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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의 요괴 계약자12화

백야의 요괴 계약자

백야의 요괴 계약자

12화: 귀가와 분석

어스름한 가을비가 진회색 아스팔트 골목길 위로 무겁게 흩뿌려지고 있었다.

민우는 청파동의 좁고 가파른 비탈길 담벼락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등줄기에서 끈적한 피와 함께 찢어진 교복 셔츠 조각이 엉겨 붙는 끔찍한 감각이 피부를 타고 생생하게 전해졌다. 정령청의 특수 격리 결계를 강제로 찢고 나올 때 가해졌던 고압 주술 전류의 잔상이 여전히 등덜미와 어깨뼈 부근을 지독하게 지져 대고 있었다.

"흡, 흐읍……."

이빨을 사려 물었지만 비린 핏물이 섞인 뜨거운 단숨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기어이 새어 나왔다. 단순히 등에 입은 외상 때문만이 아니었다. 단시간에 대요괴 백랑의 파괴적인 빙결 령기와 흑영의 그림자 도약 능력을 동시에 연달아 가동한 대가가 뼈아팠다. 조율되지 못한 두 개의 상극인 마력이 영맥 내부에서 폭발하듯 부딪치고 있었다. 심장은 당장이라도 얼어붙을 듯 차갑게 식어가는 반면, 머리는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뜨겁게 끓어오르는 극단적인 불균형이었다.

멀리 학교가 있는 대로변 방향에서 웅웅거리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요원들의 다급한 고함이 가을바람을 타고 골목길 깊숙한 곳까지 들이닥쳤다.

"결계 석 복구 완료! 사방 경계선을 완전 차단해라!"

"서편 골목길 방면으로 순간적인 령압 반응이 감지되었다가 소실되었다! 탐지 조는 령압 감지견 식신들을 대동해 골목 구석구석을 샅샅이 수색해라! 핏자국 하나도 놓치지 마라!"

민우의 푸른 영안 너머로 골목 어귀의 회색 벽면을 붉게 물들이는 정령청 경광등 빛이 어릿하게 번졌다. 사냥꾼들의 포위망이 청파동 전역을 옥죄며 그물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이 상태로 비틀거리다가는 길바닥에서 령기 과부하로 쓰러지거나, 정령청의 고감도 센서에 걸려 현장에서 체포되는 것 중 하나뿐이었다.

'기운을 완벽하게 지워야 해. 령기를 극한으로 압축한다.'

민우는 왼손 전완부에 새겨진 흑영의 검은 나뭇가지 모양 계약 인장을 손바닥이 하얗게 질리도록 움켜쥐었다.

"흑영, 내 숨결과 체온, 그리고 남은 령기의 파동까지 전부 네 그림자로 덮어씌워라. 단 한 톨의 령적 흔적도 밖으로 새어 나가선 안 된다."

[주, 주인님…… 하지만 지금 상태에서 어둠을 더 두르시면 육신에 걸리는 마력 과부하가 심장을 옥죄어 갈 것입니다…….]

"쓸데없는 걱정 말고 지시대로 해."

민우의 서늘한 명령에 흑영은 그림자 밑바닥에서 부르르 떨며 바닥에 길게 드리워진 그늘을 끌어올렸다. 민우의 찢어진 교복 셔츠 틈새로 검고 끈적한 음기가 스며들어 전신을 얇은 코팅막처럼 휘감았다. 마치 차갑고 짙은 젤리 속에 온몸이 처박힌 듯한 지독한 이질감과 함께, 민우가 외부로 방출하던 영혼의 진동이 순식간에 차단되었다.

그와 동시에 민우는 빗물에 젖어 어둡게 가라앉은 낡은 빨간 벽돌 담벼락의 깊은 그늘 속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터벅, 터벅, 터벅.

