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몹에서 마왕까지: 던전 마스터

4화: 녹슨 문턱
첫 번째 턱은 생각보다 높았다.
인간이었다면 무릎도 제대로 들 필요 없는 낮은 계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내 몸에는 무릎도 발도 없었다. 물살에 젖은 점액 덩어리 하나가 바위 벽에 달라붙어 스스로를 끌어올려야 했다.
나는 점착막을 넓게 펼쳤다.
촤악.
젖은 바위 표면에 점액이 눌어붙었다. 거미다리 도마뱀에게서 뜯어낸 강모 구조의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완벽한 다리는 아니었다. 가느다란 털을 그대로 만들기에는 몸이 너무 무르고 핵도 불안정했다.
그래도 이전과는 달랐다.
미끄러지던 몸이 한순간 버텼다. 나는 칼날쥐 발톱을 흉내 낸 짧은 돌기를 아래쪽에 세우고 몸을 당겼다. 점액이 길게 늘어나며 핵이 뒤쪽으로 끌렸다.
[점착막 운용.]
[유지 시간 짧음. 수분 과다 환경에서 효율 저하.]
"알아. 그래도 해야지."
소리 없는 말이 핵 안쪽에서만 맴돌았다.
뒤쪽 물길 아래에서는 아직 포자 냄새와 피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거미다리 도마뱀이 다시 정신을 차릴지도 모른다. 포식자가 아니더라도 냄새를 맡고 몰려올 놈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나는 첫 턱 위로 몸을 밀어 올렸다.
철퍽.
몸이 납작하게 퍼졌다. 계단 표면은 자연 바위가 아니었다. 일정한 폭으로 깎여 있었고 모서리는 오래 닳았지만 여전히 직선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물은 얇게 흐르며 홈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
금속 냄새는 더 진했다.
녹슨 피 냄새 같았다. 하지만 살아 있는 피와 달랐다. 차갑고 오래됐고 혀 대신 기억을 찔렀다. 비 오는 날 자전거 체인을 만졌을 때 손끝에 남던 냄새와 비슷했다.
나는 두 번째 턱을 향해 몸을 세웠다.
이번에는 조금 나았다. 점착막을 넓게 펴고 아래쪽 돌기를 박은 뒤 핵을 앞으로 당겼다. 몸은 한 번 미끄러졌지만 떨어지지는 않았다.
세 번째.
네 번째.
계단은 어둠 속으로 이어졌다. 시야는 없었지만 벽면의 결이 규칙적으로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왼쪽 벽에는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폭의 홈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파여 있었다. 물은 그 홈을 따라 흐르다 갑자기 사라졌다.
나는 멈췄다.
물이 사라진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발밑이 울렸다.
쿠르륵.
처음에는 바닥 밑에서 돌이 굴러가는 소리인 줄 알았다. 곧 계단 옆 홈들이 한꺼번에 떨렸다. 아래로 흐르던 물살이 방향을 바꾸었다. 얇은 물막이 벽에서 떨어져 나와 내 몸을 옆으로 밀었다.
[경고: 급류 발생.]
[개체 밀도 저하 위험.]
"이런 것도 있다고?"
나는 바닥 돌기를 박았다. 하지만 계단은 젖어 있었고 돌기는 금방 긁혀 나갔다. 몸이 옆 홈 쪽으로 끌렸다. 홈은 어둠 속에서 벌어진 입처럼 열려 있었다. 그 안쪽으로 물이 빨려 들어갔다.
흡입력.
나는 점착막을 벽에 붙였다. 몸 앞쪽은 버텼지만 뒤쪽 절반이 물살에 휘말렸다. 핵이 흔들렸다. 점액이 가늘게 찢어져 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프다.
몸이 길게 늘어나며 내가 어디까지 나인지 알 수 없게 됐다. 지금 놓치면 핵도 함께 끌려간다. 그렇게 되면 다시 모일 틈도 없을 것이다.
나는 분리 점액을 떼어냈다.
뜯겨 나간 조각에 칼날쥐 피 냄새와 남은 독액을 아주 조금 섞었다. 그리고 물살에 맡겼다. 조각은 홈 안으로 빨려 들어가다 중간에서 흔들렸다.
그때 작은 진동들이 물속에서 솟았다.
