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로맨스는 휴재 중입니다만?12화

로맨스는 휴재 중입니다만?

로맨스는 휴재 중입니다만?

12화: 눈물의 첫 가계부와 팩스턴의 그림자

"일어나요, 진우 씨! 해가 중천에 떴다고요!"

세아가 도하의 어깨를 사정없이 흔들어 깨웠다. 어제 삼겹살에 소주를 과하게 들이켠 대가로 세아의 목소리는 반쯤 갈라져 있었다. 반면, 바닥에서 눈을 뜬 도하는 여전히 흠잡을 데 없는 얼굴로 단정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창조주치고는 숙취에 너무 무력한 모습이군, 윤 작가. 그리고 지금은 고작 오전 7시 반이다."
"현실의 직장인들은 다 이 시간에 움직여요! 자, 이것 봐요."

세아가 침대 머리맡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수첩 표지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가계부'라고 적혀 있었다.

"어제 우리가 쓴 돈 정산서예요. 알뜰폰 가입비랑 선불 요금 3만 5천 원, 시장 장보기 2만 8천 원, 그리고 어제 삼겹살집에서 도하 씨가 무려 5인분을 해치우는 바람에 7만 2천 원…… 벌써 13만 5천 원이나 썼다고요! 내 고료의 10분의 1이 하루 만에 날아갔어요."

세아가 울상을 지으며 손가락을 꼽아대자, 도하는 기가 막힌다는 듯 턱을 괴었다.

"고작 13만 원 가량의 지출로 대기업 재무제표가 흔들리는 듯한 리액션을 취하는군. 정 그렇다면 내가 직접 돈을 벌어오지. 주식 시장의 단기 마진을 노리거나, 자산 운용사에 컨설팅을……."
"진우 씨, 신분증만 달랑 있는 신용불량자한테 자산 운용을 맡길 미친 회사는 현실 세계에 없어요. 그리고 자꾸 'K-스마트' 사장 마인드로 살면 여기선 굶어 죽기 딱 좋다니까요?"

도하는 자존심이 상한 듯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자기가 만든 남주인공이 시무룩해진 모습을 보니 세아는 또 마음이 약해졌다.

"치…… 알았어요. 대신 오늘부터는 진짜 철저하게 아껴 써야 해요. 마침 다음 화 구상도 해야 하니까, 오늘은 집 근처 도서관에 가서 무료 에어컨 바람이나 쐬면서 작업해요."

두 사람은 대충 채비를 마치고 동네 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의 차분하고 정적인 공기는 도하의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그는 빼곡하게 꽂힌 서적들을 보며 간만에 사장실에 앉아있는 듯한 진지한 포스를 풍겼다.

세아가 노트북을 켜고 다음 화 자료를 조사하는 동안, 도하는 경제·경영 서적 코너에서 최신 트렌드 책을 몇 권 골라와 세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책장을 넘기는 그의 길고 곧은 손가락과 고도로 집중할 때 살짝 좁혀지는 미간을 훔쳐보느라 세아는 도무지 글에 집중할 수 없었다.

'진짜 비현실적으로 잘생겼네……. 독자들이 왜 도하 사장님한테 미치는지 알겠다.'

그렇게 평화로운 침묵이 이어지던 중, 도하가 책장에서 발견한 어떤 시사 잡지의 페이지를 넘기다 말고 갑자기 굳어버렸다. 그의 눈동자가 무섭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책장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도하 씨? 왜 그래요?"

세아가 깜짝 놀라 속삭이듯 물었다. 도하는 아무 말 없이 잡지의 한 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글로벌 IT 기업들의 동향을 다룬 기사가 실려 있었다.

[글로벌 보안 기업 '팩스턴(Paxton)', 아시아 시장 진출 본격화…….]

"팩스턴……."

도하의 입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기업이 왜 이 세계의 잡지에 실려 있는 거지? 이건…… 내 세계에서 K-스마트를 집요하게 무너뜨리려던 적대 기업이다."

세아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네? 그럴 리가 없는데…… 팩스턴은 내가 소설 속 최종 빌런 회사로 지어낸 이름이란 말이에요! 현실의 실존 기업 이름인 '백스턴'을 아주 살짝 변형해서 쓴 건데……."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세아의 머릿속을 오래된 출판 파티의 한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 새까만 수트를 입은 남자가 자신의 시놉시스를 비웃으며 와인 잔을 흔들던 모습. 너무 오래 묻어둔 기억이라 얼굴은 선명하지 않았지만, 그 차가운 웃음만큼은 기묘할 정도로 기사 속 로고와 겹쳐 보였다.

도하가 잡지를 덮으며 세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옥탑방에서 보던 부드러운 '진우'의 모습이 아니었다. 전쟁터를 앞둔 K-스마트의 냉혹한 구원자, '강도하 사장'의 눈빛이었다.

"소설 속의 설정이 현실로 튀어나온 게 나뿐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윤 작가. 작품의 흔적들이…… 이 세계를 침식하고 있어."

도서관의 시원한 에어컨 바람 속에서, 세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소설 속 허구였던 빌런의 그림자가, 마침내 두 사람이 숨어든 현실의 문턱까지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