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는 휴재 중입니다만?

15화: 0의 행방과 손끝의 온도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철문이 열리자, 안쪽에서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가 뿜어져 나왔다. 내부는 온통 은빛 금속 벽면으로 가득 찬, 사방 2미터 남짓한 소형 서버실 형태의 비밀 공간이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SF 영화에서나 볼 법한 세련된 콘솔 모니터가 홀로 푸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와…… 나 진짜 이런 거 소설에 묘사할 때 대충 '최첨단 특수 금고'라고 뭉뚱그려 썼는데, 내부가 이렇게 생겼었구나."
세아는 신기한 듯 입을 벌린 채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제 머릿속 얄팍한 상상력이 현실에서 이토록 정교한 기계 장치로 구현되어 있다는 사실이 매번 경이로웠다.
"내 지시대로 움직이는 개발 팀의 실력은 늘 일류였으니까."
도하는 익숙하게 콘솔 앞으로 다가갔다. 키보드 위의 투명한 패드에 그의 긴 손가락이 닿자, 타다닥 소리와 함께 복잡한 보안 코드가 입력되기 시작했다. 화면 위로 수없이 많은 영문법과 숫자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자금이 동기화되어 있다면, 이 임대망 계좌에 내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쟁여둔 무기명 채권과 해외 가상자산이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해."
도하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났다. 현실 세계에서 윤세아의 통장 잔고에 빌붙어 시장바닥 추리닝 신세로 지내던 설움(?)을 단번에 청산할 기회였다. 최종 엔터 키를 누르는 도하의 손끝에 팽팽한 긴장감이 실렸다.
지잉-.
화면이 한 차례 깜빡이더니, 마침내 최종 자산 보유 현황 창이 팝업되었다.
[TOTAL BALANCE]
[0]
"……?"
"어라? 0원?"
화면에 선명하게 찍힌 숫자 '0'의 행진을 보며 세아는 눈을 깜빡였다. 도하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오류인가? 그럴 리가 없다. 내 홍채와 지문을 인식했다면 이 독립망에 매칭된 자산 데이터가 불러와져야……."
"잠시만요, 진우 씨. 저기 밑에 조그맣게 적힌 빨간 글씨 좀 봐요."
세아가 화면 구석을 가리켰다. 아주 미세한 글씨로 원작의 시스템 메시지가 깜빡이고 있었다.
[※ 주의: 본 자산은 웹소설 <퍼펙트 라이프> 원작 서사가 잠금 상태에 묶여 있습니다. 남주인공이 '공식 복귀'하거나 '스토리 외적 자산 이동 조건'을 충족하기 전까지는 현실 세계로의 인출이 불가능합니다.]
"스토리 외적 자산 이동 조건? 그게 무슨 해괴한 소리지?"
도하가 황당하다는 듯 모니터를 주먹으로 쾅 쳤다. 세아는 턱을 괴고 소설 작가 특유의 뇌 회로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하…… 알겠다. 그러니까 이 금고 시스템 자체는 현실에 구현됐지만, 그 안의 '돈'은 아직 소설 속 자산이라 함부로 못 꺼낸다는 뜻이에요. 도하 씨가 지금 소설 안에서는 '비밀 휴가 중(잠적)' 상태잖아요? 그러니까 공식적으로 활동을 안 하니까 돈도 묶인 거죠."
"그럼 결국 지금 당장은 이 거대한 금고를 두고도 단돈 10원 한 푼 꺼낼 수 없다는 건가?"
"네. 결론은 여전히 무일푼 백수시라는 말씀!"
세아가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자, 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K-스마트를 호령하던 천재 CEO가 현실의 룰 앞에서는 철저히 무력해지는 순간이었다.
"허탈하군. 내 손으로 내 돈을 만지지도 못하다니."
"낙담하지 마요! 조건이 있다는 건, 내가 소설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나중에 꺼낼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요. 일단 다음 화에서 도하 씨가 '숨겨둔 비자금을 가상자산으로 환전해 일부 인출했다'는 독백이나 밑밥을 깔아볼게요."
세아는 실망한 도하의 축 처진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도하는 제 어깨에 닿은 세아의 작고 부드러운 손길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좁은 서버실의 푸른 모니터 빛을 받아, 자신을 위로해 주는 세아의 눈동자가 기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윤 작가."
"네?"
"당신은 참…… 대책 없이 긍정적이군. 자산이 0원이 나왔는데도 화를 내기는커녕 다음 스토리를 구상하다니."
"돈이야 또 벌면 되죠! 그리고 우리에겐 아직 어제 남은 삼겹살 정산금과 빳빳한 가짜 신분증이 있잖아요? 가요, 사장님. 옥탑방으로 돌아가서 다음 화 마감이나 합시다!"
세아가 환하게 웃으며 도하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차가운 금속 벽으로 둘러싸인 어두운 지하 공간이었지만, 세아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만큼은 지독하게 따뜻하고 생생했다. 도하는 제 손을 꼭 쥔 세아의 손가락을 가만히 쥐어짜며,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돈은 묶였을지언정, 현실 세계의 동거 생활은 생각보다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