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는 휴재 중입니다만?

시놉시스
외모, 재력, 지성까지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승승장구하던 젊은 인텔리 사장, 강도하. 그는 사실 인기 웹소설 작가 윤세아가 창조해 낸 소설 속 주인공이었다! 마감 독촉에 시달리던 어느 날 밤, 소설 속 세계의 모니터를 찢고 현실로 튀어나온 완벽한 이상형과의 기묘하고도 알콩달콩한 동거가 시작된다. "당신이 내 창조주라고? 책임져, 내 완벽했던 인생." 현실에 강림한 남주인공과 초보 작가의 차원 초월 로맨틱 코미디!
1화: 모니터를 찢고 나온 남자
"작가님, 오늘까지 연참 안 들어오면 저 진짜 본사 옥상에서 뛰어내릴 겁니다. 아시죠? 저 저번 주에 결혼한 새댁인 거? 제 신혼을 지켜주세요!"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담당 편집자, 미소 씨의 절규는 처절했다. 윤세아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실제로 보이지도 않을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아이고, 미소 씨! 죄송해요, 진짜 죄송해요! 지금 남주인공 감정선이 조금 꼬여서 그래요. 강도하 이 나쁜 자식이 제 말을 안 듣고 자꾸 제멋대로 군다니까요?"
"도하 사장님이 왜요! 도하 사장님은 잘못 없어요, 죄는 작가님 손가락이 지었지! 아무튼 밤 11시까지예요. 안 오면 저 진짜 독자님들한테 좌표 찍고 작가님 집 주소 오픈할 줄 아세요!"
툭. 사정없이 끊긴 전화기를 보며 세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현대 로맨스 웹소설, <퍼펙트 라이프>. 그 안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IT 기업 'K-스마트'를 이끄는 젊고 냉철한 사장 '강도하'는 바로 세아의 손가락 끝에서 탄생한 피조물이었다. 187센티미터의 훤칠한 키, 조각 같은 턱선, 그리고 냉소적이면서도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한 완벽한 남자.
하지만 창조주인 세아에게 도하는 요즘 들어 가장 큰 골칫덩어리였다.
"아니, 여기서 여주인공이랑 키스를 해야 할 거 아냐! 왜 갑자기 회사 기획안을 검토하고 앉아있는데, 이 워커홀릭 놈아!"
세아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모니터 화면을 노려보았다. 한글 프로그램 위의 커서는 마치 세아를 놀리듯 깜빡 깜빡 불을 밝히고 있었다. 밤을 새운 지 이틀째, 눈앞이 침침하고 카페인 부작용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새벽 2시. 사위가 고요해진 옥탑방에는 오직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세아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파격적인 전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남주인공 강도하가 회사 기획실에서 밤을 새우다 과로로 쓰러지는, 일명 '독자 보상용 병간호 시츄에이션'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강도하의 눈앞이 흐려졌다. 격무로 지친 그의 몸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해가는 순간, 그는 무언가 강력한 인력에 이끌려 차가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그리고…… 어, 으으, 졸려……."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세아가 책상 위로 엎어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잉-! 징-!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모니터 화면이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파란색 스파크가 지직거리며 본체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깜짝 놀란 세아가 번쩍 눈을 떴을 때, 방 안의 모든 전등이 암전되며 기괴한 빛의 소용돌이가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왔다.
쿵-!!!!
"악!"
책상 앞 바닥으로 거대한 무언가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세아는 비명을 지르며 침대 위로 풀쩍 뛰어올랐다.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와중에, 옥탑방의 낡은 형광등이 지지직거리며 다시 켜졌다.
"콜록, 콜록……! 이게 무슨…… 대형 참사야? 모니터가 터진 건가?"
세아는 매운 연기에 눈물을 흘리며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세아의 좁아터진 옥탑방 바닥에, 도저히 이 동네 이 골목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이질적인 덩치가 쓰러져 있었다.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맞춘 게 분명해 보이는 짙은 네이비 수트, 은은하게 빛나는 최고급 맞춤 셔츠. 그리고 무엇보다…… 서양 조각상도 울고 갈 만큼 완벽한 콧날과 날카로운 턱선을 가진 남자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어……? 누구세요? 강도?!"
세아는 침대 시트를 꼭 쥔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기라도 될 만한 걸 찾으려다 손에 잡힌 건 먼지털이뿐이었다.
