거기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치익, 하는 파열음과 함께 단말기의 화면이 꺼지고 통신이 두절되었다.
민우는 단말기를 침대 위에 던져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하하, 재미있군. 그 눈치 빠른 정령청의 사냥개가 결국 네놈의 꼬리를 밟으려 하는구나. 애송이여, 어찌할 텐가? 여기서 그 사냥개의 목을 동결시켜 숨통을 끊어놓을 텐가?]
의식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백랑이 붉은 늑대의 이빨을 드러내며 쾌활하게 으르렁거렸다.
"날뛰지 마라, 백랑. 강현의 무력을 무시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 지금 강현과 부딪치면 정령청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주법을 얻기도 전에 개죽음을 당할 뿐이야."
민우는 옷장에서 검은색 후드티와 짙은 데님 팬츠를 꺼내 입었다.
[주인님, 흑영이 어둠의 길을 예비하겠습니다. 등 뒤의 상처는 가라앉았으나 물리적 기척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선 저의 그림자 표피 위장을 전개한 채 이동하셔야 합니다.]
그림자 속에서 흑영이 충직하게 속삭였다.
민우는 벽시계를 확인했다. 시침은 이미 새벽 4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준비해라."
민우가 현관문을 열고 서늘한 새벽 공기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새벽 4시 30분의 청파동 골목길은 푸르스름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어제 내린 비의 흔적으로 주택가의 낡은 옹벽과 보도블록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골목 구석구석에서 비린내 섞인 찬바람이 불어왔다. 하늘에는 아직 걷히지 않은 짙은 안개가 도심의 빌딩 숲을 뿌얗게 가로막고 있었다.
민우는 후드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은하린이 지시한 파란색 경로를 따라 신속하게 걸음을 옮겼다.
스우우우-.
그의 발끝에서부터 흘러나온 흑영의 검은 음기가 바지깃을 타고 올라와 상체 전체를 부드럽게 감쌌다. 주위의 빛을 흡수하여 존재감을 지워버리는 그림자 표피 위장이었다. 멀리서 보면 그저 벽면의 음영이 조금 짙어진 것처럼 보일 뿐, 인간의 물리적 형체를 식별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위기는 예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멀리 큰길가 모퉁이 너머로 붉고 파란 경광등 불빛이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징웅, 징웅 하는 기기식 마력 모터 소리가 골목의 정적을 깨뜨렸다.
"……순찰대가 조기에 움직였군."
민우는 골목 담벼락의 깊은 음영 속으로 몸을 밀착시키며 영안을 개방했다.
가까운 교차로 쪽에서 정령청 순찰 대원 세 명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법륜 문양이 새겨진 탐침기와 함께, 은하린이 경고했던 정밀 령격 스캐너가 들려 있었다. 장치의 둥근 레이더 판넬 위로 금빛 주파수 선들이 춤을 추며 사방으로 보이지 않는 탐지 파동을 뿌려댔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서, 잿빛 코트를 펄럭이며 걸어오는 사내가 있었다.
강현이었다.
강현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매서운 눈빛으로 골목의 담벼락과 전신주 위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 끝에는 푸른 천뢰 마력이 미세하게 지직거리며 흘러나와, 주위의 공기를 태우는 오존 냄새를 풍겼다.
"대장님, 이쪽 골목은 민가 지역입니다. 이중 계약 탐침기의 필터를 감도 최대치로 올려 둘까요?"
부하 요원의 질문에 강현은 걸음을 멈추고 민우가 서 있는 골목 안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너무나 예리하여, 민우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최대치로 올려라. 어제 체육관에서 만난 학생 중 하나가 계속 신경 쓰여. 령압 수치는 정상이었지만, 그 녀석이 흘리던 식은땀과 영맥 내부의 미세한 파동은 단순한 감기몸살의 그것이 아니었어. 내 천뢰 자극에 반응하지 않도록 영맥의 위상을 반전시켜 숨겼을 가능성이 있다."
강현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골목 벽에 반사되어 민우의 귀에 똑똑히 박혔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날카로운 직감이었다. 민우는 어둠 속에서 가만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서서히 좁혀오는 요원들의 발소리가 심장 박동을 재촉했다. 이제 남은 거리는 불과 10미터. 탐침기가 뿜어내는 금빛 탐지선이 민우가 몸을 숨긴 담벼락 음영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주인님, 탐침기의 주파수가 어제보다 훨씬 조밀합니다! 이대로는 그림자 장막이 찢어지고 맙니다!]
흑영의 전언에 민우는 이를 악물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어제 교문에서 썼던 위상 반전의 기법을 한 단계 더 극단적으로 끌어올려야 했다.
민우는 하단전의 영 그릇을 활짝 열어젖혔다. 맥의 마력이 감싸고 있는 통증 완화 장막의 틈새로 백랑의 서릿발 기운을 극소량 뿜어냈다. 그리고 침투해 들어오는 탐지선의 금빛 마력 주파수와 정확히 정반대의 진동을 제 몸 안에서 강제로 조율해 냈다.
스으으으-.
금빛 탐지파가 민우의 신체를 훑고 지나가는 바로 그 순간, 민우는 들어온 마력의 파동을 밖으로 밀어내지 않고 몸 안의 서리로 얼려 무력화한 뒤 흑영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게 했다. 마력을 집어삼켜 소멸시키는 기만 조율이었다.
