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의 요괴 계약자

13화: 등교와 대면
아침 안개가 청파동의 낮고 조밀한 주택가 지붕 위로 회색 장막처럼 얇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제 오후 내내 청파동 전역을 흠뻑 적셨던 가을 폭우는 마침내 멎었으나, 물기를 가득 머금은 아스팔트와 보도블록 사이에서는 시리고 축축한 냉기가 지독하게 뿜어져 나왔다.
민우는 현관 거울 앞에 서서 겉옷인 청파고등학교 교복 재킷을 조심스럽게 걸쳤다. 얇은 백색 면 티셔츠 아래로 거칠게 감아둔 붕대가 살갗을 압박해 왔다. 어깨뼈와 척추 근처의 근육을 아주 조금이라도 크게 움직일 때마다, 등덜미 전체를 난도질하듯 찢어발기는 격통이 뇌수를 생생하게 찔렀다. 밤새 흑영의 음기를 주입해 뒤틀린 영맥의 폭주를 가라앉히고 백랑의 잔류 한기로 화상의 고열을 식혔건만, 정령청의 주술 전류에 직접 타격을 입은 살갗은 여전히 진물을 흘려대며 욱신거리고 있었다.
"흡, 흐읍……."
민우는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입술 사이로 삼키며 목깃을 단정하게 정돈했다. 평소보다 배는 긴장된 마음으로 가방을 메고 대문을 나섰다.
학교로 향하는 대로변에 진입하자마자, 평소와는 사뭇 다른 삼엄한 대기의 밀도가 민우의 피부를 가차 없이 짓눌렀다. 젖은 도로 한쪽에는 빨간색 경광등을 무겁게 명멸하는 경찰차들과 함께, 은색 법륜 문양이 선명하게 박힌 정령청(精靈廳) 특수 수사대의 짙은 네이비색 대형 밴 차량 석 대가 가로수 사이를 가득 메운 채 대기하고 있었다.
청파고등학교 교문 앞은 여느 아침과 다름없이 등교하는 학생들로 북적였으나, 그들을 감싸고 있는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교문 양옆에는 정령청의 고유 로고가 새겨진 방탄 플레이트 재킷을 입은 특수 요원들이 허리에 주술 삼단봉을 찬 채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지나가는 학생들의 얼굴과 가방, 옷차림 하나하나를 투시하듯 매섭게 훑었다.
요원들의 발밑에는 법륜 모양의 은색 안테나가 상단에 장착된 이동식 령압(靈壓) 대조 측정기가 세워져 있었다. 장치의 둥근 패널에서는 금빛 마력 파동이 불규칙한 심장 박동처럼 명멸하며, 보이지 않는 얇은 그물망을 끊임없이 허공에 방출하고 있었다.
"야, 이거 진짜 무슨 요괴 감염 사건 때문에 그러는 거야? 저 사람들 정령청 특수부대 맞지?"
"가방까지 다 뒤지는데? 우리 학교에서 어제 최성준 선생님 말고 다른 사람도 쓰러졌다던데……."
앞서 가던 학생들이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소곤거리며 검문선을 통과했다.
민우는 푸른 영안(靈眼)을 안쪽으로 감춘 채 평범한 고등학생의 둔탁한 갈색 동공을 가장했다. 그러나 그의 시야에는 교문을 통과할 때마다 번뜩이는 금빛 마력 그물망의 파동 선들이 선명하게 스캔되고 있었다. 그 선들은 어제 결계 석 주위에서 검출된 대요괴의 빙결 령기와 그림자의 음기 주파수를 강하게 흔들어 깨우도록 정밀하게 튜닝되어 있었다.
[주인님, 위험합니다. 저 탐지 장치가 뿜어내는 마력의 그늘은 어제 저희가 썼던 령격(靈格)의 공명 파장을 강제로 유도하는 간섭파입니다. 아무런 대비 없이 저 경계를 밟으시는 순간, 등 뒤에 남은 잔류 낙인들이 억누르고 있는 한기와 음기가 공명하여 튀어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림자 틈새에 녹아 있던 흑영이 사시나무 떨듯 긴장한 음색으로 민우의 뇌리에 속삭였다.
"침착해라, 흑영."
민우는 가방끈을 쥔 손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흥, 조잡하기 짝이 없는 인간 주술사 놈들의 장난감이로군. 내 힘의 위상을 네놈의 깊은 영 그릇 내부로 완전히 침잠시켜 주마. 계약자여, 호흡을 멈추고 네놈의 영맥을 역방향으로 부드럽게 비틀어라. 탐지파가 몸에 닿는 순간 그것을 반사하지 않고 그대로 통과시키는 위상 반전(Phase Inversion)을 시도해라. 내가 밑바닥에서 그 진동을 완전히 소멸시키겠다.]
