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판 고쳐야 사는 보건교사

시놉시스
대규모 정전과 회색 안개가 도시를 덮친 밤, 하린학원 보건교사 윤서하는 학생들을 체육관으로 대피시키다 쓰러진다. 죽기 직전 상담 기록부 위에 떠오른 문장은 그녀에게 하루짜리 생존 계약을 내민다. 내일을 얻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무너진 평판을 회복해야 한다.
1화: 내일을 지급합니다
보건실 냉장고의 온도계가 먼저 흔들렸다.
윤서하는 냉장 의약품 보관 칸을 열었다가 닫고, 온도 기록지 맨 아래에 새 숫자를 적었다.
8.1도.
경고선 바로 밑이었다.
"선생님, 밖에 필터 씌운 거 아니에요?"
2학년 남학생 둘이 보건실 문턱에 붙어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운동장 너머 도로가 회색으로 번지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장난처럼 웃던 얼굴은 영상 끝에서 굳었다.
가로등 아래 사람이 서 있었다. 같은 방향으로, 같은 속도로, 계속 머리를 부딪치고 있었다.
서하는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복도에 서 있지 말고 교실로 돌아가. 창문 닫고, 담임 선생님 지시 기다려."
"진짜예요?"
"확인하고 말하자. 지금은 움직이지 않는 게 먼저야."
말은 차분했지만 보건실 전화기는 세 번째부터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교무실 내선도, 행정실도 마찬가지였다.
서하는 비상 가방을 꺼냈다.
소독제. 탄력 붕대. 일회용 장갑. 해열제. 기관지 확장 흡입기 두 개. 접이식 들것 잠금은 뻑뻑했고, 서하는 손바닥으로 한 번 더 눌러 고정했다.
문이 다시 열렸다.
오하린이 학생회 완장을 찬 채 서 있었다. 긴 머리 끝이 땀에 젖어 목에 붙었다.
"선생님, 1학년 교실에서 애들이 울어요. 부모님 전화가 안 된대요. 방송실도 연결이 안 됩니다."
"체육관을 대피 장소로 쓴다. 창문 적고, 출입구 두 개라 통제하기 쉬워."
"교장 선생님 허가가 아직..."
"허가 기다리다가 애들 복도에 세워 두면 더 위험해."
서하는 보건실 문에 붙은 비상 대피도를 뜯어 하린에게 건넸다. 빨간 펜으로 본관 중앙계단, 급식실 앞 복도, 체육관 연결 통로를 동그라미 쳤다.
"반별로 줄 세워. 뛰지 말라고 해. 넘어지면 밟힌다."
하린은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 안내처럼 말하겠습니다."
"공식보다 정확하게."
복도는 이미 소문으로 차 있었다.
회색 안개가 지하철역에서 올라왔대.
닿으면 바로 죽는대.
누가 운동장에서 선생님을 물었대.
서하는 문장들을 하나씩 지나쳤다. 확실한 것은 냄새였다. 젖은 콘크리트와 탄 플라스틱이 섞인 냄새가 열린 창문 틈으로 밀려왔다.
본관 현관 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문 닫아! 지금 정문 열어 두면 안 돼!"
강도윤이었다. 경비 계약직 이름표보다 낡은 구조대 점퍼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남자. 그는 정문 안쪽에서 쇠사슬을 걸고 있었다. 운동장 너머에는 학부모 차량 몇 대가 비상등을 켠 채 멈춰 있었다.
"아직 밖에 학생 있어요."
서하가 말했다.
도윤은 쇠사슬을 한 번 더 당겼다.
"밖으로 나간 학생을 확인 없이 들이면 전체가 위험합니다."
"확인했어요?"
"길 건너 편의점 앞에서 봤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물었습니다."
그의 말이 복도 공기를 얼렸다.
서하는 하린에게 몸을 돌렸다.
"방송 가능한 마이크 찾아. 안 되면 학생회가 층마다 직접 안내해."
"네."
"그리고 민재 찾아와."
하린의 눈이 흔들렸다.
"백민재요? 애들이 싫어할 텐데요."
"싫어하는 것과 쓸모 있는 건 별개야. 서버실 백업 전원 위치를 걔가 알아."
