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내가 흑막이 되겠습니다

3화: 검은 성의 주인
이틀 뒤 아침, 에블린은 백작의 서재 앞에서 검은 봉인이 찍힌 의뢰서를 꺼내 들었다.
발레리우스 대공가 저주 정화 후보 파견 요청.
글자만 보아도 서늘한 이름이었다. 황태자조차 함부로 언급하지 않던 사신의 성. 신전이 자원자를 보내지 못하는 저주받은 대공.
하지만 이제 에블린에게 두려움은 쓸모 있는 재료였다.
"그 의뢰는 신전도 보류했다."
백작이 문서를 훑어보며 말했다. 손가락 끝이 책상 위를 두 번 두드렸다.
"네가 갈 곳이 아니다."
"그래서 제가 가야 합니다."
에블린은 미리 준비한 신전 증명서 사본을 그 옆에 올려놓았다. 이사벨라의 이름 아래에는 안정 보조자 에블린 폰 로젠버그라는 문장이 작지만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백작의 시선이 그 문장에서 잠시 멎었다.
"대신관께서 이사벨라의 첫 공식 행보를 서두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대공가의 의뢰를 직접 맡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정화가 필요한지 먼저 살피고 이사벨라에게 맞는 안전한 의뢰를 고르겠습니다."
"그걸 네가 판단하겠다고?"
"이사벨라의 흐름이 불안정하다는 기록이 남았습니다. 곁에서 보조한 제가 살피는 편이 가문에도 안전합니다."
에블린은 고개를 숙였다. 순순한 말투였다. 그러나 그 말은 백작이 거절하기 어렵게 짜여 있었다.
백작은 늘 손해 보지 않는 선택을 사랑했다.
"정화는 하지 마라."
그가 마침내 말했다.
"대공가 사람들을 자극하지도 말고 해 지기 전 돌아와라. 소개장은 내 이름으로 써 주겠다.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야 하니까."
감시의 줄까지 손에 쥐여 주려는 말이었다.
에블린은 얌전히 미소 지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서재를 나오자 이사벨라가 복도 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 맞춘 흰 드레스 자락을 쥔 얼굴에는 불안이 어려 있었다.
"언니가 정말 발레리우스 대공가에 간다고요? 거기서는 사람들이 죽는다던데요."
걱정하는 척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에블린은 그 눈동자 밑에 숨은 안도도 읽었다. 언니가 위험한 곳으로 가면 자기 곁의 그림자가 잠시 사라진다는 안도.
"걱정하지 마."
에블린은 이사벨라의 손목 리본을 매만져 주었다.
"네 첫 정화 의뢰를 고르는 일이니까. 네가 무서워하지 않을 곳으로 골라 올게."
이사벨라는 곧 환하게 웃었다.
"역시 언니밖에 없어요."
에블린은 손끝에 닿은 맥박을 느꼈다. 가느다란 손목 아래에는 아직 이사벨라의 것이 아닌 힘이 잠들어 있었다.
발레리우스의 성은 산맥 끝에 박힌 검은 칼날 같았다.
해가 기울어도 성벽에는 빛이 닿지 않았다. 마차가 성문 앞에 멈추자 철문 위에 앉아 있던 까마귀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날갯짓 소리가 하늘을 긁었다.
에블린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품 안의 장미 씨앗을 쥐었다. 씨앗은 미지근했다. 서쪽 온실에서 옮겨 심은 뒤로 붉은 뿌리가 조금 더 자라 있었다.
성문을 지키던 기사는 소개장을 읽고도 길을 열지 않았다.
"로젠버그 백작의 영애가 왜 여기까지 왔습니까?"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짙은 갈색 머리를 단정히 묶은 남자는 로웬이라고 자신을 밝혔다. 검집에 얹힌 손은 처음부터 에블린을 손님으로 보지 않았다.
"신전 의뢰의 상태를 확인하러 왔어요."
"정화사도 아닌 분이요?"
"정화사였다면 돌아가라고 하셨겠죠."
에블린은 의뢰서의 검은 봉인을 가리켰다.
"저는 왜 자원자가 없었는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이사벨라의 의뢰를 고르기 전에 위험을 알아야 하니까요."
로웬의 눈썹이 움직였다. 이사벨라는 이제 막 성녀 후보가 된 소녀였다. 그 이름을 내세우면 로젠버그의 계산도 자연스럽게 보인다.