백랑의 오만하고 차가운 노성이 들려옴과 동시에, 민우의 하단전 부근에서 시린 눈꽃 같은 냉기가 소리 없이 기어올랐다. 민우는 백랑이 일러준 대로 숨을 가라앉히며 자신의 영혼의 문을 열었다. 스캐너의 붉은 레이저와 금빛 탐지선이 그의 운동화 앞코를 지나 장딴지와 상체를 차례로 훑고 지나갔다.
위상 반전. 들어온 마력 탐지 주파수의 위상을 제 몸 안의 령기로 180도 뒤틀어 완벽하게 상쇄하는 기만책이었다.
삐익.
민우가 결계 선을 완전히 통과하는 순간, 측정기는 날카로운 경고음 대신 무덤덤한 녹색 발광 다이오드를 조용히 깜빡일 뿐이었다. 교문을 지키던 요원이 민우의 파리하게 질린 뺨과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잠시 흘겨보았으나, 기계의 수치가 '완전 무해'를 가리키자 이내 시선을 거두고 다음 학생의 어깨를 짚었다.
첫 번째 관문은 통과했으나, 몸을 타고 밀려드는 긴장감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이것은 단지 예선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오전 9시 정각. 아침 조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기가 무섭게 3학년 2반의 앞문이 거칠게 열렸다. 평소의 호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담임교사가 바짝 마른 입술을 찌푸린 채 교탁을 탁탁 두드렸다.
"전달 사항이 있다. 어제 교내에서 발생한 원인 미상의 화학 가스 누출 사고 및 특별 위생 점검과 관련해서, 관할 정령청 요원들과 합동으로 전교생 대상 긴급 안전 진단 및 건강 검진을 실시한다. 지금 즉시 소지품을 그대로 둔 채 체육관 강당으로 이동해라. 한 명도 빠짐없이 신체 검진을 받아야 하니 서둘러라."
교실 안은 순식간에 벌집을 쑤신 듯 시끄러워졌다.
"건강 검진을 왜 정령청 사람들이 해?"
"위생 점검이라며, 가스 누출인데 령압 스캔을 왜 하는 건데?"
민우는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반 아이들의 뒤를 쫓았다.
복도 창문 너머 운동장 한가운데에는 군용 방수포로 덮인 대형 가림막 텐트들이 쳐져 있었고, 그 주위를 정령청의 중무장 요원들이 빈틈없이 경계하고 있었다. 체육관 입구에는 이미 앞선 학년의 학생들이 긴 줄을 늘어뜨린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검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순한 령압 측정 장치로 교문을 통과시키는 수준이 아니었다. 체육관 안쪽에서는 학생들이 칸막이 속으로 들어가 상의를 탈의한 뒤, 등의 척추를 따라 령격 반응을 정밀 검출하는 물리적 접촉 탐침 검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등의 화상 상처를 저들에게 들키는 순간 끝장이다. 붕대를 감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제 결계를 파괴하고 도망친 계약자로 즉시 지목되어 체포당할 거야.'
민우는 줄이 구부러지는 틈을 타 은밀하게 빠져나와, 체육관 2층 뒤편에 위치한 인적이 드문 남자 화장실로 신속하게 몸을 감추었다.
화장실 안에는 가을날의 눅눅한 곰팡이 냄새만이 가라앉아 있었다. 민우는 안쪽 칸막이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뒤, 교복 재킷과 셔츠를 천천히 벗어 내렸다. 피와 진물에 찌들어 등의 화상 상처에 딱딱하게 들러붙어 버린 셔츠 자락이 어깨를 움직일 때마다 살을 당겼다.
서어억, 찌지직!
민우는 이빨을 악물고 상처에 엉겨 붙은 교복 셔츠를 가차 없이 잡아 뜯었다.
"……읏!"
단말마의 신음이 입안을 맴돌았다. 뜯겨 나간 셔츠 가죽을 따라 붉은 생살이 찢어지고 누런 진물과 붉은 핏물이 환부에서 새어 나왔다. 거울에 비쳐본 그의 등판은 처참함 그 자체였다. 강현이 날린 푸른 벼락의 사슬 자국이 척추 오른편을 가로질러 붉게 문드러진 채 군데군데 검게 그슬려 있었다. 이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하는 꼴이었다.
