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는 휴재 중입니다만?

19화: 소나기가 그친 뒤의 주파수
코끝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도하의 단단한 손가락이 세아의 턱끝을 부드럽게 받쳐 올렸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세아의 쇄골 위로 톡,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방 안은 고요했다. 세아는 숨을 쉬는 법조차 잊은 채 도하의 깊은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마침내 세아의 입술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으려던 바로 그 찰나.
지리리리링-! 징-! 지잉-!
방 한구석, 좌식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도하의 새 스마트폰이 찢어지는 듯한 기계음을 내며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벨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무전기가 혼선을 일으킬 때 나는 듯한 날카로운 스파크 음이었다.
"앗……!"
깜짝 놀란 세아가 펄쩍 뛰며 도하의 품에서 물러섰다. 도하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액정을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발신 번호도, 이름도 뜨지 않은 채 기괴한 보라색 디지털 노이즈만 가득 차 있었다.
"이게 무슨……."
도하가 다가가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스피커폰을 통해 지직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낯선 남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 "……찾았다. K-스마트의 얼음 황태자님."
서늘하고도 비열함이 묻어나는 목소리. 세아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소설을 쓰며 머릿속으로 수없이 시뮬레이션했던, <퍼펙트 라이프>의 최종 보스이자 팩스턴의 아시아 지부 총괄 사장 '데이비드 블랙'의 톤과 소름 끼치도록 똑같았기 때문이다.
"누구냐."
도하의 목소리가 단숨에 가라앉았다. 조금 전까지 세아를 바라보던 다정한 진우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냉혹한 포식자의 눈빛이 되살아났다.
- "기억력이 둔해졌군, 강도하 사장. 아니, 이 세계에서는 '강진우'라고 불리던가? 옥탑방 구석에서 삼류 작가랑 소꿉장난을 하더니 뇌 기능까지 서민화된 모양이지?"
"데이비드…… 블랙?"
세아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듯 이름을 뱉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낮고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 "오, 창조주 작가님도 같이 계시는군. 영광입니다. 당신의 그 얄팍한 손가락 덕분에 내가 이 세계에서 합법적으로 조 단위의 자본을 주무르는 거물로 태어났거든. 하지만 말이야…… 소설의 결말은 내 취향대로 좀 바꿔야겠어."
"무슨 짓을 꾸미는 거지?"
도하가 스마트폰을 쥔 손에 핏대를 세우며 물었다.
- "당신이 잠적해 있는 동안, 현실의 'K-스마트 코리아' 이사회를 포섭했다. 내일 오전 9시, K-스마트 코리아의 긴급 주주총회가 열려. 당신의 대표이사 해임안과 팩스턴으로의 기술 매각 안건이 상정될 예정이지. 원작의 주인이 없는 껍데기 회사는 참 먹기 쉽더군."
도하의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소설 속 가상의 지분 전쟁이, 진짜 현실의 강남 테헤란로 한복판에서 실시간으로 실행되고 있다는 경고였다.
- "강도하. 내일 주총장으로 와라. 신분증 달랑 한 장 들고 와서 당신이 진짜 강도하라고 울부짖어 봐.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 네 놈의 완벽했던 인생이 무너지는 걸 현실에서 똑똑히 보여주지."
뚝.
소음과 함께 연결이 끊겼고, 스마트폰 화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대기 화면으로 돌아왔다.
방 안에는 거친 소나기 소리 대신, 두 사람의 무거운 숨소리만 맴돌았다. 세아는 다리가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기가 재미를 위해 만들었던 악당이, 진짜 현실에서 도하의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미안해요……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그런 악당을 만들어서……."
세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숙이자, 셔츠를 대충 걸쳐 입은 도하가 세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가 세아의 떨리는 어깨를 단단하게 감싸 안았다.
"약해지지 마, 윤 작가. 적이 움직였다는 건, 역으로 공략할 타이밍이 왔다는 뜻이니까. 내일 오전 9시, 강남으로 간다. 내 회사를 고작 소설 속 종이 인형 따위에게 넘겨줄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도하의 단호하고 오만한 선언이 옥탑방의 어둠을 갈랐다. 두 사람의 알콩달콩했던 평화는 끝났다. 이제 현실 세계의 명운을 건 진짜 '지분 전쟁'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