몇 분 뒤 백민재가 후드 모자를 눌러쓴 채 끌려오듯 나타났다. 손가락에는 납땜 자국이 남아 있었고, 눈빛은 먼저 비웃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 부르셨어요? 또 뭐 없어졌나 보죠."
주변 학생 몇 명이 숨죽여 웃었다.
서하는 웃지 않았다.
"방송실 전원이 죽었다. 서버실 쪽 보조 배터리로 살릴 수 있어?"
민재의 표정이 아주 잠깐 굳었다.
"누가 그런 게 있대요?"
"네가 모르면 없다고 해도 돼. 대신 체육관에서 애들 울음소리 듣고 있어야 해."
민재는 이를 악물었다.
"마이크만 살리면 되죠?"
"CCTV 백업이 살아 있으면 복도 화면도."
"선생님은 늘 부탁을 협박처럼 하시네요."
"지금은 부탁할 시간이 없어."
민재가 돌아섰다. 도윤이 그 앞을 막았다.
"혼자 못 보냅니다."
"그럼 따라오든가요. 다만 저 건드리면 전원 위치 안 알려 줍니다."
서하는 두 사람 사이로 들어갔다.
"도윤 씨는 정문. 민재는 하린이랑 서버실. 각자 필요한 데로 가요."
도윤은 말없이 현관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가장 위험한 쪽을 먼저 막고 있었다.
급식실 앞 복도에서 두 번째 충돌이 터졌다.
조은별이 양팔에 박스를 안고 있었다. 박스 옆면에는 알레르기 대체 식재료라고 작게 적힌 라벨이 붙어 있었지만, 테이프가 찢겨 반쯤 가려졌다.
"그거 지금 어디로 가져가십니까?"
행정실장 문재익이 물었다. 정장 차림 그대로였고 손목시계를 자꾸 봤다.
은별은 숨이 차 있었다.
"냉동창고 전원이 나갔다니까요. 이건 밀가루 못 먹는 애들 거예요. 체육관으로 옮겨야지."
"개인적으로 보관한 식재료라면 장부에 없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애들 먹일 거라고요."
급식실 안쪽 바닥에는 쌀알이 흩어져 있었다. 포대 하나가 세로로 길게 찢겨 있었고, 장부가 놓인 철제 선반에는 빈 줄 두 칸이 어색하게 남아 있었다. 누가 적다 만 것인지, 누가 지운 것인지 바로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까 쌀 포대도 찢어졌다던데."
"조리사님이 먼저 챙긴 거 아니야?"
은별의 얼굴이 붉어졌다.
"야, 내가 그 쌀을 어디다 숨겨? 이 판에?"
문재익이 서하를 보았다.
"윤 선생님, 지금은 물품 이동을 통제해야 합니다. 이런 식이면 나중에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집니다."
서하는 박스 라벨을 확인하고, 급식실 문 안쪽의 냄새를 맡았다. 냉기가 빠지고 있었다. 녹는 고기와 젖은 종이 냄새가 섞여 나왔다.
"박스는 체육관 배급대 뒤에 봉인합니다. 하린 학생회장이 명단 적고, 은별 조리사님은 급식실 전원 차단 확인 후 이동하세요."
"저를 의심하는 겁니까?"
은별이 물었다.
"아니요. 의심이 생기지 않게 절차를 남기는 겁니다."
문재익이 바로 끼어들었다.
"그럼 윤 선생님 책임으로 기록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서하는 박스 위에 보건실 봉인 테이프를 붙였다. 검은 글씨로 시간과 장소를 적었다.
18:42. 급식실 앞. 체육관 이동.
그때 전등이 꺼졌다.
복도 전체가 한 번에 검어졌다가, 비상등의 붉은 빛만 남았다. 아이들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밖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정문 쪽이었다.
"체육관으로 이동!"
서하가 외쳤다.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방송이 살아났다. 잡음 섞인 하린의 목소리가 천장에서 떨어졌다.
「전교생은 담임 인솔에 따라 체육관으로 이동합니다. 뛰지 않습니다. 창문과 외부 출입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 뒤로 민재의 낮은 욕설이 섞였다가 끊겼다.