[애송이여, 저 사냥개들이 들고 있는 탐침기는 대상의 체내에 직접 미세한 주술 전류를 흘려보내 영맥의 고유 진동을 강제로 끌어내는 유도식 검사기다. 이대로 저 쇠붙이가 네놈의 상처에 닿는 순간, 화상 부위에 잔류한 천뢰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반응하여 사방에 불꽃을 튀겨댈 것이다.]
내면의 빙결 장막 속에서 백랑이 붉은 안광을 매섭게 번뜩이며 조소 섞인 경고를 보냈다.
"해결책은?"
[방법은 극단적이다. 내 빙결의 마력을 네놈의 등판 전체에 직접 주입하여 상처와 주변 신경 세포를 통째로 얼려버리는 게다. 통증 신호가 뇌로 가는 길목을 동결시켜 감각을 강제로 차단하고, 그 위에 저 그림자 벌레 놈의 음기를 얇게 입혀 멀쩡한 가죽처럼 위장하는 수밖에 없지.]
백랑이 혀를 날름거리며 덧붙였다.
[다만 경고하건대, 날것 그대로의 냉기가 영맥에 직접 스며드는 통증은 지옥의 형벌과 다름없을 것이다. 신경이 얼어붙는 과정에서 뇌수가 얼어 터지는 듯한 고통이 닥칠 터인데, 과연 비명 지르지 않고 버텨낼 수 있겠느냐?]
민우는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거칠게 닦아내며 차갑게 읊조렸다.
"어제는 심장이 서리꽃으로 얼어 터질 뻔했다. 이 정도 고통으로 무릎 꿇진 않아. 시작해."
[오냐, 기개가 기특하구나!]
백랑의 서늘한 웃음소리가 뇌리를 강타한 그 직후였다.
콰콰콰콰-!
민우의 척추 한가운데에서 절대 영도에 가까운 시린 서릿발이 폭사하듯 뿜어져 나왔다.
"……윽, 읍!"
비명은커녕 숨소리마저 목구멍 안쪽에서 서리 형태로 얼어붙어 하얀 김조차 나오지 않았다. 척추 신경을 타고 뇌하수체를 다이렉트로 강타하는 고통은, 마치 불타는 쇠꼬챙이로 등뼈를 관통한 뒤 그 안에서 얼음 송곳 수만 개를 동시에 굴려 대는 듯한 극단적인 생지옥이었다. 눈앞이 핏빛 적색과 시린 백색으로 미친 듯이 명멸했고, 턱관절이 우드득 소리를 내며 악물려 입술 틈새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세면대 모서리를 움켜쥔 그의 손가락 끝이 허옇게 질리다 못해 손톱이 뒤집어질 듯 팽팽하게 꺾였다.
그 극한의 동결 작용이 화상의 열기를 소멸시키고 감각을 완벽히 마비시키는 바로 그 찰나, 바닥에 드리워진 어두운 수풀 같은 그림자 속에서 검고 진득한 음기가 물 흐르듯 기어 올라왔다.
[그림자 엮기(Shadow Camouflage)…… 전개합니다.]
흑영의 세밀한 령격 제어에 따라, 음의 실가닥들이 동결된 등가죽 위를 촘촘하게 메워 나갔다. 빛의 반사도와 미세한 모공의 질감, 그리고 체온의 발산마저 완벽하게 제어하여 사람의 멀쩡한 피부 표면을 모방하는 검은 장막의 허상이었다.
수십 초 같은 생지옥의 시간이 흐른 뒤, 동결의 여파가 잦아들자 민우는 거칠게 마른기침을 토해내며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화장실 유리거울에 비쳐본 그의 등은, 조금 전의 끔찍했던 화상 흉터가 온데간데없이 매끄럽고 깨끗한 황색 살결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흑영과 백랑이 협력하여 빚어낸 위험천만한 모조품이었다. 백랑의 냉기가 걷히는 순간, 동상의 괴사와 화상의 독기가 배로 증폭되어 찾아올 시한폭탄이었다.
민우는 옷매무새를 서둘러 정리한 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며 핏기 없이 창백하게 변한 안색을 애써 가라앉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걸음으로 화장실을 나섰다.
체육관 안은 흰색 가림막 텐트들로 차단되어 안쪽의 상황을 쉽게 볼 수 없는 구조였다.
민우의 대기 번호가 호명되었다. 그는 요원의 거친 지시에 따라 4번 조사 구역의 가림막 틈새를 밀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는 흰색 방호 가운을 입은 정령청의 전문 분석원과 함께, 회색 롱코트를 걸친 낯익은 실루엣이 등을 돌린 채 진단 차트를 살피고 있었다.
정령청 특수 수사대장, 강현이었다.
