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판 고쳐야 사는 보건교사

4화: 지워진 줄은 밥보다 오래 남는다
냉동창고 표시등은 살아났지만 밝지는 않았다.
초록 불빛은 오래된 심전도처럼 깜빡였다. 한 번 켜지고 두 번 약해졌다. 그때마다 조은별의 눈썹도 같이 움직였다.
"이걸 살았다고 부르면 안 되겠는데."
은별은 냉동창고 문틈에 손등을 대 보았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지. 고기는 오늘 안 건드려. 문 여는 횟수부터 줄여야 해."
윤서하는 대답 대신 벽지 틈에서 떨어진 종이 조각을 보았다.
2-B 상담 이관
젖은 종이의 가장자리는 손톱만 대도 부서질 것처럼 불었다. 식재료 장부와 같은 종이 질감이 아니었다. 더 얇고 더 흰 종이였다. 행정실 양식지에 가까웠다.
백민재가 손전등을 흔들었다.
"그거 들고 서 계시면 자동으로 설명이 나오나요?"
"아니."
서하는 비상 가방에서 일회용 장갑을 꺼냈다.
"그러니까 만지기 전에 기록부터 남겨."
민재가 입꼬리를 비틀었지만 휴대폰 카메라를 켰다. 플래시를 쓰지 않으려는 듯 손전등 각도를 낮췄다.
강도윤은 급식실 문 쪽을 보고 있었다.
"복도 소리가 가까워집니다. 오래 못 있습니다."
계단 아래에서 긁는 소리가 들렸다.
집에.
낮고 젖은 목소리였다. 멀리 있는데도 급식실의 스테인리스 선반이 아주 작게 떨렸다.
서하는 종이 조각을 비닐 봉투에 넣었다. 보건실 처방 카드 사본을 넣어 두던 봉투였다. 겉면에 시간을 적었다.
08:17. 급식실 북쪽 벽 두 번째 스위치 옆. 찢긴 문서 조각.
민재가 벽지 틈을 손전등으로 비췄다.
"여기도 테이프 자국 있어요. 배전함에 붙은 거랑 비슷한데요."
"벽지에?"
"종이를 붙였다 뗀 자리요. 누가 숨기려고 한 건지 급하게 뗀 건지."
은별이 냉동창고 손잡이에 행주를 묶었다.
"이 판에 종이 숨길 정신이 있으면 밥도 좀 숨겨 놓지 그랬냐."
말은 거칠었지만 목소리는 낮았다. 은별도 알고 있었다. 이 종이는 쌀보다 오래 갈 수 있는 문제였다.
서하는 봉투를 가운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체육관으로 돌아가요. 2-B 담임부터 확인합니다."
"상담이면 학생 이름 나오는 거 아닙니까."
도윤의 질문이었다.
"이름은 아직 안 봅니다. 문서 제목과 보관 위치만 확인해요."
민재가 짧게 웃었다.
"아직?"
서하는 그를 보았다.
"필요한 만큼만."
체육관에 돌아왔을 때 죽 냄새가 바닥 가까이 깔려 있었다. 묽은 냄새였다. 배부를 수는 없지만 사람들을 줄 앞에 붙잡아 둘 만큼은 따뜻했다.
오하린은 반별 컵 개수를 적다 말고 서하의 얼굴을 살폈다.
"냉동창고는요?"
"임시로 살렸어. 열고 닫는 횟수 줄여야 해. 조리사님 지시에 따라."
은별은 바로 냄비 옆으로 돌아갔다.
"지금부터 추가 배급 없어. 떨어뜨린 컵만 바꿔 주고 끝이야."
뒤쪽에서 불만이 올라오려 했다. 도윤이 체육관 출입문 쪽에서 손을 들자 소리가 줄었다.
서하는 하린에게 봉투를 보였다.
"2-B 담임 선생님 계셔?"
하린의 눈이 잠깐 커졌다. 주변 학생 몇 명도 고개를 들었다.
"왜 2-B요?"
"확인할 게 있어. 학생 이름은 공개하지 않을 거야."
그 말이 먼저 나가야 했다. 서하는 체육관의 시선이 한 반 전체를 향해 붙는 것을 느꼈다. 방금까지 은별에게 모였던 검은 균열과 비슷했다. 이번에는 더 넓고 얇았다.
2-B 담임 김세영은 농구대 아래에서 일어났다. 젊은 국어 교사였고 가디건 한쪽 소매가 찢어져 있었다.
"저희 반에 무슨 일입니까?"
문재익도 움직였다. 그는 언제나 필요한 순간보다 조금 빠르게 나타났다.
"학생 상담 기록이면 이 자리에서 다룰 사안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서하가 말했다.
"그래서 이름은 다루지 않습니다. 문서 제목과 이동 경로만 확인하겠습니다."
문재익의 눈매가 좁아졌다.
"이동 경로도 개인정보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그럼 문 실장님이 더 정확히 아시겠네요. 2-B 상담 이관이라는 문서가 행정실 절차에 있었습니까?"
