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에 던전이 열렸다

4화: 셔터 안쪽의 목소리
쾅.
아래층에서 금속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울렸다.
김한결은 계단 난간을 붙잡은 채 숨을 죽였다. 소리는 분명 매점 방향이었다. 평소라면 쉬는 시간마다 학생들이 몰려가던 본관 1층 중앙 계단 옆.
지금은 그 짧은 거리도 지옥 한가운데처럼 느껴졌다.
"안쪽에서 나는 거 맞지?"
민수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한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치는 소리면 울림이 더 퍼졌을 거야. 저건 안쪽이야."
"그럼 사람일 수도 있잖아."
한아름의 말에 대열 뒤쪽 학생들이 술렁였다. 기대가 생기자 곧바로 숨소리가 커졌다.
독사가 이를 악물고 손을 들었다.
"입 다물어. 지금 소리 키우면 다 같이 죽는다."
학생들은 다시 입을 막았다. 그러나 숨소리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발목을 다친 학생을 부축한 둘은 이미 다리가 풀려 있었다.
한결은 그들을 두고 빠르게 내려가자는 말을 삼켰다.
그런 판단은 쉬웠다.
하지만 한번 버린 사람을 다시 주울 수는 없었다.
"내가 앞에 설게. 아름아, 숨 무너지는 애들 잡아줘. 선생님은 뒤."
"알았어."
아름은 바로 대답했다. 겁먹은 여학생의 손목을 잡고 자기 호흡에 맞췄다.
"하나, 둘. 발소리 작게. 계단은 난간 쪽으로."
한결은 부러진 빗자루 자루를 쥐고 계단을 내려갔다.
3층에서 2층으로 꺾이는 계단참에는 검은 재가 흩어져 있었다. 고블린이 죽은 흔적이었다. 누가 죽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2층 복도 쪽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키히."
한결은 멈췄다.
고블린 한 마리가 계단참 아래 사물함 틈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놈은 피 묻은 체육복 조각을 씹다가 한결과 눈이 마주쳤다.
"키엑?"
"뛰지 마."
한결은 속삭였다.
고블린이 먼저 달려들었다. 한결은 빗자루 자루를 가로로 휘둘렀다. 끝이 놈의 어깨에 맞았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단검이 난간을 긁고 불꽃을 튀겼다.
민수가 가방을 던졌다.
"막아!"
가방이 놈의 얼굴을 덮었다. 뒤쪽 남학생 둘이 의자를 밀어 넣었다. 계단에서 의자를 들고 온 이유가 처음으로 쓸모를 했다.
고블린은 의자 다리 사이에 끼어 괴성을 질렀다.
"소리!"
아름이 낮게 외쳤다.
늦었다.
고블린의 비명이 계단을 타고 퍼졌다. 저 위, 3층 복도 어딘가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방향을 바꾸는 소리가 났다.
쿵.
쿵.
발톱 괴물이었다.
"내려가!"
독사가 대열 뒤에서 밀었다. 한결은 고블린을 끝까지 죽이지 못하고 계단 아래로 뛰었다. 의자에 낀 고블린은 사지를 비틀며 빠져나오려 했고, 그 소리는 발톱 괴물을 더 부를 것이다.
1층에 도착했을 때, 매점 셔터가 보였다.
평소의 은색 셔터는 아니었다. 표면에 검은 금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고, 가운데에는 낯선 문자가 희미하게 떠 있었다.
[보급 구역]
[폐쇄 상태]
쾅.
안쪽에서 다시 두드렸다.
학생 몇 명이 울먹이며 앞으로 나서려 했다. 한결은 손을 들어 막았다.
셔터 앞 바닥에는 끊어진 앞치마 끈이 떨어져 있었다. 흰색 천 끝에 검붉은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한결은 그것을 알아봤다.
매점 아주머니, 오순덕이 늘 허리에 묶고 있던 앞치마 끈이었다.
"아줌마?"
한결은 셔터에 바짝 붙어 속삭였다.
