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의 요괴 계약자

14화: 미술실의 거래
방과 후의 교정은 등교할 때와는 또 다른 기묘한 가라앉음을 띠고 있었다.
시끄럽게 떠들던 학생들의 발소리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복도는, 창틀을 넘어 길게 들이닥친 진득한 노을빛으로 인해 마치 피를 흘려보낸 것처럼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공기 중을 떠도는 미세한 먼지 입자들이 붉은 광선 속에서 불규칙하게 춤추는 모습이 보였다.
민우는 교복 재킷의 칼라를 바짝 세워 목덜미를 가린 채, 3층 미술실로 향하는 차가운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디딤발에 힘을 줄 때마다 척추 깊은 곳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찌릿한 전기 충격이 전달되었다. 강현의 검문 탐침기에 직접 닿았던 등판의 상처가 자꾸만 욱신거렸다.
백랑의 서리를 억지로 주입해 신경을 얼려 둔 마취 효과가 조금씩 풀리고 있는 증거였다. 신경 세포가 되살아나며 유발하는 작열통과 동상의 칼날 같은 고통이 조율되지 못한 채 영맥 내부에서 뒤엉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흐읍……."
민우는 가방끈을 쥔 주먹에 흰 뼈마디가 드러나도록 힘을 주며 거친 호흡을 목구멍 안쪽으로 강제로 밀어 넣었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식은땀이 눈가를 적셨으나 닦아낼 여유조차 없었다. 영안의 푸른 시야를 얇게 개방하자, 교사동 연결 통로와 아래층 중앙 계단 근처에서 정령청 순찰 요원들의 묵직한 령압 주파수가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었다. 그들은 복도 구석구석을 돌며 결계를 파괴하고 도망친 '미등록 계약자'의 흔적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중이었다.
민우는 벽면에 길게 늘어진 노을 그림자와 창틀의 음영을 확인했다. 그리고 흑영의 어둠을 제 전신에 아주 얇게 코팅하듯 둘렀다. 자신의 존재감과 마력 파동을 개미 한 마리 수준으로 극소화하는 위장 제어였다.
순찰 요원들이 복도 모퉁이를 돌아 시선이 차단되는 바로 그 찰나, 민우는 유령처럼 미끄러져 3층 가장자리에 위치한 미술실의 낡은 나무 문 앞에 당도했다.
문고리에 손을 얹자마자, 정령청의 차가운 금속성 주술 전류도 아니고 신성그룹의 규격화된 상업 마력도 아닌, 기이하게 아늑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불길하게 가라앉은 독특한 결계 파동이 손끝의 감각을 자극했다. 오늘 아침 책상 서적 틈새에서 발견했던 쪽지 하단에 찍힌 짐승 령격 인장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주파수였다.
드르륵.
민우는 문을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미술실 내부는 온통 기괴한 회색과 붉은빛의 대조로 가득 차 있었다. 사방에 배치된 아그리파, 줄리앙, 비너스 등의 석고상들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핏빛 노을을 받아 붉고 어두운 음영을 뿜어내고 있었고, 텅 빈 캔버스들이 마치 무덤의 비석처럼 촘촘히 널려 있었다. 굳어버린 붓들이 가득 꽂힌 물통 주위로 특유의 꿉꿉한 아크릴 물감 냄새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옥상으로 통하는 뒷문 옆 창가에 기댄 채 서 있는 한 여학생이 있었다.
단정하게 다려 입은 청파고등학교의 교복 차림이었지만, 어깨뼈를 스치며 정갈하게 흘러내린 검은 단발머리와 노을빛을 반사하는 가녀린 목선이 이질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녀는 창밖 운동장에 줄지어 늘어선 정령청의 차량들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경계망이 촘촘해서 우회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 모양이네. 쥐새끼처럼 숨어 들어오는 솜씨는 합격점이야."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민우를 마주 보았다.
단정하고 깨끗한 인상의 얼굴이었지만, 예리하게 찢어진 눈동자 너머로 보랏빛 안개 같은 이채(異彩)가 어릿하게 일렁였다가 사라졌다. 평범한 고등학생의 껍데기를 쓰고 있으나 그 내면의 영혼은 상급 요괴의 파동으로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는 일종의 동류였다.