골목 위쪽 계단에서 정령청의 문양이 새겨진 방탄 재킷을 입은 요원 두 명이 손가락 사이에 주술 부적을 끼워 쥔 채 내려왔다. 그들의 곁에는 등줄기에 해골 형태의 뼈가 돋아나고 눈구멍에서 푸른 안광이 넘실거리는 검은 늑대 형상의 식신(式神) 한 마리가 코를 바닥에 박은 채 킁킁거리고 있었다.

"이 부근이 확실해. 결계 벽의 균열을 타고 탈출한 령격 이동 좌표가 이 주변에서 난반사를 일으키며 끊겼다."

"조심해라. 상대는 백색 늑대 요괴의 빙결을 쓰는 계약자다. 결계를 뚫을 때 등에 제법 큰 화상을 입었을 테니 멀리는 못 갔을 터다."

요원들이 민우가 숨어 있는 담벼락 바로 앞, 5미터도 안 되는 거리까지 다가왔다. 뼈가 드러난 식신 늑대가 빗물 고인 흙바닥 위에서 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민우가 엎드려 있는 어두운 수풀 담벼락을 향해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불길한 푸른 안광이 어둠 속을 직시했다.

두근. 두근.

민우는 호흡을 멈추고 혀를 깨물었다. 심장에 걸리는 압박 때문에 튀어나오려는 신음마저 흑영의 그늘 안쪽으로 강제로 밀어 넣었다. 찢어진 어깨뼈의 화상이 불길로 지지는 듯 고통스러웠지만, 소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어둠 속에서 식신의 턱뼈 움직임을 노려보았다.

식신이 컹! 하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민우의 코앞까지 해골 주둥이를 내밀었다. 요원이 은색 령격 탐지기를 담벼락 방향으로 들어 올리던 바로 그 찰나였다.

싸아아아아—!

갑작스럽게 거세진 가을 빗줄기가 낡은 슬레이트 차양막을 세차게 때리며 골목길 가득 거친 소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요원의 탐지기 화면이 빗물에 섞여 내리는 대지 영류의 노이즈로 찌릿거리며 거칠게 흔들렸다.

"치직, 젠장. 빗물이 너무 굵어져서 령압 탐지 신호가 완전히 교란되고 있잖아. 식신 요놈도 코가 물에 젖어 갈피를 못 잡는군."

"시간 지체하지 말고 저 위쪽 주택가 막다른 골목으로 가자. 도망자라면 그쪽에 숨는 게 상책일 테니까."

요원들은 혀를 차며 발길을 돌려 언덕길 계단 위로 신속하게 뛰어 올라갔다.

그들의 발소리와 식신의 뼈 긁는 소리가 완전히 멀어진 것을 영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민우는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

"하아…… 하아……."

비틀거리며 벽을 짚고 일어난 그의 손가락 끝이 빗물에 젖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전신을 지탱하는 관절들이 무너질 것 같았지만, 지체할 여유는 없었다. 민우는 골목의 어둠과 가로등 뒤편의 음지를 디딤돌 삼아, 청파동 구릉지대 구석에 위치한 자신의 낡은 단층 주택으로 기어가듯 발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쾅.

녹슨 철문을 걸어 잠그고 좁은 거실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민우는 바닥에 거꾸러졌다.

어둡고 썰렁한 방 안에는 차가운 가을 빗물 냄새와 먼지 향이 섞여 쓸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민우는 전등 스위치를 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욕실로 기어가 차가운 타일 바닥 위에 몸을 눕혔다.

"허억, 헉…… 컥!"

그는 참았던 마른기침을 쏟아냈다. 떨리는 손으로 젖은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뜯어내듯 풀었다. 상처에 엉겨 붙어 굳어버린 옷자락을 가차 없이 잡아 뜯자, 어깨와 등가죽이 통째로 일어나는 듯한 격렬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뇌수를 강타했다.

"……윽!"