실처럼 가는 것들이었다. 지렁이보다 얇고 더 길었다. 투명한 몸속에 검붉은 선이 하나씩 지나갔다. 놈들은 분리 점액에 몰려들어 바늘 같은 입을 박았다.
[대상 분석.]
[흡혈 실지렁이. 하급 수서 기생 몬스터.]
[위험 요소: 체액 흡수, 군집 부착.]
역시 그냥 물이 아니었다.
실지렁이들이 분리 점액에 달라붙는 동안 내 몸을 당기는 힘이 조금 줄었다. 나는 벽면을 더듬었다. 녹슨 금속 냄새가 바로 위에서 났다. 점액 끝에 딱딱하고 거친 것이 걸렸다.
철못.
반쯤 빠져나온 못이 계단 옆 석재 사이에 박혀 있었다. 표면은 부스러질 만큼 거칠었다. 나는 점착막을 길게 늘려 못을 감았다.
까드득.
녹이 점액 속으로 파고들었다. 차갑고 거친 알갱이들이 몸 표면을 긁었다. 하지만 못은 버텼다. 나는 점착막을 더 조이고 핵을 위쪽으로 끌어당겼다.
물살이 아래를 빼앗았다.
나는 위를 물었다.
몸이 찢어지는 감각과 함께 계단 위로 튀어 올랐다. 한 덩어리였던 몸이 늦게 따라와 철퍽거리며 모였다. 분리 점액은 이미 실지렁이들에게 뜯겨 흔적만 남았다.
[생명력 잔존율 31%.]
[핵 안정도 43%.]
[금속 산화물 접촉.]
나는 한동안 계단 위에 퍼져 있었다.
물은 다시 얇은 흐름으로 돌아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홈을 따라 아래로 흘렀다. 자연스러운 물길이 아니었다. 일정한 순간에 열리고 닫히는 장치처럼 느껴졌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곳은 몬스터만 피하면 되는 장소가 아니었다.
나는 철못을 감았던 점액을 살폈다. 녹슨 가루가 표면에 박혀 있었다. 보통 먹이라면 따뜻하게 풀리며 몸속으로 섞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달랐다. 점액 일부가 뻣뻣하게 굳고 가장자리가 갈라졌다.
쓸모없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삼라만상이 반응했다.
[성분 분석.]
[산화 철 및 미량 광물질.]
[영양 전환 효율 극저하.]
[표면 경화 반응 유도 가능.]
먹을 수는 없지만 버릴 필요도 없다는 뜻인가.
나는 녹슨 가루를 핵 쪽으로 끌어들이려다 멈췄다. 본능이 거부했다. 저 거친 알갱이들이 핵 근처까지 들어오면 점액 흐름이 막힐 수 있다.
전부 삼키면 죽는다.
그럼 겉에만 둔다.
나는 녹이 박힌 점액을 얇게 펼쳤다. 몸 가장자리 일부에만 막처럼 둘렀다. 처음에는 뭉치고 갈라졌다. 움직일 때마다 딱딱해진 부분이 부서져 떨어졌다.
다시.
더 얇게.
점액과 녹 가루와 이끼 진액을 섞었다. 미끄러지지 않을 만큼만 굳히고 찢어지지 않을 만큼만 남겼다. 칼날쥐 외피를 흉내 내던 감각을 떠올렸다. 단단한 껍질이 아니라 긁는 막. 오래 버티는 갑옷이 아니라 한 번 버티는 손톱.
[임시 구조 형성.]
[녹막 외피. 정식 스킬로 등록되지 않았습니다.]
[과다 운용 시 개체 유연성 저하.]
"좋아. 한 번이면 충분해."
나는 굳어진 가장자리를 계단 옆 홈에 대고 긁었다.
드드득.
돌가루가 떨어졌다. 일반 점액으로는 미끄러졌을 틈새가 조금씩 벌어졌다. 그 안쪽에서 더 강한 금속 냄새가 새어 나왔다. 나는 녹막 외피를 다시 세워 눌렀다.
뚝.
작은 돌조각이 빠졌다.
그 뒤에는 철창이 있었다.
처음에는 바위 그림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규칙적인 세로선들이 물기 속에서 느껴졌다. 손가락보다 굵은 철봉들이 벽 안쪽에 박혀 있었고 대부분은 녹으로 부풀어 있었다. 철창 너머에는 비어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 안에서 냄새가 났다.
