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판 고쳐야 사는 보건교사

2화: 도둑에게 배급을 맡길 수 없다
체육관은 새벽인데도 잠들지 못했다.
학생들은 반별로 웅크린 채 휴대폰 배터리 잔량을 세거나 벽만 바라보았다. 울다 지친 아이들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누가 기침만 해도 다시 깼다.
배급대 앞의 줄은 조은별 앞에서 끊어졌다.
은별은 커다란 국자를 쥐고 있었다. 물통 옆에는 종이컵이 쌓여 있었다. 그 뒤에는 보건실 봉인 테이프가 붙은 박스가 놓여 있었다.
"도둑한테 물도 받으라고?"
작은 말이었다. 그러나 체육관 안에서는 작은 말이 오래 굴렀다.
은별의 손등 핏줄이 솟았다.
"내가 뭘 훔쳤는데. 말 똑바로 해."
"아까 박스 들고 오셨잖아요. 급식실 쌀도 없어졌다면서요."
"그 박스는 애들 먹일 거라고 몇 번을 말해?"
윤서하는 왼쪽 손목을 가운 소매 안으로 밀어 넣었다. 검은 선 위로 떠오른 문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대상: 조은별
평판 붕괴 사유: 식량 절도
죽었다가 깨어났다는 사실은 아직 몸 안에 차가운 물처럼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말을 꺼내면 아무도 은별의 박스를 보지 않을 것이다.
서하는 배급대 앞으로 걸어갔다.
"조은별 조리사님. 국자 내려놓으세요."
은별이 서하를 보았다.
"선생님까지 나보고 물러나란 거예요?"
"아니요. 확인할 때까지 손을 비우자는 겁니다."
"말이 좋아 확인이지."
"확인하고 말하겠습니다. 그게 지금 조리사님한테도 필요합니다."
은별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그래도 국자를 물통 옆에 내려놓았다.
서하는 박스 앞에 무릎을 굽혔다. 보건실 봉인 테이프는 끊어지지 않았다. 테이프 위에 적은 글씨도 그대로였다.
18:42. 급식실 앞. 체육관 이동.
"하린아. 네가 적은 반입 기록 가져와."
오하린은 완장을 만지작거리다 학생회 파일을 들고 왔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목소리는 버텼다.
"봉인 박스 하나, 물통 세 개, 종이컵 두 묶음입니다. 반입 시간은 선생님 기록과 같습니다."
서하는 하린을 보았다.
"박스를 열어 본 사람?"
"없습니다. 제가 배급대 뒤에 두고 학생회 두 명을 세웠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문재익이 나왔다. 정장 소매에는 먼지가 묻어 있었지만 손목시계만은 깨끗했다.
"봉인 박스만 문제가 아닙니다. 급식실 쌀 포대가 찢어졌고 장부에 빈 줄이 있습니다. 조리사님이 장부 밖 식재료를 임의로 보관한 사실도 있습니다."
은별의 얼굴이 붉어졌다.
"장부 밖이 아니라 알레르기 있는 애들 거라고 했잖아요."
"그 판단을 혼자 하셨다는 게 문제입니다."
문재익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사람들 귀에 잘 닿았다.
"재난 상황에서는 사적 보관과 절도를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서하는 은별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첩 있으세요?"
은별의 눈빛이 거칠어졌다.
"그거 애들 이름 있어요."
"전체를 공개하지 않습니다. 보건실 기록과 맞는지만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학생들 앞에서요?"
"제 가방에 처방 카드 사본이 있습니다. 이름은 제가 가리고 대조합니다."
은별은 앞치마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모서리가 닳아 있었고 종이 사이에는 급식 메뉴표 조각이 끼어 있었다.
서하는 비상 가방에서 보건실 처방 카드 묶음을 꺼냈다. 학생 이름 앞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고 알레르기 항목만 맞췄다.
밀가루. 땅콩. 우유. 달걀.