처음에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복도 저편에서 의자 끌리는 소리와 고블린의 울음소리가 겹쳤다.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 한결이 다시 부르려는 순간, 셔터 안쪽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학생이냐?"
한결의 목이 막혔다.
"저 한결이에요. 김한결."
"한결이?"
쇠붙이 너머 목소리가 흔들렸다.
"문 크게 두드리지 마라. 뒤쪽에도 있다."
"뒤쪽?"
"창고문. 계속 긁는다. 나 혼자는 못 버틴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셔터 손잡이를 잡은 한결의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보급 구역 접속 확인]
[긴급 개방 가능]
[소모 비용: 20 던전 코인]
[현재 보유 던전 코인: 30]
던전 코인.
처음으로 사용처가 나타났다.
민수가 한결의 얼굴을 살폈다.
"왜? 또 뭐 보여?"
"열 수 있어."
"그럼 열어!"
"코인이 필요해. 이거 쓰면 거의 안 남아."
한결은 스스로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었다.
아끼면 뭐 할 건데.
문 너머에 사람이 있고, 뒤에서는 괴물이 내려오고 있었다.
"연다."
그가 마음속으로 선택하자 셔터의 문자가 붉게 번졌다.
철컥.
셔터가 떨리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완전히 열리지는 않았다. 성인 허리 높이쯤에서 멈췄고, 아래쪽은 사람이 몸을 낮춰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20 던전 코인을 소모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던전 코인: 10]
"한 명씩 들어가! 낮게!"
한결이 소리쳤다.
학생들이 매점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안쪽에서 오순덕 아주머니가 진열대 하나를 붙잡고 있었다. 이마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고, 한 손에는 찌그러진 국자를 들고 있었다.
"빨리, 빨리 들어와!"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복도 저편에서 고블린 둘이 나타났다. 계단참에서 났던 소리를 따라온 놈들이었다.
"키에엑!"
민수가 셔터 앞에서 뒤돌아섰다.
"야, 나 못 들어갔는데!"
"숙여!"
한결은 민수의 어깨를 눌러 셔터 밑으로 밀어 넣었다. 고블린의 단검이 바로 뒤 공기를 갈랐다. 독사가 빗자루를 휘둘러 놈의 팔을 쳤다.
"선생님!"
"먼저 들어가!"
독사의 얼굴은 새파랬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한결은 마지막까지 남은 학생 하나를 밀어 넣고, 독사의 팔을 잡아당겼다. 둘은 거의 굴러 들어가듯 매점 안으로 들어왔다.
셔터 아래로 고블린의 손이 비집고 들어왔다.
오순덕 아주머니가 국자로 그 손등을 내리쳤다.
깡!
"내 매점에 손대지 마, 이놈아!"
평소라면 웃겼을 말이었다. 지금은 아무도 웃지 않았다.
한결과 민수, 독사가 동시에 진열대를 밀었다. 과자 봉지들이 쏟아졌다. 진열대가 셔터 안쪽을 막으며 고블린의 팔을 밀어냈다.
그제야 한결은 매점 안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냉장고 문 하나가 깨져 있었고, 음료수들이 바닥에 굴러다녔다. 계산대 뒤쪽에는 박스들이 쌓여 있었다.
컵라면, 빵, 삼각김밥, 이온 음료, 박스테이프, 커터칼, 알루미늄 자.
살 수 있는 물건.
보관 중인 물건.
한결이 매점 바닥에 두 발을 딛는 순간,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
[보급 구역 내부 진입]
[매점 인벤토리(S)가 구역 권한과 동기화됩니다.]
[등록 슬롯 확장: 10 -> 30]
[진열대 일괄 등록 기능이 개방됩니다.]
[조합 제작 기능이 개방됩니다.]
"미쳤다."
말이 저절로 나왔다.
아름이 곁으로 다가왔다.
"뭐가 보여?"
"인벤토리가... 늘었어. 여기 물건들을 한꺼번에 쓸 수 있을 것 같아."
