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는 휴재 중입니다만?

14화: 강남 테헤란로의 이방인들
"와…… 사람 진짜 많다."
지하철 2호선 강남역 2번 출구를 빠져나온 세아는 숨이 확 막히는 기분이었다. 다닥다닥 붙어 있던 남양주의 조용한 옥탑방 동네와는 차원이 다른 인파였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유리 빌딩 숲과 그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정장 차림의 직장인들.
그 삭막한 도심 한복판에, 뜬금없는 차림의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세아는 평소 마감 때나 입는 헐렁한 맨투맨에 청바지 차림이었고, 도하는 다행히 회색 추리닝은 벗었지만 세아가 남동생의 옷장에서 간신히 발굴해 낸 사이즈가 살짝 작은 검은색 슬랙스에 흰 셔츠 차림이었다. 소매가 조금 짧아 손목시계가 훤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도하의 피지컬은 강남 한복판에서도 여지없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스쳐 지나가는 직장인들이 한 번씩은 꼭 뒤를 돌아볼 정도였다.
"저기예요, 진우 씨. 저 건물이 우리 소설 속…… 아니, 현실에 구현된 'K-스마트 코리아' 빌딩이에요."
세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수십 층 높이의 거대한 통유리 빌딩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빌딩 꼭대기에는 세아가 소설에서 묘사했던 푸른색 그라데이션의 'K-SMART'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실존하는 대기업의 이름이 아주 미세하게 비틀려 현실의 거리를 차지하고 있는 풍경은 볼 때마다 기괴했다.
"그렇군. 내가 지휘하던 본사 건물과 구조가 90퍼센트 이상 일치해."
도하는 차분하게 눈빛을 빛내며 빌딩 입구를 응시했다. 수많은 사원들이 출입증을 찍고 로비를 오가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건데요? 저 안은 출입증 없으면 파리 한 마리도 못 들어가게 보안이 철저할 텐데. 당신이 '나 강도하 사장인데 문 좀 열어달라'고 하면 당장 미친 사람 취급하면서 보안요원들이 끌고 나갈걸요?"
"내가 바보로 보이나, 윤 작가. 로비로 정면 돌파할 생각은 없다. 내 표적은 저 건물의 지하에 있는 개인 임대 금고 서버니까."
도하는 세아의 손목을 자연스럽게 잡고 빌딩 옆쪽의 지하 주차장 진입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길은 여전히 단단하고 거침없어서, 세아는 강남 한복판에서 홀로 중심을 잃지 않는 등대를 따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K-스마트를 설립할 때, 비상사태를 대비해 국가 행정망과 연동되지 않는 오프라인 사설 금고 시스템을 구축해 뒀다. 최고 경영자의 고유 생체 인식과 비밀 코드로만 열리는 독립망이지. 만약 원작의 서사가 이 세계를 침식해 내 존재를 구현했다면, 그 사설 금고의 인프라 역시 이 빌딩 지하 어딘가에 동기화되어 있을 확률이 높아."
"생체 인식이면…… 지문이나 홍채 같은 거요?"
"그래. 내 몸이 진짜로 여기 존재하니, 내 생체 정보 역시 완벽하게 일치하겠지."
두 사람은 주차장 관리인의 눈을 교묘하게 피해 지하 3층의 기계실 외곽 통로로 스며들었다. 어둡고 서늘한 콘크리트 벽을 따라 걷던 중, 도하가 어느 낡은 철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 옆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는 구형 디지털 키패드가 매립되어 있었다.
도하는 망설임 없이 키패드 화면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숨겨져 있던 파란색 레이저 센서가 활성화되며 도하의 홍채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체크 중…….]
기계음과 함께 붉은 빛이 도하의 깊은 눈동자를 스쳤다. 세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만약 여기서 오류가 난다면 무단침입으로 경보가 울릴 판이었다.
정적을 깨고, 기계가 나지막이 반응했다.
[신원 확인되었습니다. 강도하 대표이사님, 환영합니다.]
철컥-. 하고 묵직한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지하 통로에 울려 퍼졌다. 세아의 입이 떡 벌어졌다. 소설 속 가상의 마스터키가, 진짜 현실의 문을 열어젖힌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