쿵. 쿵. 쿵.
강현이 민우가 서 있는 벽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탐침기는 조용히 녹색등을 켜둔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강현은 잠시 멈춰 서서 민우가 서 있는 어둠을 응시했다.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 듯 그의 눈살이 찌푸려졌으나, 기계의 오작동 징후가 전혀 없자 이내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상 없군. 다음 블록으로 이동한다."
순찰 요원들이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사라지자, 민우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내며 벽을 짚었다.
"하아…… 하아……."
위상 반전을 위해 억지로 백랑의 한기를 끌어다 쓴 탓에, 봉인되어 있던 등 뒤의 영맥이 욱신거리며 타는 듯한 작열통을 뿜어냈다. 맥의 억제력이 작동하여 통증은 곧 사그라들었지만, 뇌수가 깨질 듯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시간이 없었다. 강현의 수사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밀했다. 서둘러 천화조율주법을 손에 넣어야만 이 기괴한 숨바꼭질을 끝낼 수 있었다.
민우는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은하린이 기다리는 철도 건널목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청파동 외곽, 도심의 소음이 미치지 않는 오래된 철도 건널목은 차단기가 내려진 채 굳게 닫혀 있었다.
선로 주변으로 자라난 잡초들이 안개 속에서 이슬을 머금고 누워 있었고, 낡은 신호등이 노란색 불빛을 깜빡이며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검은색 장우산을 쓴 은하린은 선로 옆 콘크리트 옹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녀의 발밑에는 보랏빛 안개의 형상을 한 '맥'이 웅크린 채 민우가 오는 방향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스윽.
어둠 속에서 민우가 후드를 푹 눌러쓴 채 모습을 드러내자, 은하린은 우산깃을 들어 올리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용케 빠져나왔네. 강현 대장이 직접 움직여서 걱정했는데 말이야."
"가까스로 넘겼다. 네가 말한 이중 계약 필터 때문에 하마터면 현장에서 강현의 전격에 튀겨질 뻔했지."
민우가 다가가며 차갑게 읊조렸다.
은하린은 민우의 창백한 얼굴과 땀에 젖은 앞머리를 보며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무리를 했군. 맥의 령압 조율이 있어도 요괴의 힘을 직접 쓰는 건 독이야. 본부 침투는 빠를수록 좋겠어."
그녀는 품 안에서 얇은 금속 칩 하나를 꺼내 민우에게 건넸다.
"이게 뭐지?"
"정령청 본부 1급 수장고의 내부 설계도와 일차 보안 시스템 주파수 데이터야. 수장고는 본부 지하 3층에 위치해 있는데, 단순한 물리적 잠금장치 외에 '령격 동조 결계'가 쳐져 있어. 침투 요원의 고유 령적 주파수가 정령청 등록 주파수와 일치하지 않으면 결계가 작동해 침입자를 통째로 가둬버리지."
민우는 금속 칩을 받아 주머니에 넣으며 물었다.
"그럼 내 령격 주파수를 정령청 요원의 것으로 위장해야 한다는 소리군. 흑영의 그림자 엮기로 요원의 기척을 복제하는 게 가능한가?"
[주인님, 대상의 살아있는 령적 파동을 직접 스캔하여 그 가죽 위에 음기를 직조해 낸다면 짧은 시간 동안은 완벽한 위장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정령청 정식 요원 한 명을 무력화하고 그 령격의 표본을 입수해야 합니다.]
그림자 속에서 흑영이 대답했다.
은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서 수장고를 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해결해야 할 일?"
"학교에 기생종 인공 요괴를 심은 실행범. 정령청 내부의 배신 세력과 신성그룹의 다리가 되어준 내부 조력자의 꼬리를 잡았어."
은하린의 눈동자가 선뜩한 보랏빛으로 번뜩였다.
"그 조력자는 청파고등학교의 밤을 지키는 야간 경비원이야. 신성그룹 주술 부서에서 돈과 약물을 받고, 학생들이 하교한 밤 시간대를 틈타 학교 본관과 과학실 지하 영맥 결절점에 기생종 령핵을 매설하는 작업을 도왔지. 그자의 몸에 정령청 고위층이 하사한 특수 주술 인장이 새겨져 있어. 그 인장을 탈취하면 수장고의 결계를 통과할 수 있는 령격 주파수를 얻을 수 있어."
민우의 입꼬리가 차갑게 비틀렸다.
"일타쌍피군. 인공 요괴를 살포한 배후의 단서를 잡고, 본부 침투에 필요한 주파수 인장까지 손에 넣는다."
"그래. 게다가 학교 내부에서 또 다른 인공 요괴 소동이 벌어지면, 정령청의 이목이 다시 학교로 쏠릴 거야. 본부의 경비가 일시적으로 허술해지는 타이밍을 만들 수 있지. 그 틈을 타서 우리가 수장고를 터는 거야."
은하린이 우산을 접으며 결연한 표정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새벽의 푸른 안개 너머로, 멀리 청파고등학교의 교사동 건물이 거대한 괴수의 실루엣처럼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늘 밤, 경비원이 순찰을 도는 밤 11시 정각에 학교 미술실에서 다시 봐. 사냥의 시간이야, 강민우."
민우는 주머니 속의 금속 칩을 꽉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푸른 영안이 새벽 어둠을 뚫고 다가올 치열한 전쟁터를 조용히 사냥꾼의 시선으로 내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