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는 휴재 중입니다만?

27화: 타이핑의 폭풍 속에서 피어나는 눈빛
"자, 팩스턴의 보안 취약점 알고리즘 들어갑니다! 윤 작가, 받아 적어."
도하의 지시는 거침없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생소한 IT 전문 용어들과 보안 프로토콜의 취약점들은 일반적인 로맨스 작가인 세아의 뇌 용량을 초과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눈을 빛내던 미소 씨가 먼저 반응했다.
"와, 대박! 작가님, 도하 사장님이 불러주는 대로 그냥 치세요! 이거 그대로 소설에 들어가면 독자님들이 베스트 댓글로 '작가 최소 천재 개발자나 해커 출신이다' 하면서 난리 날 거예요. 장르적 전문성 대폭발입니다!"
"아, 알았어요! 독자님들, 기계알못인 제 손가락을 용서하세요!"
세아는 비명을 지르며 도하의 입에서 떨어지는 단어들을 모니터에 때려 박았다.
[강도하 사장이 제안한 새로운 보안 프로토콜은 팩스턴이 자랑하던 방화벽의 치명적인 허점, 즉 '루프홀 04'의 존재를 드러내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구체적인 공격 방식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검증 가능한 결함의 흔적만으로도 글로벌 시장에서 팩스턴의 신뢰도는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 자명했다.]
도하는 세아가 타이핑하는 화면을 매서운 눈으로 모니터링하며 중간중간 매끄럽지 못한 비즈니스 서사를 직접 교정해 주었다. 좁은 보조 의자에 둘이 바짝 붙어 앉은 탓에, 도하가 자판으로 손을 뻗을 때마다 그의 단단한 팔뚝이 세아의 어깨에 스쳤다.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도하의 체온에 세아는 자꾸만 오타를 냈다.
"윤 작가, 집중해. 오타가 너무 많군. '프로토콜'을 '프로필'로 쓰면 내 스마트한 이미지가 훼손된다."
"아니, 옆에서 너무 바짝 붙어서 사장님 아우라를 풍기니까 떨려서 그렇잖아요!"
세아가 팩 돌아서며 투덜거리자, 도하의 시선이 세아의 발그레해진 얼굴에 머물렀다. 도하는 치던 손을 멈추고, 세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장난기와 깊은 다정함에 세아는 숨을 흡 들이쉬었다.
"어머어머, 나 여기 계속 앉아있어도 되는 거 맞지? 둘이 아주 눈으로 멜로 영화를 찍으시네."
침대에 누워 태블릿으로 독자 반응을 체크하던 미소 씨가 큭큭거리며 찬물을 끼얹었다. 세아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노려보았고, 도하 역시 슬그머니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를 좀 더 타 오지. 맥심 모카골드의 당분이 뇌 회전에 도움이 되는 것 같군."
"아, 제 것도 한 잔요, 사장님!"
미소 씨가 넉살 좋게 잔을 청하자 도하는 익숙하게 옥탑방 싱크대로 향했다. 억만장자 사장님이 낡은 양은 포트에 물을 끓여 익숙하게 맥심 스틱을 뜯는 뒷모습을 보며, 세아는 묘한 행복감을 느꼈다.
아무리 데이비드 블랙이 현실을 위협하고 판을 흔들어도, 이 좁은 옥탑방에서 제 편이 되어 함께 싸워주는 남주인공이 있다면 그 어떤 마감도, 그 어떤 위기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밤 10시 50분. 마감 데드라인을 고작 10분 남겨두고 세아의 손가락이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다.
"등록…… 완료!!!"
세아가 만세를 부르자, 미소 씨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동시에 옥탑방의 전등이 잠시 파르르 떨리며, 모니터 너머로 보이지 않는 원작의 서사가 다시금 현실의 강남 테헤란로를 향해 파동을 치며 뻗어나갔다. 팩스턴의 몰락을 예고하는 신호탄이 마침내 발사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