"콜록, 콜록……! 이게 무슨……."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윽고 천천히 눈을 뜬 남자의 깊고 짙은 눈동자가 허공을 헤매다, 침대 위에서 먼지털이를 창처럼 겨누고 있는 세아에게 고정되었다.
남자는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수트에 묻은 먼지를 불쾌한 듯 털어내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 널린 컵라면 용기, 벽에 붙은 만화 포스터, 그리고 삼류 작가의 누추한 옥탑방 풍경. 남자의 미간이 아름답게 찌푸려졌다.
"여기서…… 내가 왜 쓰러진 거지? 분명 기획실에 있었을 텐데. 당신은 누구지? K-스마트의 라이벌 회사에서 보낸 스파이인가? 내 비서는 어디 가고 이런…… 조잡한 곳에 내가 있는 거지?"
목소리마저 완벽한 저음의 동굴 목소리. 하지만 세아의 귀에는 그저 미친 침입자의 헛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스, 스파이 같은 소리 하네! 당신 뭐야! 어디로 들어왔어? 당장 안 나가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112! 119! 다 부를 거라고!"
세아는 더덜더덜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찾아 쥐었다. 당장이라도 112를 누르려는데, 남자가 성큼 다가와 세아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앗! 이거 놔!"
얼음처럼 차가우면서도 악력이 대단했다. 손목을 타고 전해지는 생생한 체온과 단단한 촉감에 세아는 소름이 돋았다. 꿈이 아니다. 진짜 살아있는 장정이다. 그런데 남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 세아의 뇌리가 번쩍했다.
'잠깐만. 이 얼굴…… 어디서 많이 봤는데?'
매일 밤 마감을 하며 상상하고, 텍스트로 묘사하던 완벽한 이목구비. 왼쪽 눈 밑의 아주 작은 매력점. 널따란 어깨와 네이비 수트의 핏까지.
"설마…… 아니지? 내가 미친 거지? 밤을 새워서 환각을 보는 거야."
"뭐라는 건지 모르겠군. 이 손목시계도 이상해. 시간이 거꾸로 가고 있잖아."
남자가 불쾌한 듯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시계의 초침이 정말로 거꾸로 돌고 있었다. 세아는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침대에서 기어 나와 제 컴퓨터 모니터를 보았다. 한글 프로그램 화면은 아까 스파크가 튄 이후로 완전히 맛이 가 있었다.
하지만 화면 보호기처럼 글자 몇 개가 지직거리며 떠 있었다.
[강도하 / 28세 / K-스마트 사장 / 네이비 수트를 즐겨 입음 / 과로로 쓰러짐]
마치 시스템 창처럼 떠 있는 그 글자들과 눈앞의 남자를 번갈아 보던 세아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제 뺨을 세게 때렸다.
찰싹-!
"아야! ……꿈이 아니야?"
세아의 기이한 행동에 도하는 미간을 더 좁혔다.
"정신이 이상한 여자인가? 됐으니 전화를 빌려주지. 정 실장에게 연락해야겠어."
"정…… 실장? 정진우 실장 요?"
"당신이 내 비서 이름을 어떻게 알지?"
도하의 매서운 눈빛이 세아를 꿰뚫었다. 세아는 마침내 가슴이 쿵쾅거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정진우 실장은 세아가 지난주 급하게 지어낸 도하의 오른팔 캐릭터 이름이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당신, 진짜 강도하야? K-스마트 사장?"
"그래. 내가 강도하다. 이제 통성명이 끝났으면 여기가 어딘지 말해."
도하가 당연하다는 듯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제야 세아는 깨달았다. 이 남자는 현실 세계의 인간이 아니다. 소설 속 남주인공이 진짜로 현실에 튀어나온 것이다. 자기가 방금 쓴 '과로로 쓰러져 추락했다'는 문장 때문에!
"엄마야…… 나 진짜 미쳤나 봐. 소설을 너무 열심히 써서 미쳐버린 거야!"
세아는 머리를 감싸 쥐고 옥탑방 바닥에 주저앉았다. 현실을 부정하려는 작가와,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 화가 나기 시작한 소설 속 사장님. 두 사람의 황당하고도 위험한 동거의 서막이, 그렇게 시끄럽게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