복도 끝에서 안개가 밀려왔다. 물처럼 낮게 깔리지 않고 사람 어깨 높이에서 뭉쳐 움직였다. 그 안에서 교복 소매가 보였다.
누군가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얼굴은 회색으로 젖어 있었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집에. 집에. 집에."
1학년 학생 하나가 얼어붙었다. 서하는 그 아이의 팔을 잡아당겼다.
"눈 보지 말고 걸어."
아이는 움직이지 못했다.
도윤이 정문 쪽에서 달려와 소화기를 바닥에 던졌다. 금속 소리가 복도에 울리자 회색 얼굴들이 동시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리에 반응합니다. 조용히 움직여요."
그의 목소리도 낮아져 있었다.
서하는 아이를 들것 위에 거의 밀어 올렸다. 다른 학생 둘에게 손잡이를 잡게 했다.
"셋 세면 간다. 하나, 둘."
유리 파편을 밟은 발이 미끄러졌다. 안개 속 손이 서하의 가운 자락을 붙잡았다. 차갑지 않았다. 이상할 만큼 뜨거웠다.
도윤이 손전등을 비추자 회색 얼굴이 빛을 향해 튀어 올랐다. 서하는 아이를 밀어냈다.
"가!"
들것이 체육관 쪽으로 사라졌다.
그 뒤를 따라가려는 순간, 등 뒤에서 충격이 왔다. 서하는 벽에 부딪혔다. 숨이 끊겼다. 소독약 냄새, 탄 플라스틱 냄새, 누군가 우는 소리가 뒤섞였다.
그녀의 손이 바닥을 더듬었다.
보건실에서 챙겨 온 낡은 상담 기록부가 가방 밖으로 빠져 있었다. 표지에는 오래전 학생들이 붙인 스티커 자국이 남아 있었다.
종이가 젖어 가는데, 글자가 떠올랐다.
오늘 한 사람의 무너진 평판을 회복하면, 내일을 지급합니다.
서하는 눈을 깜빡였다.
헛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문장이 너무 선명했다.
그 아래에 더 짧은 문장이 생겼다.
서명하시겠습니까.
복도 끝에서 아이가 울었다. 하린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민재가 어디선가 "뒤쪽 전원 죽습니다!" 하고 외쳤다. 은별은 욕을 하며 학생들을 밀어 넣고 있었다.
서하는 펜을 찾지 못했다. 손가락 끝에 피가 묻어 있었다.
그녀는 기록부 아래 빈칸에 이름을 썼다.
윤서하.
심장이 멎는 느낌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소리가 먼저 사라지고, 몸의 무게가 다음에 사라졌다.
다시 들린 첫 소리는 체육관 천장의 환풍기였다.
서하는 눈을 떴다. 매트리스가 아니라 접은 커튼 위에 누워 있었다. 팔에는 누군가 대충 감은 붕대가 있었고, 체육관 바닥에는 학생들이 반별로 웅크리고 있었다.
새벽빛은 없었다. 비상등과 휴대폰 불빛뿐이었다.
손목이 아팠다.
왼쪽 손목 안쪽에 검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펜 자국 같지 않았다. 피부 밑에서 올라온 금처럼 보였다.
그 위로 글자가 천천히 떠올랐다.
04:44
대상: 조은별
평판 붕괴 사유: 식량 절도
다음 새벽 전까지 회복하십시오.
서하는 앉으려다 숨을 삼켰다. 갈비뼈 아래가 깊게 울렸다.
체육관 건너편에서 누군가 말했다.
"급식실 쌀이 없어졌대."
"아까 조리사 아줌마가 박스 들고 갔잖아."
"그럼 우리 먹을 거 훔친 거야?"
"도둑한테 배급 맡기면 안 되지."
봉인 테이프가 붙은 박스는 배급대 뒤에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이미 박스가 아니라 조은별에게 꽂혀 있었다.
은별은 커다란 국자를 쥔 채 서 있었다. 아이들에게 미지근한 물을 나눠 주던 손이 멈춰 있었다.
서하는 손목을 감쌌다.
죽기 직전 뒤로 미룬 오해가, 내일의 조건이 되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