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는 휴재 중입니다만?

24화: 승리의 여운, 그리고 짜릿한 도주
탕! 탕! 탕!
마지막 의사봉 소리의 잔향이 대회의실의 높은 천장을 때리고 사그라들었다. 반박할 수 없는 데이터가 대형 스크린에 박히자, 데이비드 블랙에게 매수되었던 이사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고개를 숙였다.
"이, 이건 사기야! 법적 대응을 할 테다!"
데이비드가 핏대를 세우며 악을 썼지만, 도하는 비웃듯 의사봉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법적 대응이라. 대한민국 행정망과 K-스마트의 완벽한 금융 보안 시스템이 인증한 합법적 의결권이다. 데이비드, 네가 주무르던 가짜 자본의 한계가 딱 여기까지인 거지."
도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세아의 손목을 꽉 쥐었다.
"가자, 윤 작가. 패배자의 분풀이를 받아줄 만큼 내 시간은 저렴하지 않으니까."
"어? 어어……!"
세아는 도하의 강한 손길에 이끌려 주총장을 빠져나왔다. 등 뒤로 데이비드가 수행원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쫓아오라는 명령을 내리는 소리가 아스라히 들렸다. 경호원들이 복도 끝에서 가로막으려 하자, 도하는 세아를 제 품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초고속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연타했다.
비상용 엘리베이터의 문이 스르륵 닫히는 순간, 세아는 문틈 사이로 분노에 가득 차 일그러진 데이비드의 얼굴을 보았다.
"하아…… 하아…… 나 진짜 심장 터지는 줄 알았어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 세아는 노트북 가방을 꼬치 가방처럼 껴안은 채 주저앉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도하는 그런 세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작은 손을 감싸 쥐었다.
"최고의 연출이었어, 윤 작가. 당신이 마지막에 쓴 '비밀 조건 충족'이라는 텍스트가 내 생체 데이터와 완벽하게 반응하더군. 과연 내 창조주다워."
도하의 칭찬에 세아의 뺨이 부끄러운 듯 붉어졌다. 주총은 막아냈지만, 아직 완벽하게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자금이 동기화되어 의결권은 행사했지만, 당장 그 돈을 현실의 현금으로 인출하려면 소설 속에서 도하가 '완벽한 해피엔딩'을 맞이해 차원의 벽을 완전히 허물어야 했기 때문이다. 즉, 여전히 현실의 그들은 무일푼 상태에 가까웠다.
딩동-. 지하 3층 주차장에 문이 열렸다.
"진우 씨, 저기 블랙의 수행원들이 내려와요! 도망쳐야 해요!"
주차장 저편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무전기를 들고 이쪽을 향해 뛰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도하는 세아의 손을 잡고 주차장 구석으로 미친 듯이 달렸다.
"이봐, 윤 작가! 이 상황을 타개할 탈것의 설정은 원고에 없었나?"
"거기까지 쓸 분량이 부족했다고요! 일단 뛰어욧!"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절체절명의 순간, 주차장 출구 쪽에서 요란한 엔진 소리와 함께 노란색 소형 레이 카 한 대가 스키드 마크를 지독하게 남기며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치익-! 쿵!
조수석 문이 활짝 열리며, 낯익은 단발머리의 여성이 선글라스를 치켜올렸다.
"작가님!!! 얼른 타세요! 본사 옥상에서 뛰어내리려다 잡으러 왔으니까!!!"
"미, 미소 씨?!"
세아의 담당 편집자, 미소 씨였다. 그녀는 세아가 주총장으로 향하기 전 남긴 다급한 메시지와 플랫폼 관리자 로그에 찍힌 접속 위치를 보고 곧장 차를 몰고 온 모양이었다. 원작의 서사가 현실을 살짝 밀어준 것은 맞겠지만, 그 마지막 빈칸을 채운 건 미소 씨의 집요한 마감 본능이었다.
"닥치고 타요, 도하 사장님도 얼른!!!"
도하는 이 조그맣고 조악한 경차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뒤쫓아오는 사내들을 보며 재빨리 세아를 조수석에 밀어 넣고 자신은 좁은 뒷좌석에 긴 다리를 구겨 넣었다.
방방방방-!
미소 씨는 문이 닫히기도 전에 엑셀을 밟았고, 노란색 레이는 검은 양복들을 비웃듯 강남 테헤란로의 화려한 햇살 속으로 튀어나갔다. 백미러 너머로 멀어지는 빌딩을 보며 세아는 도하와 시선을 마주쳤다. 좁은 차 안, 도하의 무릎이 세아의 등받이에 닿아 올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지독하게 아슬아슬하고, 지독하게 알콩달콩한 현실 세계의 진짜 로맨스가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