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몹에서 마왕까지: 던전 마스터

3화: 던전의 생태계
낮은 울음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우우웅.
바닥의 균사가 먼저 반응했다. 검푸른 실들이 물결처럼 납작하게 엎드렸다가 다시 일어섰다. 칼날쥐의 피 냄새가 아직 돌홈 안에 남아 있었다. 나는 남은 뼈 조각을 몸속 깊이 끌어당기며 핵을 움츠렸다.
[경고: 상위 포식자의 접근 가능성.]
[권장 행동: 은폐 또는 도주.]
도주.
쉬운 말이었다. 하지만 어디로?
내가 아는 길은 바위 틈새와 균사 지대뿐이었다. 돌아가면 굶어 죽는다. 앞으로 나가면 먹힌다. 그렇다면 세 번째 길을 만들어야 했다.
나는 바닥 쪽 점액을 굳혔다. 칼날쥐의 발톱을 흉내 낸 돌기들이 덜 자란 이빨처럼 솟았다. 완성된 다리도 발톱도 아니었다. 힘을 주자 두 개는 곧바로 뭉개졌고 하나는 바위 결에 걸려 찢어졌다.
"젠장."
소리는 나지 않았다. 대신 몸 안의 공기 방울이 부글거리며 터졌다.
그래도 움직였다. 미끄러지는 것이 아니라 찍고 당기는 감각. 나는 균사 위로 천천히 몸을 옮기며 주변을 더듬었다. 왼쪽은 막힌 바위 틈, 오른쪽은 낮은 물길, 정면에는 포자낭이 매달린 균사 덩어리들이 있었다. 포자낭은 마른 혹처럼 부풀어 있었고 표면에 희미한 가루가 앉아 있었다.
[대상 분석.]
[균사 포자낭. 하급 던전 균류의 번식 기관.]
[위험 요소: 표면 독성 반응, 감각 교란.]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쁜 소식만도 아니었다. 독이 있다면 나만 아픈 게 아닐 수도 있었다.
그때 발소리가 멈췄다.
사각.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다리가 먼저 나왔다. 여덟 개인 줄 알았다. 자세히 느껴 보니 네 다리였다. 다만 관절이 둘로 꺾여 거미처럼 벌어져 있었다. 몸통은 도마뱀처럼 길고 납작했고 머리 양옆에는 퇴화한 눈 대신 젖은 구멍 같은 감각 기관이 줄지어 열려 있었다.
[대상 분석.]
[거미다리 도마뱀. 중하급 포식형 몬스터.]
[위험 요소: 진동 감지, 체액 추적, 점착성 혀.]
[현재 개체 대비 전투력 압도적 우위.]
압도적.
숫자조차 나오지 않았다. 계산할 필요도 없다는 뜻처럼 느껴졌다.
거미다리 도마뱀의 머리가 칼날쥐 사체 쪽으로 기울었다. 갈라진 혀가 번개처럼 튀어나와 피가 묻은 바닥을 훑었다. 그 순간 놈의 머리가 내 쪽으로 돌아왔다.
피와 점액을 구분한다.
나는 몸을 낮췄다. 더 이상 웅덩이 흉내만으로는 속일 수 없다. 놈은 이미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도마뱀이 튀었다.
나는 칼날쥐의 남은 앞발 조각을 밀어냈다. 뼈와 피가 묻은 살점이 균사 위를 미끄러졌다. 동시에 바닥을 찍어 반대편에 작은 진동을 만들었다.
탁. 타닥.
도마뱀의 머리가 흔들렸다. 놈은 한순간 살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는 그 틈에 포자낭 지대 쪽으로 굴렀다. 돌기가 균사에 걸려 몸이 찢어졌지만 멈출 수 없었다.
철썩!
혀가 내가 있던 자리를 때렸다. 돌바닥에 점액 몇 방울이 남았다. 혀가 그것을 핥아 들이는 순간 도마뱀의 몸이 낮아졌다.
맛을 봤다.
다음에는 나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포자낭 아래로 파고들었다. 균사 냄새가 점액 표면을 찔렀다. 독각 시체벌레에게서 얻은 미독 저항이 뜨겁게 반응했다.
[표면 독성 반응 발생.]
[미독 저항(하)으로 일부 완화됩니다.]
