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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몹에서 마왕까지: 던전 마스터2화

잡몹에서 마왕까지: 던전 마스터

잡몹에서 마왕까지: 던전 마스터

2화: 포식과 의제

바위 틈새의 어둠은 여전히 깊었다.

다만 조금 전처럼 나를 통째로 삼켜 버릴 것 같지는 않았다. 벌레의 사체와 이끼를 녹여 삼킨 뒤 찢겨 나갔던 몸은 겨우 형태를 되찾았다. 투명한 점액질 속에 떠 있던 검은 먼지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살아 있다.

그 한 문장이 내 안에서 몇 번이나 출렁였다.

[알림: 생명력 잔존율 26%.]
[핵 안정도 18%.]
[추가 회복 및 개체 안정화를 위해 영양분 섭취가 필요합니다.]

"아직도 부족하다고?"

말은 소리가 되지 못했다. 점액 속 공기 방울이 툭 하고 터졌을 뿐이다.

하지만 뜻은 분명했다. 던전은 내가 겨우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아무 관심도 없었다. 숨을 돌리려는 순간에도 몸 안쪽은 텅 빈 그릇처럼 허기졌다. 인간이었을 때의 배고픔과는 달랐다. 위장이 비는 감각이 아니라 세포 하나하나가 서로를 잡아먹으려 드는 감각이었다.

나는 틈 안쪽을 더듬었다.

손가락은 없었다. 대신 몸 전체가 손이 되었다. 바위 표면의 결이 느껴지고 습기 찬 이끼의 줄기가 느껴졌다. 나는 점액을 얇게 펴서 벽면을 긁었다. 녹색 이끼가 찢겨 들어왔고 바싹 마른 벌레 껍질이 몸속으로 파묻혔다.

[동굴 벽 이끼를 흡수합니다.]
[독각 시체벌레의 빈 껍질을 흡수합니다.]
[동일 계열 저영양 대상 반복 포식. 회복 효율이 감소합니다.]

몸이 아주 조금 따뜻해졌다. 하지만 채워지는 양은 턱없이 적었다. 이끼 몇 줄기와 빈 껍질로는 생존 시간을 조금 늘릴 뿐이었다.

나는 바위 틈 바깥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나가면 죽을지도 모른다.

남아 있어도 죽는다.

선택지는 처음부터 하나였다.

점액질 몸이 돌바닥을 타고 천천히 밀려 나갔다. 틈 밖은 넓지 않았다. 그러나 내게는 광장처럼 느껴졌다. 검푸른 균사가 바닥을 그물처럼 덮고 있었고 사이사이에는 물방울처럼 빛나는 진액이 맺혀 있었다. 그 진액 주변으로 콩알만 한 벌레들이 기어 다녔다.

독각 시체벌레.

죽은 상태로만 봤던 놈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등에 검은 뿔 하나가 솟아 있었고 배를 끌 때마다 미세한 독 냄새가 점액 표면에 스며들었다.

[대상 분석.]
[독각 시체벌레. 하급 절지형 몬스터.]
[위험 요소: 미량 독소. 군집 반응.]
[섭취 가치: 단백질, 독소 적응 경험, 미세 마력.]

"좋아. 너희부터다."

나는 몸을 낮췄다.

바닥에 고인 썩은 물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숨을 죽인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온몸의 떨림을 멈추는 데에는 비슷한 집중이 필요했다. 독각 시체벌레 한 마리가 균사 위를 넘어 내 가장자리로 다가왔다.

더 가까이.

조금만 더.

벌레의 앞다리가 내 점액 위에 닿는 순간 나는 몸을 말아 올렸다.

찌익.

뿔이 표면을 긁고 지나갔다. 따끔한 독이 몸 안으로 번졌다. 나는 움찔했지만 놓지 않았다. 점액이 벌레의 배를 감싸고 천천히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벌레가 몸부림칠수록 독이 퍼졌다. 시야도 없는 세계가 잠깐 하얗게 번쩍였다.

[미독 저항(하)이 활성화됩니다.]
[독소 농도 허용 범위 이내.]
[대상의 이동 습성을 기록합니다.]

나는 이를 악문 기분으로 버텼다. 이빨도 없는데 이상한 표현이지만 마음만은 그랬다.

벌레가 녹았다.

차가운 영양분이 핵 주변으로 흘러들었다. 동시에 작은 움직임들이 머릿속에 남았다. 독각 시체벌레는 밝은 진액을 좋아하고 진동을 느끼면 옆으로 흩어진다. 하지만 한 마리가 붙잡히면 가까운 놈들이 달아나는 대신 뿔을 세우고 달려든다.

군집 반응.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내게는 기회였다.

나는 일부러 몸을 떨었다. 방금 삼킨 벌레의 껍질 일부를 바깥으로 밀어내 진액 옆에 걸쳐 두었다. 미끼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두 마리.

세 마리.