민우는 대답 대신 오른손을 교복 주머니에 밀어 넣은 채, 왼팔 전완부의 인장에 서서히 령기를 집중시켰다. 그의 그림자 밑바닥이 진득한 액체처럼 출렁이더니, 언제든 상대의 숨통을 꿰뚫을 수 있도록 흑영의 그림자 송곳들이 바닥을 타고 보이지 않게 뻗어 나갔다.
"쪽지를 남긴 장본인이 너였군. 정체가 뭐지?"
민우의 서늘한 질문에 소녀는 풋, 하고 가볍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창틀에서 등을 떼고 민우를 향해 세 걸음 다가왔다.
"3학년 5반 은하린. 학교에서는 평범한 수험생이고…… 이면 세계에서의 정식 신분은 정령청 비공식 특별 수사 조 소속 조사관. 그리고 눈앞에 있는 너처럼, 요괴와 영혼을 동조해 부리는 계약자야."
정령청 요원이라는 단어가 미술실의 차가운 공기를 단숨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정령청 요원이 미등록 계약자의 실체를 확인하고도 대장인 강현에게 고발하지 않고 비밀 쪽지로 호출했다라. 뻔한 함정이거나, 아니면 제정신이 아니거나 둘 중 하나겠군. 널 여기서 입막음하고 도망치면 정령청도 나에 대해 알 길이 없을 텐데."
민우의 눈동자가 깊고 푸른 영안의 안광으로 차갑게 물들었다. 그림자 송곳들이 은하린의 발바닥 바로 아래까지 솟구치기 직전의 타이밍이었다.
[주인님, 방심하지 마십시오. 저 계집이 품고 있는 영혼의 기틀은 얕지 않습니다. 단순한 기습으로는 결코 제압할 수 없을 만큼 견고한 벽이 느껴집니다.]
그림자 속에서 흑영이 사시나무 떨듯 경계하며 속삭였고, 백랑 또한 내면의 빙결 장막 뒤에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저 간사한 계집이 품고 있는 요기는 지극히 불쾌한 향취를 풍기는구나. 인간의 악몽을 먹어 치우고 환상을 길들이는 사악한 서쪽의 대요괴, '맥(貘)'의 냄새다. 애송이여, 성급하게 부딪치지 마라. 저 계집 뒤에 똬리를 튼 요괴의 권능은 네놈의 그 나약한 육신이 감당하기 버거울 터니.]
은하린은 민우가 뿜어내는 가공할 살기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살기등등한 건 좋은데, 나보단 네 걱정이나 하는 게 좋을걸? 그렇게 경직된 자세로 나한테 마력을 쥐어짜 내는 것만으로도 네 등 뒤의 영맥이 찢어지며 비명을 지르고 있잖아. 신경을 강제로 동결해서 감각을 죽여 놨다 한들, 한기와 음기의 물리적인 충돌 자체는 해소되지 않아. 그릇이 나약한 인간이 백랑과 흑영이라는 두 마리 상급 요괴의 기운을 다중으로 얽어맸으니 육체가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지. 이대로 사흘만 지나면 등뼈 뒤편의 영맥이 까맣게 괴사해서 네 심장을 멈춰 세울걸?"
민우의 잘생긴 미간이 어둡게 비틀렸다.
자신의 부상 상태와 체내에서 날뛰는 백랑의 서리, 흑영의 음기 충돌 메커니즘을 소름 끼치도록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지?"
"상관이 아주 많아. 왜냐면 난 네 영맥의 통증을 당장 억제해 줄 능력을 가지고 있고, 정령청의 눈을 피해야 하는 너에겐 내가 가진 정보와 권력이 아주 유용할 테니까. 무엇보다, 난 정령청 내부의 감시망을 피해 움직여 줄 '손발'이 필요하거든."
은하린이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가볍게 맞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스우우우-.