김세영이 먼저 숨을 들이켰다.
"있었습니다."
문재익이 고개를 돌렸다.
"김 선생님."
"이름 말 안 하겠습니다. 하지만 있었던 건 맞아요."
김세영은 손을 꽉 쥐었다.
"재난 전 주에 2-B 학생 상담 기록 일부를 행정실 보관본으로 넘기라는 공문이 왔습니다. 보건실 상담부에도 사본이 있으니 문제없다고 해서..."
하린이 낮게 물었다.
"왜 행정실로요?"
"물품 분실 관련 생활지도 자료와 합쳐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민재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와. 이제 반 단위로 도둑 찾으셨네요."
"민재야."
서하는 그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 체육관 전체가 듣지 못할 정도로.
"아직 네 얘기라고 말한 사람 없어."
"다 알아요. 2-B에 물품 분실이면 뻔하잖아요."
민재의 목소리는 비웃음처럼 들렸지만 손가락은 배터리 케이블을 세게 감고 있었다.
서하는 게시판 골판지를 가져왔다. 배급 규칙 아래 빈 공간에 새 줄을 적었다.
확인: 2-B 상담 기록 일부 행정실 이관 절차 존재.
그 아래에 다시 적었다.
미확인: 대상 학생, 반출 사유, 현재 보관 위치.
문재익이 바로 말했다.
"그런 식의 게시는 오해를 키웁니다."
"오해를 막으려고 쓰는 겁니다. 확인된 것과 아닌 것을 나눕니다."
"학생들은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그럼 어른이 그렇게 읽도록 도와야죠."
체육관이 조용해졌다. 김세영은 서하를 보지 못하고 자기 반 학생들 쪽만 보았다. 아이들은 불안하게 담요 끝을 만지고 있었다.
서하는 김세영에게 물었다.
"보건실 상담부 보관함에 사본이 남아 있어야 합니까?"
"네. 원래는요. 인덱스 카드는 남겨야 합니다."
"열쇠는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도윤이 낮게 말했다.
"보건실까지 이동하려면 중앙 복도를 지나야 합니다."
"갑니다. 짧게 확인하고 돌아옵니다."
문재익이 파일을 품에 더 붙였다.
"행정실 보관 자료는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혼자 확인하지 않습니다."
서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보건실 사본 먼저 확인합니다. 그다음 행정실 보관본은 교사 한 명, 학생회 한 명, 보건실 한 명이 함께 봉인해서 봅니다."
"윤 선생님이 그런 절차를 정할 권한은 없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공개 자리에서 제안합니다."
하린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학생회는 참여하겠습니다. 이름이 나오면 가리고 문서 번호와 반출 시간만 기록하겠습니다."
문재익은 하린을 보았다. 하린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완장의 붉은 천이 손목에서 조금 돌아가 있었지만 그녀는 다시 고쳐 매지 않았다.
보건실로 가는 복도는 더 좁아진 것 같았다. 창문마다 신문지와 테이프가 붙어 있었고 그 사이로 회색빛이 새어 들어왔다.
도윤은 앞에서 걸었다. 소화기는 들지 않았다. 대신 의자 다리 하나를 잘라 만든 막대를 쥐고 있었다.
"소리 내지 마세요."
민재가 뒤에서 속삭였다.
"저는 왜 또 끌려왔죠?"
"네가 전원 끊긴 시간대를 봤다고 했으니까."
"봤다고 했지 따라가고 싶다고는 안 했는데요."
"혼자 남으면 더 시끄럽게 말할 것 같아서."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걸음이 아주 조금 빨라졌다.
보건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안쪽 침대 위에는 뜯어진 붕대 포장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하는 문틀에 손을 대고 멈췄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보건실은 재난 전의 정리된 방이었다. 지금은 누군가 급하게 사람을 살리려다 포기한 자리처럼 보였다.
그녀는 숨을 짧게 들이쉬고 상담부 보관함 열쇠를 꺼냈다.
금속 서랍은 두 번째 시도에서 열렸다.
인덱스 카드들이 반별로 묶여 있었다. 2-A. 2-B. 2-C.
2-B 묶음은 얇았다.
너무 얇았다.
서하는 장갑 낀 손으로 카드를 넘겼다. 이름은 손바닥으로 가렸다. 제목과 표시만 보았다.
생활 적응 상담
가정 연락 보류
물품 분실 조사 후 상담
그 줄 옆에 검은 펜으로 작게 적힌 번호가 있었다.
B-17
카드는 남아 있었지만 뒤에 있어야 할 상담 기록지는 없었다. 종이 걸쇠가 찢어져 있었다.
민재가 문가에서 말했다.
"찾으셨어요?"
서하는 카드를 덮었다.
"사라진 기록이 있어."
"누구 건데요."
"지금은 말하지 않아."
"제 거죠?"
서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민재의 얼굴에 익숙한 표정이 올라왔다. 먼저 웃고 먼저 밀어내는 얼굴이었다.
"괜찮아요. 선생님들이 그 파일 엄청 좋아했거든요. 백민재가 훔쳤다. 백민재가 거짓말한다. 백민재가 반성 안 한다."
