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로맨스는 휴재 중입니다만?9화

로맨스는 휴재 중입니다만?

로맨스는 휴재 중입니다만?

9화: 대기업 사장님, 알뜰폰 매장에 주저앉다

동네 어귀에 위치한 자그마한 휴대폰 멀티숍의 유리문이 열리자,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청량하게 울렸다. 매장 안은 최신형 스마트폰의 화려한 광고판과 형형색색의 포스터로 가득 차 있었다.

"어서 오세요! 기기 변경이세요, 신규 가입이세요?"

지루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던 젊은 직원이 손님을 확인하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회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지만 모델 뺨치는 비율의 미남과 그 뒤를 쫓아 들어온 후줄근한 차림의 여자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기, 신규 가입 좀 하려고 하는데요. 알뜰폰 선불 유심으로요."

세아가 주눅 들지 않으려 당당하게 지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 도하는 매장 안의 조잡한 인테리어를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둘러보더니, 전시된 최신 스마트폰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K-스마트에서 지난 분기에 출시한 하이엔드 모델이군. 현실 세계의 디스플레이 가공 기술은 생각보다 조악하지 않군 그래."
"도하 씨, 제발 입 좀……!"

세아가 도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직원은 도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서류를 내밀었다.

"아, 네. 가입자분 신분증 좀 주시겠어요?"

도하는 주머니에서 방금 전 '창조'된 빳빳한 거소증을 꺼내 탁자 위에 툭 던졌다. '강진우'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신분증을 직원이 스캐너에 넣자, 세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소설 속 설정이 현실 행정망에 정말 완벽하게 먹혀들 것인가에 대한 도박이었다.

삐빅-.

"네, 신원 확인되셨고요. 요금제는 가장 저렴한 통화 무제한에 데이터 5기가 짜리로 하시면 되죠?"
"자, 잠깐만요. 데이터 5기가라니? 난 실시간으로 글로벌 증시 동향을 파악하고 대용량 그래픽 기획안을 수시로 다운받아야 한다. 데이터는 당연히 무제한 최고 사양으로……."
"사장님, 그 요금 내줄 돈이 제 지갑에 없어요. 닥치고 5기가 쓰세요."

세아가 이빨을 사려 물고 속삭이자 도하는 억울한 듯 입술을 다물었다. 직원은 두 사람의 만담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며 능숙하게 유심칩을 뜯어 중고 스마트폰 공기계에 장착했다.

"자, 개통되셨습니다. 번호는 010-XXXX-XXXX 이고요. 본인 인증 하실 때 통신사 '알뜰폰'으로 선택하셔야 해요."

스마트폰을 건네받은 도하의 표정은 마치 미지의 외계 문명을 접한 과학자처럼 진지했다. 화면을 켜고 터치를 몇 번 해보더니, 이내 익숙하다는 듯 전용 메신저 앱을 다운받기 시작했다. K-스마트를 이끌던 천재 사장답게 기계 적응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훌륭하군. 이제 이 번호로 내 공인인증서와 가상 금융망을 구축하겠다."
"꿈도 야무지셔라. 통장에 돈이 한 푼도 없는데 인증서가 다 무슨 소용이래요?"

세아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매장을 나섰다. 도하는 새로 생긴 스마트폰을 손에 꼭 쥔 채 세아의 뒤를 따르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액정 화면에 비친 제 가짜 신분증의 이름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강진우.'

그것은 자신이 평생 살아왔던 오만하고 차가운 '강도하'라는 껍질을 벗겨낸,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새로운 이름이었다.

"뭐 해요, 진우 씨? 얼른 안 오면 밥 안 준다!"

저만치 앞서 걸어가며 뒤를 돌아 손을 흔드는 세아의 환한 미소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도하, 아니 진우는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추리닝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간다고, 윤 작가."

차가운 얼음 황태자의 입에서 처음으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온 순간이었다.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