벌레들이 몰려왔다. 나는 곧장 덮치지 않았다. 가장 앞의 놈이 껍질을 밀고 두 번째 놈이 뿔을 숙이는 순간 몸을 넓게 펼쳤다. 점액이 균사 사이로 스며들며 작은 그물을 만들었다.

놈들이 빠져나가려 했다.

나는 균사를 붙잡아 몸을 고정했다. 예전의 나라면 그저 바닥을 미끄러지는 물컹한 덩어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내가 어디까지 퍼질 수 있고 어느 부분을 단단하게 조일 수 있는지 조금씩 알 것 같았다.

한 마리씩 삼켰다.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쉬웠다. 세 번째를 녹일 때에는 독이 통증보다 뜨거운 자극처럼 느껴졌다.

[포식 완료.]
[생명력 잔존율 39%.]
[미독 저항(하)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핵 안정도 27%.]

처음이었다.

도망치고 숨고 얻어맞는 것 말고 내가 먼저 선택해서 무언가를 쓰러뜨린 것은.

그 기쁨이 몸속에서 푸르게 흔들렸다. 아주 작고 볼품없는 승리였지만 던전의 법칙을 조금은 이해한 느낌이 들었다. 먹는 쪽과 먹히는 쪽. 둘 사이에는 거대한 벽이 있는 게 아니었다. 한순간의 선택이 그 선을 바꿨다.

사각.

균사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즉시 몸을 낮췄다. 방금까지 벌레들이 몰려 있던 진액 웅덩이 뒤편에서 무언가가 걸어 나왔다. 털은 거의 없고 갈비뼈가 드러날 만큼 마른 쥐였다. 그러나 앞발만큼은 흉측하게 컸다. 돌칼 같은 발톱 두 개가 바닥을 긁을 때마다 균사가 잘려 나갔다.

[경고]
[칼날쥐. 하급 포식형 몬스터.]
[현재 개체 대비 전투력 우위.]
[직접 교전 시 소멸 가능성 72%.]

72%.

숫자가 내 몸을 얼렸다.

칼날쥐가 머리를 낮췄다. 눈은 희미하게 퇴화되어 있었지만 코끝과 수염이 쉴 새 없이 떨렸다. 놈은 내 위치를 냄새와 진동으로 읽고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

그 생각과 동시에 놈이 뛰었다.

콰직!

나는 옆으로 몸을 흘렸다. 발톱이 지나간 자리에서 점액 한 줌이 찢겨 나갔다. 고통이 핵을 세게 때렸다. 몸 전체가 반사적으로 오그라들었다.

[손상 발생.]
[외피 방어 구조 없음.]

"알고 있어!"

나는 안쪽으로 욕을 삼켰다.

칼날쥐가 다시 방향을 틀었다. 빠르다. 나처럼 밀려 가는 게 아니라 발톱으로 바닥을 찍어 튀어 오른다. 좁은 던전 바닥에서도 움직임이 날카로웠다. 정면으로 맞서면 다음 공격에 핵이 갈릴 것이다.

나는 균사 지대 쪽으로 굴렀다.

칼날쥐가 쫓아왔다. 발톱이 바닥을 때릴 때마다 진동이 몸을 울렸다. 나는 방금 먹은 독각 시체벌레의 독소를 점액 표면 쪽으로 밀어냈다. 동시에 이끼를 녹이며 얻은 끈적한 진액을 섞었다.

내 몸 가장자리에서 흐린 녹색 방울들이 맺혔다.

놈이 세 번째로 달려드는 순간 나는 몸을 부풀렸다가 터뜨리듯 독액을 뿜었다.

촤악!

독액이 놈의 코끝과 수염을 덮었다. 칼날쥐가 비틀거렸다. 치명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냄새와 진동으로 사냥하는 놈에게 잠깐의 혼란은 충분했다.

나는 바로 옆 돌홈으로 파고들었다.

입구는 내 몸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큼 낮았다. 칼날쥐는 멈추지 못했다. 앞발 하나가 홈 안으로 깊게 박혔다. 발톱이 내 옆구리를 다시 찢었지만 이번에는 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발톱을 감쌌다.

칼날쥐가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내 몸이 바깥으로 끌려 나갈 뻔했다. 나는 균사를 붙잡고 돌홈의 거친 모서리에 점액을 걸었다. 찢겨도 놓지 않았다. 지금 놓치면 다음에는 기회가 없다.

[대상 조직 접촉.]
[칼날쥐의 발톱 성분을 분석합니다.]
[칼슘질, 흑철 미립자, 마력 경화 흔적.]

발톱이 내 안에서 타들어 갔다. 녹이려 할수록 날카로운 구조가 몸을 긁었다. 포식이 곧 고통이었다. 그래도 나는 더 깊이 삼켰다.

먹어야 산다.

하지만 이제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문제가 아니었다.