다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매점 뒤쪽에서 끔찍한 긁는 소리가 났다.
끼기기긱.
창고문이었다. 얇은 철문이 안쪽으로 휘어지고 있었다. 문틈 사이로 초록색 손가락 세 개가 비집고 들어왔다.
학생들 중 누군가가 진열대의 빵을 집어 들었다.
"먹을 거잖아. 하나만."
독사가 바로 손목을 잡았다.
"놔. 지금 뜯으면 난장판 된다."
"배고픈데요!"
"나도 배고파."
독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래도 순서 없이 뜯으면 더 빨리 죽어."
한결은 그 말을 들으며 계산대 쪽으로 뛰었다. 시스템 창에 등록 가능한 대상들이 쏟아졌다. 너무 많아서 눈이 어지러웠다.
[초코우유 17개 등록 가능]
[이온 음료 12개 등록 가능]
[크림빵 24개 등록 가능]
[커터칼 6개 등록 가능]
[알루미늄 자 8개 등록 가능]
[박스테이프 5개 등록 가능]
창고문이 한 번 더 휘었다.
쾅!
오순덕 아주머니가 신음했다.
"저 문 오래 못 간다."
한결은 커터칼을 집었다. 손에 쥐자 변환 후보가 떠올랐다. 하지만 단독 변환은 짧은 칼날뿐이었다. 고블린을 가까이서 상대해야 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새 창이 겹쳤다.
[조합 제작 후보]
[커터칼날 + 알루미늄 자 + 박스테이프]
[결과: 간이 절단창]
[제작 비용: 60포인트]
"이거다."
한결은 커터칼, 알루미늄 자, 박스테이프를 한꺼번에 등록했다.
물건들이 손안에서 빛으로 풀렸다. 곧이어 길쭉한 금속 막대가 나타났다. 알루미늄 자처럼 가볍지만 끝에는 커터칼날 여러 개가 비늘처럼 겹쳐 있었다.
손잡이는 박스테이프가 감긴 듯 손에 달라붙었다.
[간이 절단창]
[등급: 임시]
[효과: 얇은 장갑과 힘줄 절단에 유리]
"비켜!"
한결은 창고문으로 달려갔다.
문틈으로 고블린의 팔이 들어와 잠금쇠를 더듬고 있었다. 한결은 숨을 멈추고 절단창을 찔렀다.
푹!
칼날이 손목에 박혔다.
"키아아악!"
문밖의 고블린이 비명을 질렀다. 팔이 빠져나가려 했다. 한결은 이를 악물고 옆으로 비틀었다. 절단창 끝이 고블린의 힘줄을 긁어냈다.
검은 피가 튀었다.
겁이 올라왔지만 손을 놓지 않았다.
"지금 밀어!"
민수와 남학생 둘이 창고문 앞 진열대를 밀었다. 아름도 옆에서 박스 더미를 끌어왔다. 오순덕 아주머니는 다친 다리를 끌며 냉장고 옆 잠금 막대를 가져왔다.
"이거 끼워!"
철막대가 문고리 사이에 걸렸다.
고블린의 팔이 밖으로 빠져나가고, 창고문이 간신히 닫혔다. 문밖에서 몇 번 더 두드리는 소리가 났지만, 이번에는 안쪽의 진열대와 박스가 버텼다.
한결은 절단창을 들고 숨을 몰아쉬었다.
손이 떨렸다. 무기는 생겼지만, 그 무기를 들고 싸우는 건 여전히 무서웠다.
오순덕 아주머니가 한결을 보았다.
"너... 그거 뭐냐."
대답하기 전에, 셔터 바깥에서 다른 소리가 들렸다.
고블린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사람 발소리였다.
여럿.
"매점! 여기 매점 열렸어!"
누군가가 셔터를 두드렸다.
"안에 사람 있죠? 문 열어! 제발 열라고!"
매점 안 학생들의 시선이 동시에 진열대 위 음식으로 향했다.
한결은 절단창을 내려다보았다.
매점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진짜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