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는 휴재 중입니다만?

4화: 작가님, 마감은 지키셔야죠
"악! 미소 씨다!"
세아는 비명을 지르며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 뜬 시계는 정확히 밤 10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감 데드라인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20분. 도하와의 기상천외한 조우와 라면 소동으로 정신을 빼놓은 대가는 잔혹했다.
도하는 귀를 찌르는 진동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세아는 그의 눈치를 볼 겨를도 없이 덜덜 떠는 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어어, 미소 씨! 하하, 날씨가 참 좋죠?"
- "작가님. 지금 남양주시 옥탑방 날씨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 아닌 거 아시죠? 20분 남았습니다. 원고 어디 있어요? 설마 아직도 한 자도 안 쓰신 건 아니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미소 씨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 세아는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게…… 진짜 말도 안 되는 역대급 대형 사고가 터져서요! 제 남주인공이, 그러니까 강도하 사장이 제 방 바닥으로 툭……."
- "작가님!!!"
미소 씨의 날카로운 포효가 방 안을 울렸다. 옆에 서 있던 도하가 깜짝 놀라 귀를 웅크릴 정도였다.
- "현실 도피도 적당히 하세요! 도하 사장님이 거길 왜 갑니까? 거긴 옥탑방이고 그분은 자산 가치만 조 단위인 대기업 사장님인데!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시면 저 진짜 지금 택시 타고 거기로 쳐들어갑니다!"
"아니, 진짜라니까요? 제 눈앞에서 지금 라면 국물에 밥까지 말아 먹고 서 있어요!" - "15분 남았습니다. 안 오면 휴재 공지 띄우고 작가님 쪽지함에 독자님들 원망의 편지 1만 개 넣어드릴 줄 아세요."
뚝. 전하는 무자비하게 끊겼다. 세아는 영혼이 가출한 표정으로 멍하니 액정을 바라보았다. 독자들의 원망 섞인 댓글과 별점 테러가 눈앞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때, 제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도하가 팔짱을 낀 채 세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그 무례한 목소리는 누구지? 그리고 내 자산 가치가 조 단위라는 건 또 무슨 소리고."
"아, 몰라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나 진짜 파산이야, 파산!"
세아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모니터 앞으로 다이빙하듯 엎어졌다. 어떻게든 20분 안에 이 황당한 사태를 소설 속에서 수습해야 했다. 하지만 깨진 한글 프로그램 화면에는 여전히 [강도하 / 과로로 쓰러짐]이라는 문장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비켜봐."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도하가 세아의 어깨를 밀치고 의자 옆으로 들이닥쳤다. 그가 큰 손으로 마우스를 쥐고 화면의 텍스트들을 빠르게 훑어내렸다.
"도, 도하 씨? 뭐 하는 거예요?"
"당신이 능력이 부족해서 내 인생의 궤적을 꼬아놓았다면, 내가 직접 바로잡겠다는 거다. 난 비즈니스든 인생이든 실패작을 남겨두는 꼴은 못 보니까."
도하는 타자기를 치듯 정갈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비록 이 세계의 시스템은 낯설었지만, 수많은 기획안과 계약서를 검토해 온 'K-스마트' 사장 특유의 명석한 두뇌와 기획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강도하는 극심한 과로로 쓰러졌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쇼크였을 뿐이다. 그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10분 만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병원으로 이송되는 대신,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와 완벽하게 리스크를 관리했다. 여주인공 채아린과의 불필요한 스킨십이나 감정 소모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완벽하고 냉철한 사장이었다.]
"야! 이렇게 쓰면 로맨스 소설이 아니라 그냥 기업 다큐멘터리가 되잖아요! 독자들이 원하는 건 이게 아니라고!"
세아가 경악하며 도하의 손을 막으려 버둥거렸다. 하지만 도하는 세아의 손목을 가볍게 제압하며 눈을 부릅떴다.
"그럼 내 의사와 상관없이 모르는 여자와 강제로 입을 맞추라는 건가? 난 절대 싫다. 타협은 없어."
"이건 허구라니까요?!"
"나한테는 실제야!"
도하의 외침에 방 안이 일순간 고요해졌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소설 속 캐릭터가 아닌,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고 싶어 하는 한 인간의 치열함이 담겨 있었다. 세아는 그의 단호함에 압도되어 숨을 죽였다.
시계 바늘은 어느덧 10시 55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알았어요. 타협해요, 타협."
세아가 한 발 물러서며 키보드로 손을 뻗었다.
"도하 씨 의견 반영해서 키스신은 빼 줄게요. 대신, 도하 사장이 쓰러진 후 비밀리에 휴가를 떠난 거로 처리해요. 그래야 도하 씨가 지금 이 방에 존재하는 개연성이 생기니까."
"비밀 휴가라…… 그건 비즈니스적으로 나쁘지 않은 핑계군."
도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세아는 미친 듯한 속도로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도하가 옆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소설 속 '강도하 사장'은 과로로 쓰러진 후 당분간 세간의 눈을 피해 잠적하는 것으로 스토리가 수정되었다.
다만 세아는 마지막 문장을 쓰기 전 잠깐 손을 멈췄다. 방금 겪은 일로 보아, 머릿속 구상만으로는 현실이 흔들릴 뿐이었다. 독자들이 실제로 읽을 수 있게 등록된 문장만이 도하의 상태를 단단히 붙잡는 닻이 되는 듯했다.
10시 59분. 세아는 가까스로 '등록' 버튼을 눌렀다.
"완료……! 살았다……!"
세아는 책상 위로 완전히 뻗어버렸다.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세아는 옆에서 여전히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거대한 존재를 다시금 자각했다.
원고는 보냈지만, 소설 속에서 잠적 처리된 '진짜 강도하'는 여전히 제 옥탑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사태는 해결된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