강현이 그곳에 직접 버티고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으나, 민우는 동공의 흔들림조차 허용하지 않은 채 덤덤한 걸음으로 진찰대 앞에 섰.
"상의 탈의하고 침대에 엎드리세요."
분석원의 덤덤한 목소리에 민우는 재킷과 셔츠를 벗어 바구니에 내려놓았다.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하게 위장된 그의 등을 향해, 강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의 예리하게 찢어진 눈동자가 민우의 날갯죽지와 척추 라인을 따라 현미경처럼 집요하게 이동했다.
"어제 15시부터 17시 사이에 어디에 있었지, 강민우 학생?"
강현이 차트를 넘기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종례가 끝난 뒤 바로 집 앞 독서실로 향했습니다. 어제부터 감기몸살 기운이 심해서 다른 곳에 들를 여유가 없었습니다."
민우는 웅얼거리는 듯한 콧소리와 어깨를 웅크리는 행동을 통해, 평범하고 겁먹은 모범생의 제스처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강현은 대답 없이 분석원이 들고 있던 권총 모양의 은색 령격 탐침기를 뺏어 들었다.
"내가 직접 확인하지."
그 서늘한 목소리와 함께 강현이 엎드린 민우의 등 뒤로 성큼 다가섰다. 탐침기 끝부분에서 푸르스름한 전기 불꽃이 찌릿찌릿 소리를 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정령청 특유의 천뢰(天雷) 마력의 잔상이 주위를 돌며 타들어 가는 오존 냄새를 뿜어냈다. 어제 민우의 등가죽을 찢어발겼던 바로 그 가공할 전격의 에너지가 탐침기를 타고 흘렀다.
탁.
차가운 금속 탐침의 끝자락이 민우의 왼쪽 날갯죽지 바로 아래, 가장 심각한 화상을 입어 흑영의 어둠으로 위장해 둔 상처 중심부에 닿았다.
순간, 강현의 손끝에서 뿜어지는 강력한 전격 령기가 민우의 피부 장막을 뚫고 뼈마디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그 령기는 민우의 영맥을 거칠게 뒤흔들며, 숨겨진 요괴의 기운이나 상극인 한기의 마력을 강제로 반사하여 표출시키려는 정밀한 덫이었다.
'참아라. 절대로 흔적을 내보여선 안 된다.'
민우는 어금니를 악물며 정신을 집중했다.
강현의 천뢰 령기가 침투하자 체내에 웅크리고 있던 백랑의 빙결 령기가 맹렬하게 반응하며 이빨을 드러내려 했다. 흑영이 엮어둔 어둠의 실 또한 주술 전류의 높은 온도에 그슬려 찢어질 듯 팽팽하게 경련했다.
민우는 자신의 영혼의 그릇을 극한으로 넓혔다. 적의 주술 마력을 외부로 튕겨내는 대신, 넓어진 제 그릇의 어둠 속으로 강하게 끌어당겨 집어삼키는 방식을 선택했다. 들어온 전기 령기를 백랑의 동결 주법으로 서서히 냉각시키고, 흑영의 그림자 심연 속에 집어넣어 흔적도 없이 상쇄해 소멸시키는 역상 조율이었다.
치이이이이-.
영안을 지니지 못한 분석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아주 미세하고 투명한 령적 수증기가 민우의 매끄러운 가짜 피부 위로 피어오르다 소멸했다.
강현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는 탐침기를 쥔 채 민우의 등을 누르는 힘을 강하게 주었다. 전류의 주파수가 한 단계 더 높게 찌릿거리며 영맥의 내벽을 긁어댔다. 가슴뼈가 으스러질 듯한 압박과 신경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통이 뇌리를 강타했으나, 침대 위에 엎드린 고등학생의 육체는 령격의 동요는커녕 손가락 마디 하나 흔들리지 않고 바위처럼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띠이익-.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탐침기 후면의 발광판에 조용한 녹색 불빛이 점등되었다.
[검출 결과: 반응 없음. 일반인 영맥 신호 확인.]
가림막 옆의 분석원이 펜을 끄덕이며 진단서에 서명했다.
"특이 사항 없습니다. 피부도 깨끗하고 잔류 요기도 검출되지 않네요."
강현은 탐침기를 거두었으나, 여전히 석연치 않다는 듯 침대 옆에 선 민우를 위아래로 끈질기게 응시했다.
"학생."
"……네?"
민우는 셔츠를 주워 입으며 잔뜩 움츠러든 눈빛으로 강현의 매서운 외양을 마주 보았다. 그의 얼굴은 고통을 참느라 비 오듯 쏟아진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입술은 핏기 없이 허옇게 질려 있었다.