미술실 바닥 모퉁이의 그림자와 석고상 뒤편에서 짙은 자줏빛 안개가 몽환적으로 솟구쳐 올랐다. 안개는 공기 중을 헤엄치듯 휘돌더니, 이내 민우의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짐승의 형상으로 변모해 나갔다.
코끼리의 주둥이를 닮은 긴 코, 멧돼지의 날카로운 엄니, 곰의 단단한 몸통에 표범의 발을 지닌 전설 속의 환수—'맥(貘)'이 형형한 보랏빛 눈동자를 빛내며 안개 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맥이 기분 좋은 라벤더 향과 함께 낮게 가르릉거리며 민우를 향해 다가왔다. 민우는 즉시 백랑의 빙결 령기를 손바닥에 둘러 방어 태세를 취하려 했으나, 은하린이 조용히 손바닥을 내밀어 만류했다.
"가만히 있어. 아프게 하려는 게 아니라 성의를 보여주려는 것뿐이니까."
맥이 긴 주둥이를 내밀어 민우의 등덜미 쪽 허공을 향해 마치 냄새를 맡듯 스읍, 하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순간적으로 민우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보이지 않는 마력의 편린들이 맥의 주둥이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민우의 등뼈 뒤쪽에서 마그마처럼 들끓던 화상의 열기와 심장을 관통하려던 냉기의 비명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폭풍우가 치던 파도 위에 부드러운 안개가 내려앉아 사방을 고요하게 잠재우는 듯한 신비로운 이완이었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척추 근육이 풀어지고, 폐를 찌르던 서늘한 가시들이 일시에 녹아내려 평온한 호흡이 가능해졌다.
"……!"
민우는 자신도 모르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안도의 긴 숨을 내쉬었다. 몸을 짓누르던 극도의 피로감과 두통마저 일시적으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맥은 사람의 악몽과 정신적인 마력 파동을 먹어 치워. 네 영혼 속에서 제어하지 못하고 날뛰며 육체를 공격하던 과부하 령압을, 맥의 정신 간섭력으로 잠시 억누르고 다른 차원으로 우회시켜 준 거야. 영구적인 치료법은 아니지만, 적어도 일주일 동안은 고통 없이 멀쩡하게 움직이고 요괴의 힘을 부릴 수 있을 거야."
은하린은 자신의 계약 요괴인 맥의 목덜미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민우를 조용히 응시했다.
"이제 서로 마주 보고 대화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 같네, 강민우 학생."
민우는 천천히 호흡을 정돈하며 손바닥에 모았던 백랑의 한기를 완전히 흩뿌려 버렸다.
"원하는 거래 조건이 뭐지? 정령청 요원이 미등록 계약자에게 이 정도 호의를 베푸는 이유를 들어야겠군."
"말했잖아. 난 정령청 소속이긴 하지만 비공식 특수 조사 조 소속이야. 내가 진짜 쫓는 사냥감은 네가 아니라, 학교와 도심에 기생종 요괴를 살포한 진짜 배후야. 너, 어제 방송실에서 교사에게서 추출한 그 기생종의 령핵을 회수해서 숨겨두고 있지?"
은하린의 매서운 질문에 민우는 자취방 서랍 속 깊은 곳에 얼려둔 검붉은 결정을 떠올렸다.
"그 령핵은 자연 발생한 요괴가 아냐. 사신(四神) 중 하나의 요기 세포를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주술 공식을 입힌 '인공 요괴'지. 정령청 내부의 썩은 고위층 일부와, 주술 기업 신성그룹의 비밀 부서가 결탁해 청파고등학교를 첫 번째 생체 실험장으로 삼은 거야. 무고한 아이들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가면서 성능 테스트를 한 거라고."
소녀의 둥근 눈동자 속에서 들불 같은 차가운 분노가 번뜩였다.
"난 그 인공 요괴의 제조 공식을 폐기하고 제조책들의 목을 치고 싶어. 하지만 강현 대장이나 정령청의 공식 수사 라인은 너무나 고지식하고 멍청하지. 규칙과 체면에 얽매여 정작 내부의 진짜 적들이 단서를 인멸하는 시간을 벌어주고 있을 뿐이야. 그래서 난 법과 규칙의 장벽 바깥에서 자유롭게 칼을 휘둘러 줄 동조자가 필요해. 사냥꾼의 아가리를 돌파한 네가 가장 적합하지."