단말마의 신음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거울에 비쳐본 그의 등판은 그야말로 참혹했다. 정령청의 천뢰 주술 사슬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는 살갗이 붉게 문드러진 채 군데군데 검게 그슬려 진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민우는 상비약 함에서 독한 화상 연고와 붕대를 꺼냈다. 약을 바를 때마다 환부가 타들어 가는 극심한 작열통에 눈앞이 하얗게 번뜩였다. 이빨을 악물고 마른침을 삼키며 등을 간신히 붕대로 칭칭 동여맨 뒤 거실 바닥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때, 뇌리 깊은 곳에서 백랑의 시리고 오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쯧쯧, 전설의 대요괴 둘을 굴복시키고 계약자로 군림하겠다는 애송이의 꼴이 아주 볼만하구나. 고작 인간 주술사들이 조잡하게 빚어낸 벼락 쪼가리에 이리도 목숨이 간당간당해지다니.]

"시끄러워…… 입 다물어, 백랑."

민우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신경질적으로 뇌까렸다.

[크하하, 계약의 힘으로 내 주둥이를 막을 테냐? 부질없는 짓이다. 내 친히 충고를 건네는 것이니 얌전히 들어라. 이번 상처는 단순한 등의 화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금 네놈의 나약한 육신 내부에서는 내 차가운 빙결 령기와 저 어둠벌레의 질척한 음기가 뒤섞여 영맥을 찢어 발기고 있어. 오늘 그림자 도약을 단 한 번만 더 썼어도 네놈 심장은 진작 서리 꽃으로 얼어붙어 산산조각 났을 터다.]

민우는 침묵했다. 그 서늘한 경고가 과장이 아님을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안으로 들여다본 자신의 영혼 중심부에는 미세한 잔금들이 가 있었다. 두 상급 요괴의 힘을 물리적인 신체가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고 삐걱거리는 한계의 신호였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하나뿐이겠지."

[그렇고말고. 네놈의 그 보잘것없는 영혼의 기틀, 즉 '그릇' 자체를 물리적이고 영적으로 단련하여 키우는 수밖에 없다. 요괴의 령격을 다중으로 속박해 제어하려면 단순히 의지력만으로 밀어붙이는 건 자폭 행위다. 영혼의 기운을 담아내는 그릇의 면적과 압력을 지탱해 줄 육체적인 기초와 호흡 주법이 필요해. 그러지 않으면 계약하는 요괴가 늘어날 때마다 네놈이 먼저 터져 죽을 게다.]

백랑이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내면의 서리 더미 속에서 길게 혀를 찼다.

[가문 대대로 영맥을 다뤄온 주술 명가들이나 정령청의 늙은 주술사들이 쓰는 고유한 호흡 주법(呼吸 呪法)을 찾아보아라. 그릇이 커지지 않는 한 네놈의 수명은 불꽃놀이처럼 짧을 터이니.]

민우는 거칠게 숨을 고르며 백랑의 분석을 머릿속에 각인했다. 그릇의 단련. 그것은 생존을 위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절박한 이정표였다.


통증이 연고의 냉감 덕에 조금 잦아들자,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젖은 배낭을 끌어당겼다.

그가 배낭 안쪽의 숨겨진 지퍼를 열고 손가락 끝으로 조심히 꺼낸 것은, 어른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의 검붉은 결정체—청파고 방송실에서 최성준 교사의 심장 밑바닥에서 추출해 낸 기생종의 '령핵(靈核)'이었다.

탁자 위에 얹힌 령핵은 요기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마치 아직 살아 있는 짐승의 심장처럼 둑, 둑, 하며 기분 나쁜 불규칙한 진동을 내며 고동치고 있었다. 그 표면에서 아지랑이처럼 뿜어져 나오는 비린 피비린내가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흑영, 방 안 전체에 그림자 결계를 쳐라. 일절의 요기가 외부로 흐르지 않게 차단해."

[예, 주인님…… 즉시 그림자의 장막을 전개하겠습니다.]

방구석의 어둠이 살아 움직이는 액체처럼 출렁이더니 탁자와 창틀 주변을 이중삼중으로 차단하며 투명한 그늘의 막을 형성했다.