은별의 수첩에는 대체식 날짜와 반 번호가 작게 적혀 있었다. 보건실 기록과 어긋나는 항목은 없었다.
서하는 박스를 열었다. 안에는 작은 쌀국수 묶음, 대체 간식, 알레르기 표시 스티커가 든 비닐봉지가 있었다. 포장이 화려하지도 많지도 않았다.
"박스 안 물품은 알레르기 대체 식재료입니다."
웅성거림이 줄었다.
서하는 바로 덧붙였다.
"다만 따로 보관한 것은 사실입니다. 조리사님 혼자 결정하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은별의 턱이 떨렸다.
"애들 이름 나가는 게 싫었어. 급식 줄에서 따로 부르면 놀림받는 애들이 있잖아."
"그 이유는 이해합니다. 그래도 지금부터는 명단을 보호하면서도 누가 확인했는지 남겨야 합니다."
문재익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쌀 포대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다시 시선이 은별에게 몰렸다.
서하는 그 시선이 검은 균열처럼 은별의 어깨로 모이는 것을 보았다. 눈을 감았다 떠도 사라지지 않았다. 손목이 뜨거워졌다.
신기한 현상에 놀랄 시간은 없었다.
"쌀 포대와 장부를 확인해야 합니다."
강도윤이 체육관 문 앞에서 고개를 돌렸다.
"복도로 나가는 건 반대합니다. 안개가 완전히 빠졌는지 모릅니다."
"셋만 갑니다. 도윤 씨, 민재, 저."
"지금은 식량보다 출입 통제가 먼저입니다."
"식량 담당을 잃으면 통제도 무너집니다."
도윤은 잠시 서하를 보았다. 그는 반박 대신 바닥의 소화기 하나를 집어 들었다.
서하는 농구대 아래에 앉아 있던 백민재를 불렀다.
"민재. 급식실 앞 CCTV 백업 화면 남아 있어?"
민재가 후드 끝을 잡아당겼다.
"왜요. 이번에는 제가 쌀 훔쳤다고 하시게요?"
"사람 하나가 도둑으로 굳어지기 전에 확인하려고."
"그 사람 하나에 저는 들어가 본 적 없는데요."
"오늘은 조은별 조리사님입니다."
민재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하지만 일어섰다.
"화면이 멀쩡할 거라는 보장은 없어요."
"남은 만큼이면 됩니다."
급식실 앞 복도는 밤보다 조용했다. 비상등의 붉은 빛이 흩어진 쌀알 위에 얇게 깔렸다. 찢어진 포대는 철제 선반 아래에 기울어져 있었다.
서하는 포대 끝을 만지지 않고 들여다보았다.
"쥐가 뜯은 건 아니네요."
도윤이 손전등을 낮게 비췄다.
"칼자국입니다. 한 번에 그었습니다."
민재는 휴대폰에 작은 배터리를 연결했다. 화면이 몇 번 깜빡이다가 정지 영상으로 멈췄다.
"방송 살릴 때 CCTV 일부를 긁어 왔어요.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고요."
영상 속 은별은 박스를 안고 냉동창고 쪽에서 나왔다. 쌀 포대가 놓인 선반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몇 초 뒤 문재익이 급식실 문 앞에 들어왔다. 화면은 전원 불안정으로 일그러졌다.
"여기서 끊겼어요."
민재가 말했다.
"범인은 못 잡았네요."
"그래도 은별 조리사님이 박스를 빼내며 쌀 포대를 찢었다는 말은 안 맞아."
서하는 급식 장부를 펼쳤다. 빈 줄 두 칸에는 지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은별의 둥글고 눌린 글씨와 달리 남은 획은 얇고 길었다.
"필체가 다릅니다. 확정은 아니지만 지금 배급에서 배제할 근거로 쓰기엔 부족합니다."
복도 끝에서 금속 긁히는 소리가 났다.
도윤이 손을 들었다. 모두 멈췄다.
계단 아래 회색 얼굴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젖은 종이처럼 벌어졌다.
"집에. 집에. 집에."
