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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는 휴재 중입니다만?2화

로맨스는 휴재 중입니다만?

로맨스는 휴재 중입니다만?

2화: 내 완벽한 피조물은 하자가 많다

"진정하자, 윤세아. 진정하는 거야. 후, 하, 후, 하……."

세아는 베개를 품에 꼭 안은 채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광경이 제발 이틀 밤을 새운 막장 작가의 달콤한 백일몽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은 세아의 소박한 바람을 가차 없이 짓밟았다.

"이 조잡한 플라스틱 용기는 대체 뭐지? 냄새가 끔찍하군. 그리고 저 조악한 종이 쪼가리들은……."

강도하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컵라면 용기와 벽에 붙은 로맨스 애니메이션 포스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찌푸려진 미간마저 한 폭의 명화 같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하나가 세아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조잡? 조악? 야, 너 말 다 했냐? 그건 내 소중한 일용할 양식과 영혼의 동반자들이거든?!"
"나? 지금 나한테 반말을 한 건가?"

도하가 고개를 휙 돌려 세아를 내려다보았다. 187센티미터의 압도적인 피지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세아는 순간 주춤했다. 소설 속에서 분명 '차갑고 오만한 얼음 황태자 같은 눈빛'이라고 묘사하긴 했는데, 그걸 현실에서 정면으로 마주하니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님아. 여기는 님 동네가 아니라고요. 님이 다스리는 'K-스마트'는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겠지만, 여기는 그냥 평범한 옥탑방이란 말입니다."
"장난은 그만두지. 아까부터 자꾸 날 다 안다는 듯이 지껄이는데, 내 인내심도 한계가 있어. 당장 내 비서에게 연락할 수단을 가져와."

도하가 성큼 다가와 세아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낚아채려 했다. 세아는 깜짝 놀라 몸을 돌려 스마트폰을 사수했다.

"안 된다니까요! 전화해 봤자 없는 번호라고 나온다고요! 정 실장님 번호 뒷자리 0418 맞죠? 그거 내가 내 생일로 대충 지어낸 번호란 말이에요!"
"……뭐?"

도하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그의 깊고 짙은 눈동자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자신의 개인 번호도 아닌, 오직 심복인 정 실장과 자신만 아는 비밀 직통 번호였다. 그걸 이 정체불명의 여자가 너무나 당연하게 뱉어내고 있었다.

"당신…… 진짜 정체가 뭐야? 내 정보를 어디까지 캔 거지?"
"내가 캔 게 아니라 내가 만든 거라고요! 자, 이거 봐요!"

세아는 지지직거리는 모니터 앞으로 기어가 강제로 전원 버튼을 연타했다. 다행히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았는지, 화면이 몇 번 깜빡이더니 한글 프로그램의 백업 파일이 강제로 복구되어 나타났다. 세아는 마우스 휠을 거칠게 굴려 '인물 설정 파일'을 열었다.

[이름: 강도하 (28세)
직업: IT 대기업 'K-스마트' 대표이사 사장.
외모: 짙은 눈썹, 날카로운 턱선, 왼쪽 눈 밑에 미인점. 네이비색 수트가 문신 수준으로 잘 어울림.
성격: 지독한 워커홀릭. 타인에게 곁을 주지 않는 냉혈한이지만 내 여자에게는…….]

도하는 홀린 듯 화면으로 다가왔다. 하얀 바탕 위에 검은 글씨로 정갈하게 적힌 문장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삶 그 자체였다. 도하는 떨리는 손을 들어 화면에 적힌 글자들을 쓸어내렸다.

"이게…… 뭐야?"
"도하 씨가 믿든 안 믿든, 당신은 내 손가락 끝에서 태어난 웹소설 <퍼펙트 라이프>의 남주인공이에요. 방금 전까지 내가 마감을 하다가 당신을 과로로 쓰러뜨리는 장면을 썼는데, 모니터가 터지면서 당신이 여기로 툭 떨어진 거라고요!"