"확인만 하십시오. 대공 전하를 뵐 수 있다는 기대는 버리시고요."
"처음부터 그분께 축복을 빌러 온 게 아닙니다."
철문이 낮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성 안은 예상보다 조용했다. 종복들은 발소리마저 죽인 채 벽을 따라 움직였다. 복도마다 놓인 성물에는 검은 금이 가 있었고 화병의 장미는 잎이 달린 채 잿빛으로 말라 있었다.
에블린은 화병 앞에 멈췄다.
손가락을 가까이 대자 마른 흙 밑에서 아주 희미한 떨림이 전해졌다. 뿌리는 죽지 않았다. 무언가에게 매일 조금씩 삶을 빼앗기고 있을 뿐이었다.
"정화사들은 무엇을 했죠?"
로웬이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성수를 뿌리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빛을 밀어 넣으려 했지요. 그럴 때마다 저주는 더 날뛰었습니다."
"몇 명이나 다쳤나요?"
"두 명은 다시는 신성력을 쓰지 못합니다."
에블린은 검은 금을 내려다보았다. 이사벨라를 이곳에 보냈다면 어떻게 됐을까. 자신의 힘을 받아 억지로 빛나는 아이는 이 성의 문턱도 넘지 못했을 것이다.
백작은 그걸 모르고 있었다. 알아도 박수와 명예가 보장된다면 보냈을 것이다.
복도 끝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렸다.
쨍.
그 한 번의 소리 뒤로 성 전체가 숨을 삼켰다.
로웬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영애, 뒤로 물러나십시오."
그가 검을 뽑아 에블린 앞을 막았다. 바닥의 검은 금이 갑자기 벌어졌다. 틈 사이로 손가락만 한 가시들이 솟더니 순식간에 사람 키만큼 자랐다.
가시 끝에는 마른 피가 엉겨 있었다.
하인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벽에 등을 붙였다. 검은 줄기는 벽을 타고 번져 창문을 덮었다. 낮은 신음 같은 소리가 복도를 가득 메웠다.
에블린의 폐가 본능적으로 조여 들었다.
불길. 연기. 타는 살 냄새.
검은 가시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는 화형대의 장작이 꺼지며 내던 소리와 닮아 있었다. 발이 한순간 굳었다.
그러나 에블린은 손안의 씨앗을 더 세게 쥐었다.
그날의 자신은 묶여 있었다.
지금의 자신은 아니었다.
"로웬 경. 저 가시는 사람을 가리나요?"
"가리지 않습니다."
"그럼 검으로 자르지 마세요. 더 퍼질 겁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에블린은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영애!"
가시 하나가 그녀의 발목을 노리고 튀어 올랐다. 에블린은 장미 씨앗을 바닥에 던졌다. 엄지손톱으로 검지 끝을 긁자 선명한 피가 떨어졌다.
피가 씨앗의 갈라진 틈에 스며들었다.
깊은 곳에서 생명력이 눈을 떴다. 부드러운 힘이 아니었다. 땅속을 뚫고 나오는 뿌리처럼 질기고 완고한 힘이었다.
붉은 뿌리가 대리석 틈을 갈랐다. 뿌리는 검은 가시 하나를 휘감고 조용히 파고들었다. 가시는 몸을 비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지만 곧 움직임을 멈췄다.
에블린은 알았다.
이것은 정화가 아니었다. 저주의 숨통을 끊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저주가 빼앗아 먹을 생명력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는 일. 굶주린 짐승의 주둥이에 잠깐 재갈을 물리는 일에 가까웠다.
그때 계단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누가 들어오라 했지?"
검은 머리카락 아래 붉은 눈이 에블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드릭 발레리우스.
소문은 그가 괴물이라고 했다. 실제로 마주한 남자는 소문보다 훨씬 인간적이어서 더 위험했다. 창백한 얼굴에는 피로가 짙었고 검은 셔츠 소매 아래 손등에는 가시와 같은 문양이 번져 있었다.
그 문양은 살아 있었다.
세드릭이 계단을 한 칸 내려올 때마다 복도의 어둠이 그에게 들러붙었다. 로웬이 고개를 숙였다.
"대공 전하. 신전 의뢰를 확인하러 온 로젠버그 영애입니다."
