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는 휴재 중입니다만?

20화: 주주총회 d-day, 작가의 치트키
"오전 6시 반……."
세아는 핼쑥하게 뜬 눈으로 벽시계를 확인했다. 데이비드 블랙의 섬뜩한 경고 전화가 걸려온 이후로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노트북 옆에는 밤새 비워낸 커피 캔들이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그에 반해 도하는 벌써 단정한 차림으로 소파 대용 침대 끝에 앉아 낡은 태블릿 PC 화면을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었다. 비록 옷은 시장통에서 산 싸구려 셔츠였지만, 허리를 꼿꼿이 편 그의 모습에선 여전히 억만장자 CEO의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진우 씨, 정말 괜찮겠어요? 지금 당신은 대한민국 행정망에서 고작 '강진우'라는 가짜 신분일 뿐이잖아요. 'K-스마트 코리아'의 주총장에 들어가 봤자 보안요원들한테 가로막혀서 문전박대당할 게 뻔하다고요."
세아의 걱정스러운 말에 도하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두려움 대신 사업가 특유의 냉철한 승부욕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창조주인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거다, 윤 작가."
"내 도움?"
"데이비드 블랙이 이 세계의 자본을 움직여 이사회를 포섭했다면, 그것 역시 당신의 소설 속 '설정'이 현실에 동기화되었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역으로 당신이 내일 자 지면의 주총 기록을 미리 수정해 둔다면 어떨까?"
세아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 소설의 내용을 미리 써서 강제로 미래를 바꾸는 치트키?!"
"정확해. 웹소설의 전개 권한은 온전히 작가인 당신에게 있다. 비록 데이비드가 현실의 자금력을 휘두르고 있더라도, 원작의 거대한 줄기 자체를 거스를 순 없어."
"하지만 그냥 저장만 해서는 부족하겠죠. 등록되고, 독자들이 그걸 받아들여야 현실도 움직였어요."
"그래. 예약 등록으로 시간의 문턱을 맞추고, 독자의 반응으로 개연성을 보강한다. 그 정도면 데이비드가 만든 현실의 거짓말과 맞붙을 수 있어."
세아는 서둘러 노트북 앞으로 가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자신이 쓰는 문장 하나하나가 잠시 후 강남 테헤란로에서 벌어질 실제 사건의 타임라인을 결정짓게 된다.
[K-스마트 코리아의 긴급 주주총회 당일. 데이비드 블랙의 계략으로 강도하 사장의 해임안이 가결되기 직전,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강도하 사장이 사전에 구축해 둔 비밀 법인과 우호 지분 세력이 일제히 움직여 의결권을 행사한 것이다. 그리고 주총장 문이 열리며, 모두가 잠적했다고 믿었던 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아의 손가락이 미친 듯이 움직였다.
"도하 씨, 아니 진우 씨! 소설 속에서 도하 사장이 늘 소유하고 있던 K-스마트 지분이 정확히 몇 퍼센트였죠?"
"우호 지분을 포함해 정확히 41.2퍼센트다. 과반은 아니지만, 합병과 대표 해임을 밀어붙이는 특별 안건을 막기에는 충분한 저지 지분이지. 데이비드가 이사회를 포섭해 봤자, 내가 가진 지분과 내 시그니처 보안 코드가 담긴 마스터 원본을 무력화할 수는 없어."
"좋아요. 그대로 쓸게요!"
세아는 '등록' 버튼을 누르기 직전, 문장의 마지막 줄에 한 구절을 더 추가했다.
[그는 더 이상 소설 속의 외로운 독고다이가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그의 모든 서사를 알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조력자가 함께 서 있었다.]
딸칵-.
원고가 예약 등록되는 소리와 함께, 창밖으로 태양이 번쩍 떠오르며 찬란한 아침 햇살이 옥탑방 안을 가득 비추었다.
도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세아에게 다가왔다. 그는 세아의 헝클어진 머리를 다정하게 정돈해 주며,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뜨거운 손길이었다.
"준비는 끝났다. 가자, 윤 작가. 내 완벽한 인생을 되찾으러."
삼류 작가의 옥탑방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은 적진의 심장부인 강남을 향해 당당히 첫걸음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