"난 내 목숨을 건 도박을 즐기지 않는다. 정령청 내부의 권력 암투나 네 복수극에 끼어들어 목숨을 바칠 이유는 더더욱 없고."
민우가 냉혹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히자, 은하린은 기다렸다는 듯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리며 매력적인 호선을 그려냈다.
"물론 공짜로 돕겠다는 멍청한 소리는 안 해. 네가 내 공조 요청에 응해준다면, 난 네 영맥의 괴사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다중 요괴 계약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주법의 단서를 주지."
그 단어에 민우의 심장이 묵직하게 고동쳤다.
"주법이라고?"
"그래. 네가 가진 그 압도적이고 거대한 영혼의 '그릇'에 걸맞은 육체적 기초를 다져주고, 서로 다른 상극의 요기를 영맥 내부에서 부딪치지 않고 완벽하게 조화시켜 줄 수 있는 주술 호흡법. 고대 주술 명가들이 사용했고, 지금은 정령청 본부 1급 수장고 깊숙한 금고에 비장되어 있는 고유 주법의 존재를 난 알고 있어. 그 이름은 '천화조율주법(天花調律呪法)'."
은하린은 맥의 머리를 가볍게 톡 치며 그것을 보랏빛 안개 너머로 돌려보냈다.
"정령청 본부 비밀 보관실에 그 비급서 사본이 잠겨 있어. 일반인이나 하급 주술사들은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하지. 하지만 내가 정령청 내부 요원 신분으로 보안 주파수와 정보망을 무력화해 주고, 네가 부리는 그 흑영의 그림자 침투 능력을 결합한다면…… 그 주법을 탈취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냐."
민우는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의 뇌리 속에서 백랑의 시고 거친 웃음소리가 천둥처럼 사정없이 내리쳤다.
[크하하하! 대단하군! 천화조율주법이라니! 고대의 소환 주술사들이 폭풍과 화염의 신수들을 동시에 부리기 위해 제 영맥을 단련할 때 쓰던 바로 그 위대한 비술이다! 애송이여, 저 계집의 제안을 받아들여라! 저 주법을 손에 넣는다면 네 나약한 육신은 온전한 내 얼음의 권능을 백 퍼센트 수용할 수 있는 신수(神獸)의 그릇으로 탈바꿈하게 될 터이니!]
흑영 역시 그림자 밑바닥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동조의 의견을 보냈다.
[주인님…… 맥의 기운 덕에 심장 주변의 과부하가 눈에 띄게 완화되었습니다. 주인님의 생명을 구하고 더 강력한 계약의 힘을 제어하기 위해선 저 호흡 주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저 계집의 정보력은 진짜인 것 같습니다.]
민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붉은 노을빛이 사그라지고 짙은 회색의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한 미술실 벽면을 바라보았다.
선택의 여지는 좁았다. 도망자로 쫓기며 천천히 괴사해 죽어가느니, 정령청의 눈 밑에서 정보를 쥐고 흔드는 사냥꾼의 조력자가 되는 것이 생존율이 훨씬 높았다.
"좋아. 그 거래, 수락한다."
민우는 교복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은하린에게 건넸다.
은하린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강하게 마주 잡았다. 그녀의 작은 손바닥에서 서늘하면서도 몽환적인 맥의 잔류 영압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민우의 영맥 속 령기와 한 차례 가볍게 공명했다.
"계약 성립이네. 그럼, 내일 동틀 무렵 정령청 수사 요원들이 청파동에 새로 전개할 수색 범위 지도부터 공유해 줄게. 우리의 진짜 첫 사냥을 위해서 말이야."
두 사람의 차가운 눈빛이 창밖의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맞물렸다. 정령청의 감시망 한가운데에서 벌어질, 사냥꾼과 도망자들의 비밀스러운 공조가 마침내 그 첫 막을 열어젖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