"돌려보내."
세드릭의 시선은 에블린의 피 묻은 손끝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 당장."
"제가 여기서 본 것을 신전에 그대로 전하면 다음에는 더 많은 정화사가 올 겁니다."
에블린이 말했다.
세드릭의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협박인가?"
"제안입니다."
검은 가시가 다시 꿈틀거렸다. 붉은 뿌리 하나가 끊어지자 에블린의 손끝에서 피가 한 방울 더 떨어졌다. 세드릭이 순간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가 가까워지자 가시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아니. 멎은 것이 아니었다. 세드릭의 피를 향해 몸을 낮추고 있었다.
에블린은 그 광경을 놓치지 않았다. 저주는 대공의 몸을 갉아먹으면서도 그의 피에 묶여 있었다.
"신전의 빛은 이 저주를 밀어내려 합니다. 그러니 저주도 더 세게 물어뜯는 거예요."
그녀는 세드릭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 안에 있는 것은 없애는 대상이 아니에요. 누군가가 당신의 피에 매달아 둔 족쇄죠."
로웬이 숨을 들이켰다.
세드릭의 얼굴에서는 아무 표정도 읽히지 않았다. 다만 그가 천천히 다가와 에블린의 턱을 들어 올렸다. 차가운 손가락 끝에 검은 기운이 스쳤다.
"그걸 알아본 자는 처음이군."
"처음으로 말한 사람일 뿐일 수도 있죠."
"네 힘은 무엇이지? 신전의 냄새는 나지 않는데."
에블린은 대답 대신 그의 손목을 보았다. 검은 문양 아래로 희미하게 뛰는 맥박이 있었다.
"당신을 살릴 힘은 아닙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손등 위에 손가락 하나를 올렸다.
차가운 어둠이 피부를 타고 올라왔다. 본능이 손을 떼라고 소리쳤다. 에블린은 그 소리를 눌렀다.
"하지만 저것이 당신을 굶겨 죽이지 못하게 할 수는 있어요."
세드릭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는 에블린의 손을 거칠게 떼어 냈다. 살의가 복도에 얇게 번졌다. 로웬이 검을 고쳐 잡았다.
"왜 그런 일을 하지?"
세드릭이 물었다.
"동정이라면 여기서 죽는 편이 낫다."
"동정은 안 합니다."
에블린은 피가 맺힌 손끝을 감췄다.
"저는 당신이 필요해요."
그 말에 복도는 이상할 만큼 조용해졌다.
"로젠버그의 영애가 내게 바라는 게 무엇이지?"
"당신의 이름과 칼입니다. 제가 필요할 때 대공가의 이름을 빌리고 싶어요. 누군가를 꺾어야 할 때 당신의 칼도요."
세드릭의 입가가 비틀렸다.
"대담하군."
"대공 전하도 제 힘이 필요하잖아요."
에블린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저는 저주가 폭주할 때 당신을 부를 수 있게 하겠습니다. 대신 당신은 제가 원할 때 제 편에 서세요. 서로를 구원하겠다는 거짓말은 하지 맙시다. 서로를 이용하면 됩니다."
세드릭은 한참 동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눈에는 여전히 경계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에블린은 그 안에서 아주 희미한 흥미를 보았다.
마침내 그가 장갑을 벗었다. 검은 문양이 번진 손가락 끝을 이로 물자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피가 대리석 위에 떨어지는 순간 가시들이 일제히 몸을 떨었다.
"이름을 빌리겠다는 자는 많았다."
세드릭이 피 묻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내 피 앞에서 서 있겠다는 자는 없었지."
에블린은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계약은 말로 묶는 것이 아니었다. 피로 묶어야 상대가 배신하지 못한다.
그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일 다시 와."
세드릭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네 피로 방금 한 말을 증명해. 그러면 내가 네 제안을 들을지 결정하지."
그것은 허락이 아니었다.
명백한 시험이었다.
에블린은 검은 성을 휘감은 어둠과 세드릭의 피를 차례로 바라봤다. 화형대의 불길보다 더 위험한 곳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스스로 들어온 지옥이었다.
"좋습니다."
에블린은 미소 지었다.
"내일 뵙죠. 대공 전하."
검은 가시가 다시 한 번 낮게 꿈틀거렸다. 그러나 붉은 뿌리는 대리석 틈에서 끊어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