"그 파일이 사라졌다는 것과 네가 훔쳤다는 건 같은 말이 아니야."
"그래도 사람들은 그렇게 듣죠."
"그래서 지금 이름을 안 말하는 거야."
민재가 입을 다물었다.
도윤이 복도 쪽을 보며 손을 들었다. 멀리서 딱딱한 소리가 났다. 누군가 문고리를 반복해서 돌리는 소리 같았다.
서하는 카드 번호와 찢어진 걸쇠를 사진으로 남겼다. 그리고 카드 앞에 작은 메모지를 끼웠다.
원본 누락 확인. 반출 기록 대조 전까지 공개 금지.
민재가 낮게 말했다.
"급식실 전원 끊긴 시간하고 행정실 앞 복도 화면 끊긴 시간이 겹쳐요."
서하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
"새벽에 방송 살릴 때 화면 긁어 왔다고 했잖아요. 급식실은 18시 40분대부터 튀었고 행정실 앞도 거의 같은 시간에 끊겼어요. 근데 이상한 건..."
딱딱.
문고리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도윤이 낮게 끊었다.
"나가야 합니다."
민재는 말을 삼켰다. 서하는 보관함을 잠갔다.
체육관으로 돌아오는 동안 누구도 묻지 않았다. 복도 끝에서 회색 얼굴 하나가 유리문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빛 없는 눈은 안쪽을 보지 못하는 듯 같은 자리만 반복해서 밀었다.
도윤은 손전등을 켜지 않았다. 대신 민재의 어깨를 낮게 눌러 걸음을 멈추게 했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혼탁자는 세 번 더 문을 밀고 계단 쪽으로 사라졌다.
체육관에 들어서자 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 거예요?"
"2-B라며."
"또 민재야?"
민재가 웃었다.
"인기 많네, 나."
서하는 그보다 먼저 골판지 앞에 섰다.
"확인한 것만 추가합니다."
그녀는 굵은 펜으로 천천히 썼다.
보건실 상담부 2-B 인덱스 일부 남음.
관련 기록지 일부 누락.
행정실 반출 기록 대조 전까지 학생 이름 공개 금지.
민재 관련 결론 없음.
마지막 줄을 쓸 때 체육관 뒤쪽에서 누군가 코웃음을 쳤다.
"결론 없음이 제일 편하네."
서하는 펜 뚜껑을 닫았다.
"결론 없는 걸 결론처럼 쓰면 사람이 다칩니다."
은별이 배급대에서 고개를 들었다.
"밥줄도 그래. 확인 안 된 말로 사람 빼면 냄비가 비어."
이번에는 은별의 말에 웃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몇몇 학생이 컵을 더 세게 쥐었다.
문재익이 앞으로 나왔다.
"행정실 자료는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다만 학생회가 원본을 만지는 것은 허용할 수 없습니다."
"원본을 만지자는 게 아닙니다. 봉인하고 같이 봅니다."
서하는 보건실 봉인 테이프를 꺼냈다.
"문 실장님이 가져오고 김세영 선생님이 확인하고 하린이 시간과 문서 번호를 적습니다. 저는 학생 이름을 가립니다. 그렇게 하면 누가 무엇을 봤는지 남습니다."
"저를 의심하는 겁니까?"
"절차는 의심이 아니라 보호 장치라고 제가 아침부터 말했습니다."
문재익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파일철 안쪽에서 작은 종이 모서리가 보였다. 접힌 칸에 반출 확인이라는 글자가 아주 잠깐 드러났다.
서하는 그것을 보았다. 그러나 손을 뻗지 않았다.
지금 빼앗으면 사람들은 종이보다 몸싸움을 볼 것이다. 그리고 몸싸움은 언제나 더 쉬운 결론을 만든다.
"문 실장님."
서하는 낮게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행정실 자료를 봉인합시다."
문재익은 웃지 않았다.
"행정실 문이 잠겨 있습니다."
도윤이 바로 말했다.
"제가 같이 갑니다."
하린도 파일을 들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문재익은 하린을 한 번 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 그는 학생회장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계산하는 눈이었다.
그때 체육관 스피커에서 잡음이 터졌다.
치직.
학생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방송실 전원은 꺼져 있어야 했다.
민재의 얼굴이 변했다. 빈정거림이 빠지고 계산만 남았다.
"잠깐."
그는 주머니에서 배터리를 꺼냈다.
"그 시간대 영상, 누가 지운 게 아니라 옮긴 거예요."
"어디로?"
서하가 물었다.
스피커에서 다시 잡음이 났다. 이번에는 짧은 숨소리 같은 것이 섞였다.
민재는 체육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서버실 백업 쪽으로요. 근데 그건 제가 잠근 데예요."
그 말이 끝나자 모든 시선이 민재에게 돌아갔다.
서하는 민재 앞에 한 걸음 섰다.
"확인하고 말하자."
그녀의 목소리는 체육관 잡음보다 낮았지만 더 멀리 갔다.
"이번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