세아의 절규에 가까운 설명에도 도하는 굳건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자신은 살아 숨 쉬고 있고, 심장이 뛰고 있으며, 어릴 적 기억부터 어제 먹은 저녁 식사의 메뉴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허구의 존재라면, 내 이 생생한 기억들은 다 뭐란 말이지? 내가 열두 살 때 승마를 배우다 떨어져서 부러졌던 오른쪽 손목의 통증도, 열여덟 살 때 아버지를 잃었던 그 슬픔도…… 전부 다 가짜라는 건가?!"

도하의 목소리가 격앙되어 떨렸다. 세아는 그 순간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파왔다. 독자들에게 눈물과 감동을 주기 위해, 그리고 남주인공의 사연 있는 처연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밤을 새우며 써 내려갔던 비극적인 과거 서사들이었다.

"그건…… 가짜가 아니라, 내가 설정한 스토리예요. 그렇게 아파야 도하 씨가 더 매력적인 캐릭터가 되니까……."
"매력?"

도하가 허탈한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고작 당신의 그 '매력'이라는 가벼운 단어 하나 때문에, 내가 평생을 어떤 지옥 속에서 버텨왔는지 알아? 불면증에 시달리며 약을 삼키고, 배신당하지 않기 위해 매일 밤을 긴장 속에서 살았어. 그게 다…… 고작 소설의 재미를 위해서였다고?"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도하의 눈빛에 서린 깊은 원망과 상처는 너무나도 진짜 같아서, 세아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자기가 만든 피조물에게 받는 원망이라니, 이 무슨 해괴하고도 미안한 상황이란 말인가.

"미안해요…… 그렇게 생생하게 살아 움직일 줄은 몰랐어요……."

세아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하자마자, 방금까지 변명처럼 붙들고 있던 단어들이 전부 초라해졌다. 설정, 서사, 매력. 원고 안에서는 편리했던 말들이 눈앞의 한 사람에게는 상처의 이름이었다. 세아는 처음으로 자신이 쓴 문장이 누군가의 하루와 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똑바로 마주했다.

도하는 감정을 추스르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보았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낡은 빌라촌의 불빛들. 자신이 살던 화려한 테헤란로의 야경과는 180도 다른, 낯설고 이질적인 세계의 풍경이었다.

구우우우웅-.

그때, 침묵을 깨고 굉장히 크고 웅장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세아의 배꼽시계가 아니었다. 목소리 톤만큼이나 저음으로 울린 그 소리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완벽남 강도하 사장님의 배였다.

"……?"
"……."

도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소설 속에서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 없는 완벽한 남주인공이, 현실 세계에 뚝 떨어지자마자 배고픔이라는 극히 인간적인 생리 현상에 굴복한 것이다.

"어…… 도하 씨. 소설 속에서 오늘 하루 종일 기획안 보느라 한 끼도 못 먹었다고 쓰긴 했는데…… 그게 현실 동기화가 됐나 보네요?"

세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도하는 애써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기분 탓이다. 난 원래 이딴 저질적인 소리를……."

꼬르르르륵-!

두 번째 소리는 첫 번째보다 훨씬 길고 우렁찼다. 도하는 결국 세아의 낡은 싱크대 벽을 짚으며 이마를 댔다. 완벽했던 그의 인생 통틀어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이 분명했다.

세아는 그 모습이 어쩐지 조금 귀엽게 느껴져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제 손으로 거둬 먹여야 할 피조물이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이상형이 아니던가.

"기다려 봐요. 내 완벽한 사장님. 현실 세계의 매운맛 가득한 꿀맛을 보여줄 테니까."

세아는 싱크대 하부장을 열어 소중하게 아껴둔 마지막 라면 한 봉지를 꺼내 들었다. 자기가 만든 완벽한 피조물의 하자를 채워주는 것, 그것이 창조주로서의 첫 번째 임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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