강현이 다가와 젖어 있는 민우의 이마칼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쓸어올렸다. 그의 마력 깃든 손바닥이 민우의 관자놀이를 스칠 때마다 찌릿한 주술 전류의 여파가 뇌리를 자극했다.
"식은땀을 꽤 많이 흘리는군. 아픈가?"
"어제 오후부터…… 빗속을 걷다가 심한 감기몸살에 걸려서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아주 찰나의 순간 동안 팽팽하게 맞물렸다.
강현은 민우의 둔탁하고 겁먹은 갈색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며 어떤 령적 파동의 흔적을 쫓았으나, 그 안에서는 어떠한 마력의 편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윽고 흥미가 완전히 사그라진 듯, 강현은 손을 거두며 귀찮다는 듯 턱짓을 해 보였다.
"돌아가 봐도 좋다. 몸 관리나 잘하도록."
"……감사합니다."
민우는 교복 재킷을 챙겨 입고 목례를 한 뒤, 가림막 텐트를 조용히 걸어 나왔. 체육관 문을 나서는 그의 걸음걸이는 완벽하게 통제되어 있었으나, 사냥꾼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뒷마당 화단 그늘에 들어서는 순간 마침내 다리의 힘이 풀려 담벼락을 짚고 거꾸러졌다.
"하윽, 헉……! 우웁……!"
등 뒤에서 걸어 잠갔던 백랑의 동결 주법이 해제되면서, 그동안 억눌려 있던 화상의 극심한 작열통과 천뢰 주술의 잔류 마력이 한꺼번에 신경 세포를 타고 날뛰기 시작했다. 민우는 거친 마른기침과 함께 검붉은 핏방울들을 화단 수풀 위에 뱉어냈다.
[미련하고 독한 놈이로군. 강현 그자가 탐침기의 강도를 올렸을 때 네놈의 그 나약한 영혼 그릇이 0.1초라도 먼저 균열을 일으켰다면, 등가죽이 통째로 불타 오르며 현장에서 머리가 날아갔을 것이다.]
백랑이 뇌리에서 길게 혀를 찼으나, 그 오만한 음성 속에는 목숨을 건 민우의 차가운 인내력에 대한 기이한 경외와 인정의 기색이 서려 있었다.
[주인님, 상처의 동상 피해와 화상의 합병으로 등 뒤의 영맥 괴사가 급속도로 진행 중입니다. 조속히 체내 요기의 폭주를 잠재울 '호흡 주법'을 손에 넣지 못하신다면 정말로 생명이 위독해지실 수 있습니다.]
흑영의 처절한 경고를 들으며 민우는 옷소매로 피를 훔쳐냈다.
"알아. 어떻게든 살아서 판을 돌파했으니, 이제 다음 사냥을 준비해야지."
그는 비틀거리는 상체를 억지로 추스르며 교실로 향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전교생 검진의 여파로 어수선한 학급 분위기가 가득 차 있었다. 민우는 누구의 눈길도 끌지 않은 채 창가 구석의 제 책상으로 걸어가 조용히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 찰나, 그의 깊은 영안이 무언가를 감지하고 반응했다.
가방을 내려놓으려던 책상 위, 두꺼운 참고서 서적 틈새에 낯선 종이쪽지 하나가 정교하게 끼워져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반인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겠지만, 그 종이의 주변은 밤하늘의 짙은 음영을 닮은 미세한 주술적 결계 장막이 얇게 둘러쳐져 있었다.
민우는 주변 눈치를 살핀 뒤, 자연스럽게 책을 펼치는 척하며 그 쪽지를 꺼내 들었다. 쪽지 안쪽에는 날카로우면서도 기품이 깃든 필체로 서늘한 문장이 정갈하게 쓰여 있었다.
『어제 결계를 찢고 도망친 백색 늑대의 실루엣을 똑똑히 보았다. 정령청 사냥개들의 아가리를 피하고 싶다면, 오늘 방과 후 5시 3층 미술실로 와라.』
쪽지의 가장자리 하단에는 정령청도, 신성그룹도 아닌, 고대의 기묘한 짐승 문양—또 다른 상급 요괴의 존재를 암시하는 듯한 불길한 어둠의 령격 인장이 찍혀 있었다.
민우의 핏기 없던 입꼬리가 비스듬히 호선을 그리며 차갑게 솟아올랐다.
"사냥꾼이 파놓은 덫이든, 나를 구원할 새로운 열쇠든……."
소년의 차가운 영안의 눈빛이 쪽지 위에 새겨진 짐승 인장 너머로 시리게 타올랐다.
"가서 확인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