상한 물.
마른 뼈.
그리고 살아 있는 체액.
나는 몸을 낮췄다. 철창 사이 틈은 좁았다. 지금의 내 몸이라면 아주 얇게 만들면 통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핵은 통과하지 못한다. 몸만 들여보냈다가 끌려가면 끝이다.
[대상 구조 분석.]
[노후 철제 격자.]
[안쪽 공간의 진동 다수 감지.]
다수.
그 말이 나오자마자 철창 너머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사사삭.
작은 발소리들이었다. 독각 시체벌레보다 가볍고 칼날쥐보다 불규칙했다. 굶주린 것들이 서로의 몸을 밟고 움직이는 소리. 철창 안쪽 벽면을 긁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나는 점액 한 줄기를 철창 틈으로 밀어 넣었다.
냄새만 확인한다.
먹을 수 있는지 본다.
절대 깊이 넣지 않는다.
그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무언가가 점액을 물었다.
콱.
날카로운 이빨은 아니었다. 작고 많은 갈고리들이 한꺼번에 박힌 감각이었다. 점액 줄기가 안쪽으로 잡아당겨졌다. 나는 즉시 끊으려 했지만 놈은 끊어진 부분까지 씹어 삼켰다.
[개체 일부 손실.]
[대상 체액 반응 분석 중.]
"먹힌 건가."
분노보다 먼저 기묘한 감각이 올라왔다.
저 안쪽의 놈은 약하다. 적어도 거미다리 도마뱀 같은 압도적인 포식자는 아니다. 하지만 굶주렸고 수가 많다. 하나하나는 작아도 철창 안에서 오래 갇혀 서로를 뜯어먹은 냄새가 났다.
갇힌 먹이.
아니.
갇힌 위험.
철창 오른쪽 아래에서 금속 조각 하나가 달랑거렸다. 물때와 녹에 묻혀 있었지만 모양이 달랐다. 못도 철봉도 아니었다. 둥근 머리와 비틀린 꼬리가 있는 조각.
열쇠처럼 보였다.
하지만 누가 열쇠를 여기 남겼지?
누가 이 철창을 잠갔지?
내가 그 답을 알 리 없었다. 삼라만상도 침묵했다. 분석할 수 있는 것은 만진 것뿐이고 내가 만진 것은 녹슨 철창과 잡아먹힌 점액뿐이다.
그때 더 깊은 곳에서 소리가 났다.
쾅.
철이 철을 때리는 소리였다.
한 번.
잠시 멈춤.
또 한 번.
쾅.
철창 안쪽의 작은 진동들이 동시에 멈췄다. 굶주린 것들이 겁먹은 듯 벽 틈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아주 낮은 긁힘이 바닥을 타고 다가왔다.
나는 몸을 뒤로 뺐다.
계단 아래에는 배수 홈과 실지렁이가 있다. 뒤로 너무 내려가면 다시 물살에 잡힌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철창 옆 좁은 턱을 지나야 한다. 그런데 그 안쪽에는 아직 정체를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쾅.
세 번째 소리.
철창이 아주 조금 떨렸다.
녹이 떨어져 내 몸 위에 앉았다. 점액 가장자리의 녹막 외피가 거칠게 반응했다. 위험하다는 감각과 쓸 수 있다는 감각이 동시에 올라왔다.
나는 열쇠 조각을 향해 점액을 뻗었다.
문을 열 생각은 없었다.
아직은.
하지만 선택지를 손에 넣어야 했다. 던전에서는 도망칠 길도 먹을 것도 무기도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내가 씹어 삼키거나 훔쳐 와야 한다.
점액이 열쇠 조각에 닿았다.
차가웠다.
그리고 철창 너머의 어둠이 한꺼번에 깨어났다.
수십 개의 작은 진동이 철창 쪽으로 몰렸다. 그 뒤에서 무거운 쇳소리가 다시 울렸다.
쾅.
나는 녹슨 조각을 감아쥐고 핵을 단단히 움츠렸다.
"좋아."
내면의 말은 떨렸다. 그래도 물러서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문턱을 내가 고른다."
철창 너머에서 굶주린 이빨들이 녹슨 쇠를 긁었다. 나는 계단 위의 차가운 물살 속에서 조각을 끌어당기며 다음 움직임을 계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