아프다. 하지만 버틸 수 있다.
도마뱀이 따라 들어오려다 멈칫했다. 감각 기관들이 오므라들었다. 균사 포자의 냄새가 놈에게도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몸 안쪽에서 독액을 끌어올렸다. 남은 양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칼날쥐의 피가 묻은 뼈 조각에 독액과 점액을 묻혀 포자낭 밑으로 밀었다.
도마뱀이 기다렸다.
영리했다. 무작정 뛰어들지 않았다. 놈은 포자낭 바깥을 돌며 내가 나올 길을 막았다. 관절이 꺾일 때마다 바닥 진동이 둥글게 퍼졌다. 길이 하나씩 지워졌다.
나는 더 깊이 몸을 낮췄다.
지금 나가면 죽는다.
가만히 있어도 포자 독에 녹는다.
그럼 놈도 움직이게 해야 한다.
나는 점액 일부를 떼어 냈다. 몸에서 떨어져 나간 조각은 곧 힘을 잃고 물컹하게 주저앉았다. 고통이 핵을 물어뜯었다.
[생명력 소모.]
[분리 점액 유지 가능 시간 짧음.]
"알아."
나는 분리 점액을 균사 위로 천천히 흘려 보냈다. 거기에 칼날쥐 피 냄새와 독액을 섞었다. 조각은 살아 있는 것처럼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거미다리 도마뱀의 머리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놈이 혀를 뻗었다.
그 순간 나는 바닥 돌기를 세워 포자낭 줄기를 찍었다.
퍽.
한 번으로는 부족했다. 줄기는 질겼다. 나는 다시 찍었다. 몸이 흔들리고 포자 가루가 조금 떨어졌다.
도마뱀의 혀가 분리 점액을 휘감았다.
세 번째.
포자낭이 터졌다.
푸확!
회색 가루가 폭발하듯 퍼졌다. 도마뱀의 머리와 혀가 그 안에 잠겼다. 놈이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귀가 없는데도 날카로운 진동이 핵을 긁었다.
[위험: 포자 독 노출.]
[균사 포자낭은 상처 난 체액과 이물 진동에 반응해 포자를 방출합니다.]
[표면 손상 진행.]
나도 멀쩡하지 않았다. 몸 표면이 따끔하게 벗겨졌다. 잿빛 외피 막이 얼룩덜룩하게 녹았다. 하지만 도마뱀은 더 심했다. 감각 기관들이 포자에 막혀 비틀거렸고 혀는 점액과 독액에 붙어 제대로 접히지 않았다.
바로 그때 균사 아래에서 작은 진동들이 올라왔다.
독각 시체벌레.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포자낭이 터지고 체액 냄새가 퍼지자 검은 뿔들이 균사 사이에서 솟아났다. 무리는 도마뱀의 혀와 상처 난 입가에 달라붙었다.
먹이사슬.
큰 놈이 작은 놈을 먹는다. 하지만 큰 놈이 상처 입으면 작은 놈들도 몰려든다. 던전은 강한 놈에게도 관대하지 않았다.
나는 그 틈에 오른쪽 물길로 몸을 던졌다.
차가운 물이 점액 속으로 파고들었다. 얕아 보였던 물길은 생각보다 빨랐다. 핵이 흔들리고 몸이 길게 늘어났다.
[경고: 개체 밀도 저하.]
[핵 노출 위험.]
나는 바닥 돌기를 세웠다. 칼날쥐 발톱 흉내는 물살 속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그래도 하나가 돌 틈에 걸렸다. 나는 몸을 당기며 물길 가장자리에 달라붙었다.
뒤에서 거미다리 도마뱀이 포자 구름을 찢고 나왔다.
놈은 죽지 않았다. 혀 끝은 너덜거렸고 얼굴에는 독각 시체벌레들이 달라붙어 있었지만 네 다리는 여전히 빠르게 움직였다. 분노한 진동이 바닥을 때렸다.
"끈질기네."
나는 물길을 따라 달아났다. 달아난다는 말이 우스웠다. 실제로는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에 가까웠다. 도마뱀은 물을 싫어하는지 가장자리 바위 위를 타고 따라왔다. 관절 달린 발끝이 벽면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벽을 탄다.
그 순간 탐욕이 고개를 들었다.
저 다리.
