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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는 휴재 중입니다만?8화

로맨스는 휴재 중입니다만?

로맨스는 휴재 중입니다만?

8화: 현실의 문이 열리다 (그리고 공인인증서의 늪)

세아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신들린 듯 날아다녔다. 도하는 그 옆에 서서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계약서나 기획안을 검토할 때보다 훨씬 진지한 눈빛이었다.

[강도하 사장은 평소 자신의 안전과 완벽한 사생활 보장을 위해, 철저히 베일에 싸인 또 다른 신분을 구축해 두었다. 해외 유학 시절 취득한 시민권과 연계된, 대한민국 행정망의 아주 깊은 곳에 숨겨진 또 하나의 이름. '강진우'. 그것은 그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준비해 둔 완벽한 합법적 도피처였다.]

"강진우? 내 이름은 강도하인데?"
"에이, 도하 씨. 가짜 신분인데 이름이 너무 똑같으면 금방 들통나죠. 제 남동생 이름이 진우라 대충 갖다 쓴 거니까 태클 걸지 마세요. 마침 성도 똑같잖아요."
"내 거룩한 신분에 그런 성의 없는 네이밍이라니……."

도하가 투덜거렸지만 세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엔터 키를 쳤다.

원고가 플랫폼에 성공적으로 등록되자마자, 옥탑방의 공기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모니터에서 은은한 푸른 빛이 퍼져나가더니,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세아의 가죽 지갑 안으로 스르륵 스며들었다.

"어……? 방금 뭐가 지나간 것 같은데?"

세아가 조심스레 지갑을 열었다. 그리고 비명을 질렀다.

지갑 안쪽 주머니에, 방금 전까지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빳빳한 거소증 한 장이 꽂혀 있었다. 사진 속 인물은 완벽한 수트 차림의 강도하였고, 이름에는 정확히 '강진우'라고 적혀 있었다. 행정안전부의 직인까지 완벽하게 찍힌, 진짜 '진짜 같은 가짜' 신분증이었다.

다만 카드 하단의 작은 문구는 묘하게 흐릿했다. 완벽한 신분이라기보다는, 현실이 임시로 끼워 맞춘 통행증에 가까웠다. 세아는 그것이 언제든 독자들의 납득과 원고의 개연성이 무너지면 사라질 수 있는 불안한 물건이라는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세상에, 이게 되네? 나 진짜 대단한 작가인가 봐!"
"어디 보지."

도하가 신분증을 뺏어 들었다. 손가락으로 신분증의 올록볼록한 표면을 만져보던 그의 눈에 경탄이 서렸다.

"놀랍군. 질감부터 홀로그램까지 완벽한 진품이다. 이제 가짜 신분도 생겼으니 당장 내 명의로 계좌를 개설하고 자금을 융통해 볼까. K-스마트의 주식을……."
"잠깐만요, 사장님!"

세아가 도하의 앞을 가로막았다.

"신분증이 생겼다고 끝이 아니에요. 자금을 융통하려면 스마트폰도 개통해야 하고, 통장도 만들어야 하는데…… 혹시 '공인인증서'나 '아이디 로그인' 같은 거 해봤어요?"
"그게 뭔지 내가 왜 알지? 그런 번거로운 보안 절차는 전부 IT 지원 팀이나 정 실장이 처리했다."
"거 봐! 님 지금 핸드폰도 없어서 본인 인증도 못 하잖아요!"

도하의 오만한 안색이 순간 굳어졌다. 소설 속에서는 터치 한 번으로 조 단위의 전 자금을 움직이던 대기업 총수였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본인 명의의 스마트폰'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금융 문맹이나 다름없었다.

"본인 인증? 그 고작 기계 나부랭이가 내 신원을 증명해 주지 못한다는 건가?"
"네, 못 해요! 현실의 대한민국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고요!"

세아는 한숨을 쉬며 도하의 손목을 잡았다.

"따라와요. 일단 제 명의로 빌려 쓰는 것도 생각했는데... 에라, 모르겠다. 진우 씨 신분증이 완벽해 보이니까 일단 진우 씨 명의로 바로 도전해 봐요! 가서 '강진우'로서 첫발을 내딛는 겁니다."

회색 추리닝 차림에 빳빳한 가짜 신분증을 쥔 대기업 사장님이, 마침내 진짜 현실의 쓴맛을 보기 위해 대문을 나섰다. 세아의 뒤를 따르는 도하의 걸음걸이는 여전히 런웨이를 걷듯 당당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난생처음 겪는 현실의 복잡함에 대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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