준비가 끝나자 민우는 영안의 눈빛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두 눈동자가 형형한 청색 빛을 내뿜으며 령핵의 중심부를 낱낱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야생 요괴들의 코어가 난잡하고 불규칙한 마력 덩어리에 불과한 것과 달리, 이 결정체 중심부는 너무나 정교하게 짜여 있었다.

결정체 한가운데에는 뾰족하게 찢어진 불길한 짐승의 눈동자 형상이 새겨져 있었고, 그 눈동자를 사방에서 얽어맨 검은색 십자 문양의 주술 체계가 회전하고 있었다.

민우가 령핵 표면에 손가락을 대려 하자, 백랑이 극도로 불쾌하다는 듯 내면에서 한기를 사정없이 뿜어냈다.

[가까이하지 마라! 저것은 단순한 요괴의 찌꺼기가 아니다. 아주 불쾌하고 익숙한 피비린내가 묻어 있어.]

"익숙한 피비린내?"

[오만하기 그지없던 한반도의 고대 대요괴 무리…… 사신(四神) 중 하나의 하찮은 령적 기틀이다.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십자 모양의 주술 선로는 그것을 억눌러 인위적으로 조종하기 위해 주술사들이 설계한 통제의 쇠사슬이지. 즉, 이 기생종은 자연 발생한 재앙이 아니라 사신의 요기를 추출하여 인위적으로 빚어낸 '인공 요괴'라는 뜻이다.]

민우의 잘생긴 미간이 차갑게 좁혀졌다.

"사신급 요괴의 파편으로 요괴를 직접 만들었다고? 그런 짓이 가능한가?"

[크하하! 세상에 불가능한 주술이 어디 있겠느냐. 현대 사회의 장막 뒤에 숨은 음흉한 인간들이 전설 속의 파멸적인 힘을 탐내어 길들일 수 있는 군대를 만들고 싶었던 게지. 이 정도 급의 주술 공식을 완성하고 사신급 요괴의 기틀을 다룰 수 있는 집단은 손에 꼽을 터. 정령청 본부 내부의 타락한 늙은이들이거나, 이면 세계의 영맥을 돈줄로 쥐고 흔드는 주술 기업 '신성그룹' 배후의 주술 명가(冥家) 놈들 중 하나겠지.]

백랑의 차가운 통찰에 민우는 령핵의 진의를 되새겼다.

청파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집단 감염 사건은 단순한 요괴의 우발적 습격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무고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새로 설계한 인공 요괴의 전파력과 감염 성능을 시험한 잔혹한 생체 실험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현대 한국의 이면 세계를 지배하는 초거대 세력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민우는 령핵 내부에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르는 주술적 역추적 파동을 완벽히 격리하기 위해, 오른손에 백랑의 차가운 빙결 령기를 두르고 왼손에 흑영의 어둠을 모았다. 두 힘을 미세하게 조율하여 령핵 본체를 완전히 얼려 가둔 뒤, 이중으로 검은 어둠의 봉인을 입혀 낡은 서랍 속 철제 상자 깊숙한 곳에 매설했다.

후수수수…….

창밖을 때리는 가을 빗소리는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 억세게 울렸다.

내일 아침이 밝아오면 청파고등학교는 정령청 특수 수사대의 삼엄한 감시 하에 대대적인 전수 조사가 착수될 것이고, 수사대장 강현은 제 결계를 강제로 깨고 달아난 미등록 계약자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 학교의 학생 명부와 잔류 마력의 파동을 아주 사소한 흔적 하나까지 이 잡듯 대조해 댈 터였다.

목줄을 쥔 사냥꾼의 발소리가 머지않은 곳까지 울리고 있었다.

민우는 붕대를 감은 어깨를 가볍게 쓸어내리며, 캄캄한 어둠 속에서 푸른 영안의 불꽃을 시리게 태운 채 낮게 독백했다.

"누가 사냥꾼이고, 누가 사냥감인지 내일 똑똑히 보여주지."

비바람 치는 청파동의 밤하늘 아래, 어둠을 품은 소년의 눈동자가 깊고 차갑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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