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몹에서 마왕까지: 던전 마스터

시놉시스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소년, 불의의 사고 후 눈을 떠보니 이세계의 가장 깊고 어두운 던전 속이었다. 그것도 손가락 하나로 터뜨릴 수 있는 최약체 몬스터 '슬라임'으로! 하지만 실망도 잠시, 그에게는 만물을 흡수하고 분석하는 유니크 스킬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주어졌다. 몬스터를 먹으며 진화하고 상처 입은 인간들을 도우며 '공존'의 꿈을 꾸기 시작한 소년. 짓밟히던 잡몹에서 시작해 대륙 전체를 뒤흔드는 가장 자비롭고 강력한 '마왕'이 되기까지의 위대한 서사가 지금 시작된다.
1화: 최하층의 점액질
철저한 암흑이었다.
소리도 빛도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절대적인 공허. 감각이 마비된 것 같은 기묘한 감각 속에서 나는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마지막 기억은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시야를 가득 채웠던 덤프트럭의 굉음과 강렬한 헤드라이트 불빛뿐이었다.
'나, 죽은 건가?'
당연히 사후세계나 천국 같은 곳을 떠올렸다. 하지만 내 몸의 상태가 이상했다. 팔과 다리를 움직이려 했지만 사지의 감각이 전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뼈'와 '근육'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 것 같았다.
툭. 출렁-.
몸을 움직이자 사방으로 출렁이는 기묘한 유동성이 느껴졌다. 바닥에 밀착된 채 끈적하게 밀려나가는 감각. 시야가 없었음에도 주변의 미세한 진동이 온몸의 표피를 통해 뇌로 다이렉트하게 전달되었다.
[알림: 개체명 '강하늘', 이세계 전이 절차를 완료했습니다.]
[기본 종족 '슬라임'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머릿속을 울리는 기계적이고 서늘한 목소리. 나는 경악했다. 슬라임?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에서 모험가들이 레벨 1때 칼 한 번 휘두르면 터져 나가는 그 동네북 잡몹?
"지, 지금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입이 없었다. 그저 뻐끔거리는 공기 방울만이 점액질 몸통 속에서 부르르 떨릴 뿐이었다. 인간으로서의 삶이 가차 없이 난도질당하고 던전의 가장 바닥바닥한 최하층 생물체로 굴러떨어졌다는 현실이 온몸을 감쌌다. 절망감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슬퍼할 시간조차 던전은 허락하지 않았다.
스스스스-.
저 멀리서 거친 마찰음이 들려왔다. 점액질 표면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이 심상치 않았다. 본능적인 공포가 뇌리를 스쳤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나라는 존재를 사냥하기 위해 다가오는 거대한 포식자라는 것쯤은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키이이익-!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무언가 바닥을 강하게 내리쳤다.
퍼억!
"끄아악?!"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내 몸의 일부분이 뜯겨 나가는 처절한 고통이 전신을 관통했다. 점액질이 사방으로 튀었고 생명력이 급격하게 빠져나가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세포 단위로 분해되어 다른 괴물의 영양분이 될 터였다.
살고 싶었다. 어떻게 얻은 두 번째 기회인데 이 어두운 구덩이에서 이름도 모를 괴물의 한 입 거리로 끝날 수는 없었다.
'움직여, 제발 움직이라고!'
나는 온 힘을 쥐어짜 내 몸을 뒤틀었다. 다행히 슬라임의 신체는 유연했다. 두 번째 공격이 내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돌바닥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반동을 이용해 나는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툭, 데구르르.
작은 구멍 속으로 굴러떨어진 나는 숨을 죽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듯 점액질 몸을 들썩이며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 괴물은 덩치가 커서 내가 들어온 좁은 바위 틈새까지 쫓아오지는 못하는 듯했다. 멀어져 가는 괴물의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도는 잠시였다. 몸의 거의 절반이 날아간 상태. 투명했던 내 몸은 거뭇한 던전의 먼지와 핏물로 오염되어 가고 있었다.
[위험: 개체 마력 및 생명력 저하. 현재 잔존율 14%.]
[이대로 방치할 경우 10분 이내에 영구 소멸합니다.]
"방법이…… 방법이 없어……."
그때, 내 점액질 표면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걸렸다. 바위 틈새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작은 이끼 서린 돌멩이와 정체 모를 벌레의 사체였다. 쇠약해진 내 본능이 그것들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먹어라. 먹어야 산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부르르 떨리는 점액으로 벌레의 사체와 이끼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내 안으로 끌어당겼다. 투명한 몸 안에서 이물질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유니크 스킬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발동합니다.]
[대상을 분석합니다…….]
- 독각 시체벌레의 사체: 단백질 및 미량의 독소 흡수 가능.
- 동굴 벽 이끼: 수분 및 미네랄 흡수 가능.
[포식이 완료되었습니다. 생명력이 5% 회복됩니다.]
[스킬 '미독 저항(하)'을 획득했습니다.]
거짓말처럼 고통이 줄어들고 뜯겨 나갔던 점액질 부위가 조금씩 차오르기 한 리클레이메이션(재생)이 시작되었다. 차가운 에너지가 전신을 돌며 활력을 불어넣었다.
'…삼라만상?'
그것은 단순한 포식이 아니었다. 대상을 완전히 해체하고 분석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절대적인 권능이었다. 비록 지금은 가장 미약한 벌레와 이끼를 먹었을 뿐이지만 이 능력이 있다면 얘기가 달랐다.
내 몸을 이루는 푸르스름한 점액질이 어둠 속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인간이었던 시절의 따뜻한 마음과 생존을 향한 괴물 같은 집념이 그 작은 몸 안에서 융합되고 있었다.
"슬라임이라고 무시하지 마라."
비록 소리는 나오지 않는 독백이었지만 나의 각오는 던전 최하층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다 먹어치우고 반드시 올라간다."
인간의 영혼을 가진 최약체 몬스터. 훗날 온 대륙의 인간들이 칭송하고 마족들이 경외해 마지않을 거대한 전설의 첫걸음이 이 어둡고 습한 던전의 구석진 바위 틈새에서 조용히 싹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