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는 휴재 중입니다만?

10화: 첫 출근? 아니, 첫 마감 노동!
"자, 휴대폰도 생겼고 합법적인 가짜 신분도 생겼으니 이제 밥값을 하셔야죠, 강진우 씨?"
옥탑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세아는 태도를 싹 바꾸며 장바구니에서 꺼낸 대파와 마늘을 도하의 앞에 툭 내려놓았다. 도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 손에 쥐어진 매끈한 스마트폰과 식탁 위의 대파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밥값이라니? 난 이미 내 신분증 제조 공정에 기획 보완으로 참여하지 않았나."
"그건 기획이고, 현실의 자본주의는 실노동을 원한다고요! 그리고 나 내일 모레까지 또 다음 화 연참 분량 써야 해요. 도하 씨 식비에 폰 개통비까지 쓰느라 내 통장 잔고가 지금 'K-스마트' 주가 폭락하듯 박살 났단 말이에요."
세아는 컴퓨터 의자에 풀썩 앉으며 모니터를 켰다. 도하는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지만, 세아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로 제 지갑에는 빳빳한 거소증만 있을 뿐, 단돈 10원짜리 동전 하나 없었으니까.
도하는 천천히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추리닝 바지에 최고급 맞춤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기괴한 몰골이었지만, 널따란 어깨와 탄탄한 전완근 덕에 묘하게 섹시한 분위기가 풍겼다.
"뭘 하면 되지? 대파의 세척 및 규격화인가?"
"거창하게 말하지 말고 그냥 깨끗이 씻어서 다지세요! 아, 그리고 다 하면 내 옆에 앉아서 서포트 좀 해요."
"서포트?"
도하는 깔끔하게 파를 다듬어 씻은 뒤, 세아의 낡은 보조 의자를 끌어당겨 그녀의 옆에 앉았다. 좁은 공간에 거구의 남자가 바짝 붙어 앉으니 옥탑방이 한층 더 좁게 느껴졌다. 도하의 몸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비누 향에 세아는 괜히 침을 꼴깍 삼키며 모니터만 노려보았다.
"도하 씨. 다음 화에서는 당신이 비밀 휴가를 떠나서 머무는 은신처의 풍경이 나와야 하거든요. 도하 씨가 살던 펜트하우스 말고, 진짜 마음이 편해지는 휴양지 같은 곳 어디 없어요?"
"음……."
도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해외 출장 중에 들렀던 스위스 체르마트의 오두막이 좋겠군. 사방이 만년설로 둘러싸여 있고, 벽난로에서는 자작나무 타는 냄새가 나지. 통유리창 너머로 알프스 산맥이 보이고……."
"오, 조아조아! 완전 럭셔리 힐링 감성!"
세아는 도하가 읊조리는 대로 문장을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도하는 세아의 손가락 끝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공간이 실시간으로 텍스트화되는 과정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그런데 윤 작가. 왜 여주인공은 자꾸 나한테 전화를 거는 거지? 내가 잠적했다고 설정했는데도 벌써 부재중 전화가 50통이 넘는군."
"그야 로맨스 소설이니까요! 남주가 사라지면 여주가 걱정돼서 미쳐버리는 게 공식 룰이에요."
"비효율적이야. 업무 진행 상황은 정 실장에게 공유해 놨을 텐데, 굳이 사적인 감정으로 대표의 행방을 쫓는 건 프로답지 못해. 이 구절은 지우는 게 좋겠어."
"아, 진짜! 로맨스 소설에서 비즈니스 효율 좀 찾지 마요! 독자들이 원하는 건 차가운 사장님이 여주 전화를 보고 흔들리는 갭 차이라고!"
세아가 팩 돌아서며 소리를 지르자, 두 사람의 얼굴이 코앞에서 마주쳤다. 너무 가까운 거리 때문에 도하의 짙은 눈동자에 서린 세아의 당황한 얼굴이 고스란히 비쳤다. 도하는 피하지 않고 세아를 빤히 응시하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럼…… 난 언제쯤 흔들리나?"
"네, 네?"
"소설 속의 나 말이다. 언제쯤 그 여자에게 흔들리는 거지? 내 감정의 타임라인이 궁금하군."
도하의 목소리가 묘하게 낮고 부드러웠다. 세아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올라 얼른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그, 그건 비밀이에요! 작가의 고유 권한이라고요!"
세아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속 여주인공의 자리에 자꾸만 방금 전 시장바닥에서 제 손을 잡고 걷던 도하의 모습이, 그리고 제 옆에서 파를 다듬던 진우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창조주가 흔들리는, 말도 안 되는 감정의 오류가 세아의 마음속에서 조용히 싹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