저 발톱이 필요했다. 바닥을 찍고 방향을 바꾸는 힘이 필요했다. 내 몸을 지키는 딱딱한 껍질이 필요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확장 분석을 시작합니다.]
[포식 대상의 구조를 임시 재현할 수 있습니다.]
[신규 기능 후보: 의태.]

의태.

그 단어가 핵 안쪽에 박혔다.

먹은 것을 녹여 없애는 힘이 아니다. 먹은 것을 이해하고 필요한 만큼 흉내 내는 힘. 슬라임이라는 최약체 몸으로는 가질 수 없던 다리와 발톱과 껍질을 잠시나마 빌리는 길.

칼날쥐가 마지막으로 발버둥쳤다. 놈의 다른 앞발이 돌홈을 긁었고 내 몸 위에 긴 상처가 생겼다. 핵까지 닿지는 않았다. 나는 남은 점액을 모두 끌어모아 놈의 목덜미를 덮었다.

독액.

점액.

압박.

세 가지를 한꺼번에 밀어 넣었다.

칼날쥐의 몸부림이 느려졌다. 발톱이 바닥에서 빠지려는 순간 나는 오히려 안쪽으로 당겼다. 놈의 무게가 돌홈에 끼었고 목덜미는 내 몸속에서 천천히 무너졌다.

길고 지독한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진동이 멎었다.

나는 움직이지 못한 채 한동안 그 자리에 붙어 있었다. 승리의 기쁨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피로였다. 몸 곳곳이 너덜너덜했다. 하지만 핵은 부서지지 않았다.

[포식 완료.]
[생명력 잔존율 51%.]
[핵 안정도 41%.]
[칼날쥐의 외피 구조 일부 기록.]
[칼날쥐의 발톱 구조 일부 기록.]
[의태 기초 단계가 개방됩니다.]

나는 아주 천천히 몸 표면을 떨었다.

투명하던 점액 바깥에 잿빛 막이 생겼다. 처음에는 먼지가 달라붙은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막은 내 의지에 따라 얇아졌다가 두꺼워졌다. 완전한 갑각은 아니었다. 손톱으로 누르면 찢길 만큼 약한 막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무것도 없던 조금 전과는 달랐다.

다음으로 바닥 쪽 점액이 굳었다.

짧은 돌기들이 솟았다. 칼날쥐의 발톱을 흉내 낸 것이라기엔 우스울 정도로 뭉툭했다. 그래도 돌바닥을 붙잡을 수 있었다. 나는 힘을 주었다.

툭.

몸이 앞으로 튀었다.

미끄러지는 게 아니었다. 내가 고른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몸 안쪽이 뜨겁게 끓었다.

[진화 조건 일부 충족.]
[예비 선택지 개방.]
[독액 슬라임: 독소 적응 및 분비 특화.]
[외피 슬라임: 표면 경화 및 방어 특화.]
[의태 슬라임: 섭취 대상 구조 재현 특화.]
[최종 진화에는 추가 포식 경험과 핵 안정도 상승이 필요합니다.]

세 갈래.

나는 화면처럼 떠오르는 알림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바라본다는 표현은 아직도 어색했다. 눈은 없지만 정보가 핵 안쪽에 새겨졌다.

독으로 사냥할 것인가.

껍질로 버틸 것인가.

아니면 다른 존재의 장점을 훔쳐 나만의 몸을 만들 것인가.

답은 아직 낼 수 없었다. 지금은 선택지를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더 이상 굴러다니는 먹잇감만은 아니었다.

그때 던전 깊은 곳에서 낮은 울음이 번졌다.

우우우웅.

소리는 바람 같기도 했고 거대한 문이 열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바닥의 먼지가 떨렸다. 균사들이 일제히 납작하게 엎드렸다. 방금 죽은 칼날쥐의 피 냄새가 어둠 속으로 퍼져 나갔다.

[경고: 상위 포식자의 접근 가능성.]
[권장 행동: 은폐 또는 도주.]

도주.

조금 전까지는 그 말이 유일한 정답이었다.

하지만 나는 바닥을 붙잡은 짧은 돌기를 느꼈다. 몸 표면에 생긴 잿빛 막을 느꼈다. 독액이 아직 조금 남아 있고 돌홈과 균사 지대의 위치도 기억하고 있었다.

무작정 달아나면 언젠가 더 빠른 놈에게 잡힌다.

숨어만 있으면 언젠가 더 작은 먹이도 바닥난다.

나는 칼날쥐의 남은 뼈 조각을 몸 안으로 끌어당기며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거대한 발소리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직 그 정체는 모른다.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는 더 이상 그냥 먹히기 위해 기다리지 않는다.

"좋아."

소리 없는 독백이 점액질 몸속에서 흔들렸다.

"이번엔 지형부터 먹어 치워 주마."

나는 새로 얻은 돌기를 바닥에 박고 어둠 속으로 몸을 낮췄다. 던전 최하층의 차가운 공기가 처음으로 사냥터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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