저 구조가 있으면 나는 더 이상 바닥에만 묶이지 않는다.
미쳤다는 걸 알았다. 지금은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던전에서는 기회가 늘 안전한 모습으로 오지 않았다.
도마뱀이 혀를 다시 뻗었다. 손상된 혀는 전보다 느렸다. 나는 물살에 몸을 맡겼다가 갑자기 옆으로 붙었다. 혀가 내 뒤쪽 점액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놓치지 않았다.
점액을 길게 늘려 혀에 달라붙은 독각 시체벌레 한 마리를 감쌌다. 벌레가 놀라 몸부림쳤고 도마뱀의 머리가 반사적으로 흔들렸다. 그 작은 흔들림에 앞다리 하나가 물길 안쪽으로 빠졌다.
나는 그 다리에 달라붙었다.
표면은 거칠었다. 미세한 털 같은 구조가 바위에 붙고 떨어지는 감각이 몸 안으로 밀려왔다. 도마뱀이 다리를 빼려 했다. 나는 점착막을 만들었다. 이끼 진액과 점액을 섞어 넓고 끈적한 막으로 다리를 감았다.
[대상 조직 접촉.]
[거미다리 도마뱀의 강모 구조를 분석합니다.]
[벽면 부착 원리 일부 기록.]
고통이 왔다. 도마뱀의 발끝이 내 몸을 갈랐다. 하지만 물살이 놈의 균형을 뺏었다. 나는 다리 끝 일부를 뜯어 삼켰다.
포식은 짧았다.
완전히 먹을 수는 없었다. 그런 욕심을 냈다가는 내가 먼저 찢긴다. 나는 필요한 만큼만 삼키고 곧장 떨어졌다. 물살이 나를 낚아채 앞으로 밀었다.
도마뱀이 뒤에서 울부짖었다. 더 따라오려 했지만 포자와 벌레가 놈을 붙잡았다. 네 다리 중 하나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놈의 진동은 멀어졌다.
나는 물길 끝의 낮은 턱에 부딪혔다.
퍽.
몸이 납작해졌다가 천천히 모였다. 핵은 무사했다. 생명력은 다시 많이 줄어 있었다.
[생명력 잔존율 37%.]
[핵 안정도 46%.]
[점착막 운용 가능.]
[포자 독 내성 경험 축적.]
[거미다리 도마뱀의 벽면 부착 구조 일부 기록.]
살았다.
나는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냥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긴 것도 아니었다. 상위 포식자는 살아 있었고 나는 겨우 일부를 빼앗아 도망쳤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 안쪽은 차갑게 가라앉지 않았다.
던전은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는 장소가 아니었다. 피 냄새는 적을 부르고 포자는 감각을 막고 작은 벌레들은 상처 난 강자를 물어뜯는다. 약한 몸이라도 그 흐름을 건드릴 수 있다면 살아남을 수 있다.
나는 벽에 점착막을 펼쳤다.
점액이 바위 표면에 달라붙었다. 전처럼 미끄러지지 않았다. 몸을 당기자 아주 조금 위로 올라갔다. 다시 떨어질 뻔했지만 버텼다.
그때 물길 너머에서 낯선 냄새가 스며들었다.
썩은 이끼도 피도 아니었다. 돌과 물 사이에 오래 묻혀 있던 차가운 냄새. 인간 시절 문고리나 자전거 체인에서 맡아 본 것과 비슷한 냄새였다.
금속.
나는 몸을 세웠다. 시야는 없지만 벽면의 결이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갈라진 바위가 아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깎인 턱들이 물길 위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얼마나 오래됐는지도 모른다. 다만 자연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었다.
나는 점착막을 다시 펼쳤다.
피 냄새와 포자 냄새가 뒤쪽 어둠에서 아직 흔들리고 있었다. 거미다리 도마뱀이 다시 올 수도 있다. 더 강한 놈이 냄새를 맡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이번에는 갈 곳이 있었다.
"올라간다."
소리 없는 말이 핵 안쪽에서 단단해졌다.
"먹히는 순서 따위 내가 바꾼다."
나는 첫 번째 턱에 몸을 붙였다. 차가운 금속 냄새가 더 짙어졌다. 던전 최하층의 생태계가 내 뒤에서 꿈틀거렸고 그 앞에서 나는 아주 느리게 위쪽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