도윤은 소화기를 반대편 복도로 굴렸다. 금속통이 난간에 부딪히며 큰 소리를 냈다. 회색 얼굴은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돌아갑니다."
서하는 포대 절단면과 장부를 휴대폰으로 찍었다. 쌀 한 줌은 위생 봉투에 담았다. 증거라고 부르기엔 작았지만 말보다 오래 남는 물건이었다.
체육관으로 돌아오자 소문은 더 자라 있었다.
"조리사님 빼고 학생회가 나눠요."
"학생회도 못 믿지. 누가 뭘 숨기는지 어떻게 알아."
"문 실장님이 장부 보시면 되잖아요."
은별은 배급대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처음의 분노보다 깊은 피로가 얼굴에 붙어 있었다.
서하는 배급대 앞에 섰다.
"확인한 것만 말하겠습니다."
체육관의 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봉인 박스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안에는 알레르기 대체 식재료가 있었습니다. 보건실 처방 기록과 조은별 조리사님의 수첩이 맞습니다."
은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숨긴 건 내 잘못이야."
그 말에 몇몇 학생이 고개를 들었다.
"놀림받을 애들 생각한다고 혼자 들고 있었어. 그게 식량 훔친 건 아니야. 그래도 이 판에 혼자 숨긴 건 잘못 맞아."
서하는 은별을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은 은별의 사과가 감정에 삼켜지지 않게 해야 했다.
"쌀 포대는 칼로 찢긴 흔적이 있습니다. CCTV에 남은 조은별 조리사님의 동선은 포대 위치와 맞지 않습니다. 장부 빈 줄도 조리사님 필체로 보기 어렵습니다."
문재익이 물었다.
"범인은 찾지 못했다는 뜻입니까?"
"네. 아직 모릅니다."
"그렇다면 의혹은 남아 있습니다. 배급 담당에서 제외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서하는 그를 똑바로 보았다.
"의혹이 남았다는 이유로 가장 일을 아는 사람을 빼면 오늘 아침 배급은 실패합니다. 지금 필요한 건 처벌 흉내가 아니라 확인 가능한 조건입니다."
"윤 선생님이 책임지실 겁니까?"
"오늘 아침 절차는 제가 기록합니다. 문 실장님도 행정실 보관 장부를 가져와 대조하십시오. 조은별 조리사님이 배급을 맡습니다. 하린 학생회장이 시간과 수량을 적습니다. 창고 출입은 두 명 이상이 함께 합니다."
하린이 바로 파일을 펼쳤다.
"반별 대표 한 명씩만 앞으로 나와 주세요. 물 수령부터 기록하겠습니다. 중복 수령은 뒤로 미룹니다."
은별은 국자를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손끝이 떨리지 않았다.
"줄 똑바로 세워. 먼저 물 한 컵씩. 죽은 묽게 끓일 거야. 밀가루 못 먹는 애들은 따로 나오지 말고 담임 통해 말해. 이름 크게 안 부를 테니까."
한 학생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왔다.
"저희 반 물부터 받아도 돼요?"
은별은 종이컵을 집어 들었다.
"컵 버리지 말고 이름 적어. 새 컵 계속 못 준다."
짧은 웃음이 몇 군데에서 터졌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이 풀리는 소리에 가까웠다.
민재는 농구대 아래에서 배터리를 만지작거렸다.
"기록 좋아하시네."
그래도 그는 휴대폰 화면을 꺼 버리지 않았다. 급식실 앞 영상은 아직 남아 있었다.
서하의 손목이 다시 뜨거워졌다.
검은 문구가 물에 번지듯 흐려졌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역할 복귀 확인 중.
서하는 그 문장을 오래 보지 않았다. 배급대 앞 줄은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은별은 도둑이 아니라 밥을 만들 사람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급식실 쪽에는 여전히 찢어진 쌀 포대가 있었다.
장부의 빈 줄도 그대로였다.
누군가는 도둑이라는 말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 말이 다음 사람을 향하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하루도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